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혁명이었다. 1972년 미국에서 개봉한 <목구멍 깊숙이>는 성인영화, 포르노, X등급영화, 음란물,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건 그들 영화의 역사를 한순간에 바꿔놓았다. <목구멍 깊숙이>는 여성과 남성의 성기를, 그 성기와 상대방 이성의 입맞춤을, 그리고 적나라한 살색의 파노라마를 대형 스크린 위에서 보여줬다. 이 영화는 포르노를 중산층의 문화로 승격시켰으며, 검열에 대한 치열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또 다른 할리우드’를 만들어냈다. 1월12일 개봉하는 <인사이드 딥 스로트>는 바로 <목구멍 깊숙이>(Deep Throat)가 일으킨 혁명을 차분하게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다. <목구멍 깊숙이>와 그것이 일으킨 포르노 혁명의 ‘인사이드’를 깊숙이 들춰보자. 혁명은 어떻게 이뤄졌나, 그리고 어떻게 무너졌나.
그해, 세계는 유난히 시끄러웠다. 베트남에선 미군들이 마지막 발악 중이었고, 이스라엘 공항의 일본 적군파와 뮌헨올림픽 선수촌의 검은9월단은 테러리즘의 새 장을 열었으며, 전세계 곳곳의 히피들이 머리에 꽃을 두른 채 대마초와 LSD에 취해 있었고, 새벽종이 울리는 새 아침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던 한국 사람들은 7·4 남북공동성명과 10월 유신이라는 폭탄선언을 연달아 맞았다. 세계가 동시다발적인 폭발음에 흔들리고 있던 1972년의 어느 날 미국 뉴욕 맨해튼의 월드시어터에서는 또 하나의 시한폭탄이 대중 앞에 선보였다. 미국 최초로 일반 극장에서 와이드 릴리즈된 포르노영화 <목구멍 깊숙이>(Deep Throat)가 그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싸구려 저질영화였지만, <목구멍 깊숙이>를 혁명이라 칭하는 것은 어색하지 않다. “<목구멍 깊숙이>는 당대의 <블레어 윗치>”라는 한 영화제작자의 말처럼 2만5천달러의 제작비를 들인 이 영화는 전세계적으로 6억달러 가까운 수익을 거뒀다. 하지만 흥행수익이 다는 아니다. 우선, 이 영화는 수천만명의 미국인(특히 여성)에게 난생처음 대형 스크린을 통해 남성과 여성의 성기가 뜨겁게 ‘합궁’하는 모습, 즉 하드코어 액션을 보여줬다. 여성의 입과 남근의 매끄러운 합체를 처음 목도한 이들 또한 상당수였다. 당시 포르노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목구멍 깊숙이>는 미국 전역 300여개 극장에서 거의 동시에 개봉했고 수년 동안 상영됐다. 대다수가 중산층인 관객의 줄은 극장 밖 골목까지 이어졌고, 이중에는 마이크 니콜스, 트루먼 카포티, 자니 카슨 같은 유명인사도 포함돼 있었다. 밥 호프와 자니 카슨은 자신이 진행하는 토크쇼에서 이 영화를 언급했고, <뉴욕타임스>는 ‘세련된 포르노’(porn chic)라는 신조어로 이 영화의 등장을 환영했다. <목구멍 깊숙이>는 이후 수많은 후예들이 따르게 될 전범이 됐고, 머지않아 포르노영화를 지칭하는 일반명사가 됐다. 이 영화는 또한 법집행자들에게는 검열의 칼날을, 자유주의자들에게는 표현의 자유를 위한 창끝을 더욱 날카롭게 다듬게 하는 치열한 전선이 됐다.
포르노영화의 태동 그리고 성장
<목구멍 깊숙이>가 등장하기 전, 미국에 하드코어 영화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드코어는 영화가 발명된 직후부터 꾸준히 만들어졌다. ‘스태그 필름’(수컷 영화, stag film) 또는 ‘블루 무비’라 불리는 이들 영화는 1920년대에 확립돼 1960년대까지 전통을 이어갔다. 고작 10분 남짓한 분량의 이들 영화는 남녀 또는 동성간의 노골적인 성행위를 담았다. 영화라기보다 그냥 영상물이라 부르는 게 적합할 이것은 조악한 미학을 자랑했고, 대부분 무성영화였다. 주로 남성 전용 클럽이나 남학생 기숙사에서 상영됐던 이들 영화는 명백히 불법이었지만, 궁극엔 미국 포르노 산업의 뿌리가 됐다.
