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성혁명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딥 스로트> [2]
2006-01-18
글 : 문석

<목구멍 깊숙이>의 폭발

완성된 이 영화가 개봉 초기부터 큰 흥행성적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뉴욕 개봉 초 뜨뜻미지근했던 반응이 갑자기 폭발한 것은 존 린지 뉴욕 시장이 ‘포르노그래피 일소’를 내걸고 이 영화 프린트를 압수하면서부터였다. 이 사건이 뉴욕의 모든 일간지 1면을 장식하면서 일반인들도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포르노그래피는 문화적 전투 지대의 이름이었다”는 린 헌트의 이야기는 들어맞는다.

린다 러브레이스
해리 림스

물론 영화 자체의 힘도 있었다. 특히 코믹한 요소는 적나라한 화면에 대한 부담을 중화해주었다. 주인공 린다 러브레이스는 섹스를 해도 뭔가 허전함을 느끼는 여성이다. 의사(해리 림스)는 러브레이스의 클리토리스가 하체 어딘가가 아니라 목구멍 깊숙이에 있다고 말한다. 의사가 “여기에라도 클리토리스가 있다는 데 감사해야 해요”고 하자 러브레이스는 “남 얘기라고 참 쉽게 말하네요. 당신 고환이 귀에 달려 있다면 어떻겠어요?”라고 묻는다. 그러자 의사가 답한다. “뭐 어때요? 내가 사정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잖아요.” 그녀는 의사의 친절하고 열정적인 ‘시술’을 받은 뒤 오르가슴을 느낀다. 그 병원의 간호사로 취직한 그녀가 왕진을 다니며 즐거움을 만끽한다는 게 60분 남짓한 이 영화의 결말. <목구멍 깊숙이>는 또한 여성의 오르가슴 쟁취에 대한 당시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에 드물게 귀 기울인 영화이기도 했다.

개봉 얼마 뒤부터 페라이노의 사무실은 돈다발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들은 현금을 쓰레기봉투에 담아 사무실에 뒀는데, 통행이 어려울 정도였고, 금액을 셀 수 없어서 봉투의 무게로 달았다. 이들의 수금이 순조로웠던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수금원들은 극장 주인을 찾아가 “5만달러를 당장 내놓아”라고 명령하면 그만이었다. 극장주가 비협조적일 경우, 페라이노는 사람을 보내 프린트를 빼앗은 뒤 라이벌 극장에 줬고, 때때로 그 극장은 화재사건을 맞아야 했다. 불행히도 이 엄청난 수입 중 배우와 감독의 몫은 거의 없었다. 러브레이스와 림스는 애초 받기로 했던 1200달러와 250달러에 만족해야 했고, 흥행수익의 30%를 받기로 돼 있던 다미아노도 보너스 격으로 받은 1만5천달러 외에는 돈을 더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진짜 승자인 페라이노 패밀리조차 이 엄청난 성공 이면에 드리운 먹구름을 보지 못했다. 하긴, <목구멍 깊숙이> 이후 얼마간 이 영화의 주역들의 발걸음은 가벼웠으니. 다미아노는 이듬해 차기작인 <존스양 안의 악마>를 통해 좀더 진지한 포르노에 도전했고, 성공했다. 그는 덕분에 ‘포르노계의 베리만’ 또는 ‘포르노계의 스코시즈’라는 별명을 얻었다. 다미아노는 메이저 스튜디오 MGM으로부터 “최소한 하나의 히피 장면과 레즈비언 장면”이 있는 영화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공식에 맞춰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호기있게 거절했다. 그는 당시 “머지않아 섹스와 영화가 하나로 될 것”이라는 이상주의자다운 꿈을 꾸고 있었다. 린다 러브레이스는 <플레이보이>의 표지를 장식했고, 토크쇼의 게스트로 불려다녔으며, 온갖 인터뷰의 주인공이 됐다. 성인잡지 <스크류>에 과거 그녀가 개와 맺었던 사연이 보도되면서 흥분은 다소 가라앉았지만, 라스베이거스에서 1주일에 5만달러를 받으며 공연을 펼치는 그녀는 여전히 스타였다. 해리 림스 또한 <존스양 안의 악마>에 출연하는 등 여전히 화려한 활동을 펼쳤다. 브라이언스톤 필름스라는 배급사를 만든 페라이노 패밀리는 <맹룡과강>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 등을 배급하면서 더욱 큰 돈을 벌었다.

검열, 미즈위원회, 비디오와의 싸움 그리고 패배

이들이 성공에 도취하는 동안, FBI와 검찰은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침내 1976년 연방검사 래리 패리시는 칼을 빼들었다. 첫 번째 타깃은 해리 림스였다. 그는 이 나약한 배우를 잡아당김으로써 제작자들과 그 배후의 마피아의 몸통까지 감자덩굴처럼 굴러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표현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보장하는 미국 수정헌법 1조는 래리 패리시에게 눈엣가시였지만, 음란물을 다른 주로 옮기는 행위가 중죄에 해당된다는 법조항을 통해 이들을 낚으려 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이상하게 돌아갔다. 잭 니콜슨, 워런 비티 등이 림스의 재판 비용 모금운동에 나섰다. 77년 5월 재판부는 8명의 피고에게 3개월에서 1년 사이의 징역과 1만달러의 벌금이라는 비교적 부드러운 판결을 내렸다. 애초 5년형을 선고받았던 림스의 기소는 취소됐다. 풀려난 해리 림스는 하버드대학에서 특강을 하는 등 평소처럼 명랑하게 생활하는 듯 보였지만, 수년간의 재판에 시달린 그의 정신은 황폐한 상태였다. 그는 알코올과 마약에 중독됐고, 미니 마우스는커녕 눈 앞의 벌거벗은 미녀조차 그의 남성을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 가장 타격을 입은 쪽은 페라이노 패밀리였다. 부치의 아버지인 안소니는 유죄 판결을 받은 뒤 5년 가까이 이탈리아로 피신했고, 이로 인해 영화사는 유명무실해졌다.

