엄마가 꽃보다 아름다운 청년의 이야기
엄기봉씨는 시쳇말로 좀 모자란 사람이다. 어릴 때 앓은 열병으로 정신지체 1급 장애자가 된 그의 나이는 마흔살이지만, 정신연령은 여섯살에 머물러 있다. 그런 기봉씨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80살의 어머니다. 거동이 불편하고 귀가 어두운 노모를 위해 그는 아침이면 밥상을 차리고, 세숫물을 데워놓고, 화장실 가는 길의 눈을 치운다. 잔칫집에 불려가도 배를 곯고 계실 어머니를 생각하는 기봉씨는 주인댁이 싸준 음식이 식을까봐 집까지 한달음에 달려간다. 정부의 보조금에 의존해 살아가야 하는 어려운 처지지만 기봉씨는 봄이면 쑥을 캐서 내다 팔고, 가끔씩 생기는 동네 허드렛일을 챙기며 어머니와의 단란한 삶을 꾸려나간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기봉씨는 어머니를 위한 또 하나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것은 마라톤이다. 어릴 때부터 달리기 하나만큼은 자신있었던 그는 “신발이 닳을까 아까워” 맨발로 동네를 달렸고, 결국 면에서 주최한 마라톤대회에서 3등을 하기도 했다. 어머니에게 상금을 안겨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기봉씨는 트레이너를 자처한 이장님과 함께한 겨울에도 민소매 차림으로 신작로를 달리고 또 달린다.
2003년 2월 방송된 <맨발의 기봉씨>는 엄기봉씨의 장애를 극복하려는 노력, 홀어머니를 꼼꼼하게 챙기는 정성, 그리고 마흔살 남자의 그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해맑은 미소 덕에 시청자의 큰 반향을 얻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모조 마이크를 들고 일기예보를 따라하고, 일회용 카메라로 어머니와 꽃의 자태를 찍으며, 담벼락에 빨래를 너는 기봉씨의 모습도 묘한 감동을 줬다.
기봉씨가 일상을 사는 모습과 서울에서 열리는 큰 마라톤대회에 참여하는 과정을 담은 이 다큐멘터리가 권수경 감독의 눈길을 붙잡은 것은 지난해의 일이다. 조감독으로 참여한 <무영검>을 통해 친구가 된 신현준의 권유로 뒤늦게 이 프로그램을 접한 권 감독은 자신의 유년 시절, 같은 마을에 살던 한 정신지체장애자 아저씨와 유독 엄했던 어머니를 각각 떠올리게 됐다. “사람들이 기봉씨의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효도라는 게 대단한 게 아닌데 이를 실천하기란 어렵지 않나. 기봉씨의 모습을 보면서 각자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소중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꽤 오랜 시간에 걸쳐 당사자를 설득해 영화화에 대한 허락을 얻어낸 그는 다큐멘터리의 리얼한 분위기를 최대한 살리면서 극적으로 호소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일기예보, 카메라, 빨래 같은 실제의 에피소드는 영화적 장치 속에서 좀더 감정을 증폭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며 마을 이장, 이장의 아들, 사진관집 딸 같은 가공의 캐릭터를 통해 갈등과 애정의 구조를 만들었다. 기봉 역의 신현준을 비롯해 김수미, 임하룡, 탁재훈, 김효진이 출연하는 <맨발의 기봉이>는 내년 설 개봉을 목표로 10월29일부터 경남 남해에서 촬영을 진행하고 있다.
권수경 감독 인터뷰
“다큐의 리얼함을 최대한 살리려고 한다”
-현재 얼마나 촬영됐나.
=3분의 1 정도다. 순조로운 편이다.
-실제 주인공을 만나봤나.
=촬영 직전에 엄기봉씨와 어머니 김동순씨를 만났다. 뒤늦게 만난 것은 실제 인물에 너무 빠져들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 영화의 방향을 잡았나.
=나는 남들에게 이 영화에 대해 기봉과 어머니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라고 말한다.
-기봉 역으로 신현준을 캐스팅했다.
=신현준과는 이 프로젝트의 출발부터 함께했다. 일단 그가 기봉이 역할을 너무 하고 싶어했으니까. 그 이후로도 함께 만들어왔다. 신현준은 일상적인 코미디에 능하다고 생각한다. 잘생긴 외모를 ‘보완’하기 위해서 윗니에 틀니를 끼우고 연기하고 있다.
-어떤 허구적 요소를 첨가했나.
=실제 이야기에도 이장님이 계시지만, 영화에서의 이장님은 좀 희화화했다. 이장님의 아들과 사진관집 딸이라는 여성 캐릭터를 넣은 것은 비교와 갈등구조를 갖추도록 하기 위해서다. 또 장애인 이야기라는 선입견을 극복하기 위해 코믹한 대목도 삽입했고, 배경도 남해로 바꿨다. 기봉의 정신연령도 여덟살 정도로 올렸다. 하지만, 마라톤에서 감동을 이끌어내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것은 다큐와 비슷할 것이다. 최대한 다큐의 리얼함을 살리려고 하는데, 그건 연출의 영역을 능가하는 말 그대로 리얼리즘의 매력이기 때문이다.
-실제의 이야기를 영화화하는 것의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것이 진짜로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인 탓에, 각자의 경험과 기억에서 ‘그래, 저거야’ 혹은 ‘저럴 수가’ 하는 무언가를 끌어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공감과 감동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