극장에서 합법적으로 상영될 수 있는 성인물은 소프트코어 영화였다. 50년대 들어 ‘나체촌 영화’라는 장르가 개발됐는데, 이들 영화는 “스카이 콩콩을 타는 여성이나 누드로 배구를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주로 엉덩이와 가슴을 보여줬지만, 절대 남근은 등장하지 않았다”(존 워터스 감독). 1959년 데뷔작 <불멸의 티즈씨>를 발표한 러스 메이어는 소프트코어 영화에 내러티브를 부여해 한 단계 도약을 이끈다. ‘하드’와 ‘소프트’ 사이의 틈새도 있었다. 극장에서 버젓이 성기를 보여주는데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영화가 있었으니, 그것은 ‘성교육’의 명분을 내건 영화들이었다. 예컨대 아기의 출산과 관련된 전후사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엄마와 아빠> 같은 영화는 ‘교육’의 깃발 아래 숨어든 음탕한 욕망들을 위한 작품이었다.
주류 영화계에서도 성의 바람은 거셌다. 삽입 장면을 담고서도 뉴욕의 상업극장에서 상영된 <덴마크에서의 포르노그래피>, 재키 케네디가 관람한 뒤 매출이 2배로 뛰었다는 스웨덴영화 <나는 궁금하다>, 덴마크영화 <나, 여성> 등 북유럽영화들은 성 해방의 연대를 맞아 큰 화제를 모았다. <졸업> <미디엄 쿨> <이지 라이더> <미드나이트 카우보이>처럼 과감한 성적 표현을 담은 미국영화도 속속 발표되기 시작했다.
<목구멍 깊숙이>의 세 주역이 모이다
<목구멍 깊숙이>는 이러한 시대의 물결을 타고 등장했다. 헤어드레서였던 제라드 다미아노 감독은 미용실을 찾은 여성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하다가 이들에게 한결같이 성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윽고 그는 자신이 “성혁명의 최전선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곧, 그는 그동안 꿈꿔오던 영화라는 세계로 발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출발점은 스태그 필름이었다. “내 영화의 대부분이 포르노였던 유일한 이유는 당시에는 그곳만이 독립영화 제작자가 종사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2만5천달러 또는 그 이하라는 제한된 예산에서 일하다보면 위대한 미국식 러브스토리를 만들 수 없다. 그 정도의 돈으로는 침실에만 붙들려 있다가 아주 가끔씩 섹스 대신 감정을 표현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다미아노는 얄팍한 다큐멘터리 <섹스 USA>를 만들면서 1971년 <목구멍 깊숙이>의 두 주역인 해리 림스와 린다 러브레이스를 처음 만난다. 당시 해리 림스는 뉴욕 스태그 필름계의 유명인사였다. 뉴욕 이스트빌리지에서 히피로 생활하다 성인 영화계에 진입한 그는 꽤 쓸 만한 남성의 소유자였다. “미니 마우스만 봐도 벌떡 선다”는 이 타고난 정력가는 한때 하루에 스태그 필름을 5편씩 찍기도 했다. <섹스 USA>에서 남자주인공이었던 림스에 비해 린다 러브레이스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다. 러브레이스가 그나마 <섹스 USA>에 출연할 수 있었던 건 첫 남편 척 트레이너 덕이었다. 플로리다에서 뉴욕으로 그녀를 데려와 여러 음란물 제조업자 앞에 선보인 것은 트레이너였다. 러브레이스에게 그와의 만남은 동시에는 지독한 불행이었다. 포주 기질이 다분했던 그는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아내를 제작자의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가게 하는 인간 쓰레기였다. 다미아노를 만나기 전 러브레이스는 트레이너의 주선으로 몇편의 스태그 필름 작업을 했는데, 그중 최악은 개와의 수간(獸姦)을 내용으로 한 <도가라마>(Dogarama)였다.