<목구멍 깊숙이>를 상영하는 극장 앞에서 상영중지를 요구하는 시위대

린다 러브레이스는 이미 뉴욕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연방검사와의 싸움은 피할 수 있었지만, 세상의 스포트라이트 밖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돈이 필요했던 그녀는 1980년 자서전 <시련>을 출간했다. 포르노 산업에서의 삶을 끔찍한 것으로 묘사한 그 책이 출간된 지 얼마 뒤 그녀는 ‘포르노에 반대하는 여성들’이라는 모임과 함께 행동하게 된다. 포르노를 거대 산업으로 이끈 상징적 인물이 포르노를 반대하는 최전선에 나서게 된 것이다. 레이건 시대는 여러모로 이전 시기와 달랐다. 레이건 정부는 포르노가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을 조사하는 ‘미즈위원회’를 구성했고, 이 위원회는 1985년부터 포르노 산업의 뒷구멍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포르노가 여성의 평등권에 있어 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캐서린 매키넌에 의해 주도된 ‘포르노에 반대하는 여성들’은 위원회에 적극 협조했고, 러브레이스의 케이스, 그중에서도 <목구멍 깊숙이> 촬영 첫날 호텔 방에서 있었던 폭행사건은 포르노가 한 여성을 파괴한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됐다. 결국 미즈위원회가 어정쩡한 결론을 내린 뒤, 러브레이스는 “‘포르노에 반대하는 여성들’ 또한 나를 이용한 건 똑같다. 그들은 모든 글에 내 사례를 인용하면서 내겐 돈 한푼 주지 않았다”고 불평했지만, 이미 그녀는 포르노와의 전쟁에서 탄두 빠진 탄피 신세가 돼버렸다.

그리고 MGM의 제안을 거절했던 다미아노는 그저 그런 포르노영화를 꾸준히 만들었지만, 세상은 이미 그의 것이 아니었다. 법집행자들의 추적과 마피아 사이의 암투 속에서 그의 후원자들은 사라졌고, 러브레이스와 함께한 <목구멍 깊숙이2>는 실패했다. 1982년을 기점으로 포르노 산업은 비디오로 무게중심을 급속히 옮겼다. 생산자는 영화의 10분의 1 정도의 제작비로 비슷한 매출을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소비자는 남 눈치를 보지 않고 리모컨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디오로의 전환을 반겼다. 하지만 이건 다미아노 같은 ‘장인’들에게 슬픈 일이었다. 영화를 누구나 쉽게 찍을 수 있게 됐다는 점보다는, ‘앞으로 빨리 감기’가 보편화됐다는 게 훨씬 더 치명적이었다. 이제 관람자들은 인물들의 대화 따위는 훌쩍 건너뛴 채 곧바로 ‘액션’ 장면에 몰입하게 됐고, 창의성은 군더더기가 됐다.

포르노 산업의 씨앗이 된 영화

<목구멍 깊숙이>의 포스터

<목구멍 깊숙이>는 정말이지 사건이었다. <워싱턴 포스트>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내부 정보 유출자에게 ‘딥 스로트’라는 이름을 붙였고, 가정용 비디오플레이어가 보급되기 4년 전인 73년 이 영화는 비디오로 출시됐다. <목구멍 깊숙이>는 포르노를 시정잡배나 포주들의 구멍가게 장사에서 일개 산업으로 발전시켰다. 마피아 같은 범죄조직은 이 새로운 돈줄에 열광했고, 전통적인 포르노 업자들도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핍쇼 상영기계 같은 포르노용 신종 산업이 개척됐다. 비즈니스 마인드가 도입됐고, 스타 시스템과 그에 의존한 시리즈물이 개발됐다. 비디오와 인터넷 등 포르노 상영관이 확장됐고, 매출은 거세게 불어났다. 현재 포르노 산업의 규모는 전세계적으로 570억달러, 미국에서만 200억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중 비디오 대여매출만도 8억달러에 달한다.

이제 사이버 시대에 안착한 포르노 산업은 30여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목구멍 깊숙이> 혁명’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난 듯 보인다. 컴퓨터 모니터와 케이블TV를 켜기만 하면 질리도록 살색 이미지를 접할 수 있는 지금은 톱스타급 연예인의 포르노가 아니라면 약간의 화제라도 모을 수 없는 시대다. 물론 달라지지 않은 것도 존재한다. “당시 <목구멍 깊숙이>를 기소했던 법은 바뀌지 않았다”는 <인사이드 딥스로트>의 내레이션처럼, <목구멍 깊숙이>는 검열 본능과 표현의 자유의지 사이의 긴장과 대립이 여전하며,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수정헌법 1조 같은 조항이 없는 우리 입장에서는 더더욱 중요한 논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실천적 결론’과 무관하게 <인사이드 딥스로트>는 마음 어딘가를 찌릿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그건 이미 가버린, 돌아오지 않을, 재현될 수 없는, 그리고 아직은 순박했던 극단의 시대에 대한 추억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어쩌면 패배한 혁명에 대한 회한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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