제작비 1만5천달러짜리 <섹스 USA>로 60만달러의 수익을 제작자에게 안겨준 다미아노는 장편 극영화 제작이라는 꿈에 매달렸다. 애초 계획은 70년 발표된 <모나>의 리메이크였다. 영화평론가 리처드 콜리스가 말한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의 극장에서 상영된, 그리고 경찰의 제지를 받지 않은 최초의 포르노영화”의 리메이크 계획은, 그러나 뒤틀렸다. 모든 건 다미아노가 그 짬을 이용해 한편의 스태그 필름을 찍으면서 시작됐다. 간호사 러브레이스가 ‘그곳’을 다친 림스를 치료해준다는 내용의 이 영화에서 간호사의 치료수단은 바로 입이었다. 촬영이 시작되자 먼저 눈이 휘둥그레진 것은 림스였다. “내 거시기가 통째로 그녀 입 안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거시기와 고환과 체모의 절반이 목구멍 깊숙이 들어간 것이다.” 충격은 다미아노에게도 곧바로 전해졌다. 림스의 페니스를 목구멍 안까지 밀어넣는 러브레이스의 특별한 기술에 놀란 그는 계획을 수정했다. 그녀를 소재로 장편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 다미아노는 주말 동안 시나리오를 써서 ‘목구멍 깊숙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는 이 새로운 성적 용어를 개발한 데 이어, 린다 보어먼에게 옆집 소녀 같은 느낌의 린다 러브레이스란 이름을 만들어줬다.
가슴보다 성적인 목구멍을 가진 여배우
제작자인 부치 페라이노는 다미아노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러브레이스는 전혀 섹시하지 않았다. 러브레이스의 얼굴은 지나치게 소녀 같았고, 가슴도 작았다. 그는 다미아노에게 “가슴이 커야 표를 팔 수 있다구!”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러브레이스를 캐스팅한다는 사실은 제작비 2만5천달러를 고스란히 날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제작비는 페라이노의 부친인 안소니가 대준 것이었고, 안소니는 뉴욕 마피아의 5대 파벌 중 하나인 콜럼보 패밀리 소속이었다. 다미아노도 양보할 수 없었다. 대사 처리를 걱정하는 페라이노를 안심시키기 위해 러브레이스에게 “메리는 작은 양을 가졌어”란 구절을 따라하게 하는 스크린테스트(?)를 거치기도 했다. 그래도 불안했던 다미아노는 러브레이스에게 도움을 구했다. “네 입으로 페라이노의 거시기를 자극한다면 마음을 바꿀 거야.” 러브레이스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여자주인공은 정해졌지만, 남자주인공은 아직 없었다. 해리 림스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촬영을 플로리다에서 진행하기로 한 다미아노는 여행경비를 줄이는 데 우선적인 관심을 쏟았다. 남자주인공은 현지에서 캐스팅할 계획이었다. 꼭 참여하고 싶었던 림스는 다미아노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던졌다. “나를 스탭으로만 써주면 일당은 20달러만 받을게.” 림스는 제작부장이라는 직함과 함께 플로리다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1972년 1월 플로리다에서 촬영을 시작하려 했을 때, 결국 림스는 현지 캐스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다미아노에 의해 남자주연으로 발탁됐다.
총 12일 중 해가 나오기를 기다린 6일을 뺀, 6일 동안의 촬영이 진행되면서 사소하지만 민감한 문제가 발생했다. 러브레이스의 남편인 척 트레이너의 존재였다. 미국 포르노 산업 사상 첫 번째 ‘서류가방을 든 포주’, 그러니까 ‘여자친구의 매니저를 자처하는 남자친구’였던 트레이너는 자신보다 젊고 잘생긴 림스를 질투했을 뿐 아니라 러브레이스에게도 가혹하게 굴었다. “첫 촬영이 끝난 뒤 척은 내가 세트장에서 웃었다는 이유로 방에 들어온 뒤 나를 죽도록 팼다. 나는 도와달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옆방에 있던 스탭 중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훗날 러브레이스를 ‘반포르노 운동’의 일원이 되게끔 하는 이 사건이 실제 일어났는지 여부는 알 도리가 없지만, 다미아노 또한 트레이너를 촬영장의 방해꾼으로 여긴 건 사실이다. 다미아노는 트레이너에게 제작부 일을 맡겼고, 러브레이스와 림스의 중요한 섹스신을 촬영해야 하는 날, 그를 멀리 심부름 보내는 지혜를 발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