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헬드, 영화의 윤리성, 효과음의 배제, 진보적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던 사회파 감독 등…. 다르덴 형제를 일컬을 때마다 등장하는 수식어다. 그러나 나의 다르덴 형제와의 첫만남은 이런 거창한 언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은 <아들>이라는, 좀 지루하게 생겨먹은 영화제목의 광고를 어디선가 보고 대학로의 상영관으로 갔었을 게다. 초반부 내내 이상하게 생긴(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아저씨가 뒷모습만 보이며 어린 남자아이를 스토킹하고 있었다. 흠, 나이를 뛰어넘는 좀 파격적인 성애 스토리인가, 보 비더버그 감독의 <아름다운 청춘>의 퀴어버전인가보군, 근데 카메라가 너무 흔들리잖아, 쩝, 하며 영화를 쫓고 있다가, 글쎄 푹 잤다고 보는 게 맞을 게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 종종 자는 편이라 그러려니 하고 집에 가려는데, 이상하게 그 소갈머리 없던 아저씨의 ‘뒤통수’가 눈에 밟혔다. 그 뒤통수는 보통 뒤통수가 아녔다. 취한 듯 정신없이 흔들리는 카메라 앞에서 어린 남자 아이의 꽁무니를 조심스레 쫓던 나이든 아저씨의 ‘수상한 뒤통수’. 그래서 다시 보게 된 <아들>. 뒤통수의 진실은 스토킹이 아니었고 자신의 아들을 죽인 소년에 대한 복수심, 증오 등이 뒤섞인 그러나 그것을 실행하지 않는 이상한 용서가 자아내는 슬프고 ‘수상한 뒤통수’였다. 긴장된 음악도 없고, 그 흔한 플래시백이나 포워드 같은 장치없이 시네마베리테 스타일의 냉정한 카메라 앞에 서 있는 두 남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자아내는 기묘한 서스펜스. 그리고 그 복수의 서스펜스를 해소해주지도 않은 채 갑자기 툭, 하며 마치는 그 엉뚱하고 대범한 결말, 그리고 용서. 아니 이 이상한 영화의 출현은 무엇인가. 그래서 찾아보게 된 영화가 몇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는 다르덴 형제의 영화 <로제타>(1999)였다.
<로제타>, 내 인생 최고의 성장통 영화
소녀 로제타는 자신이 근무하는 일터에서 잘린다. 일자리를 찾으려 하지만 만만치 않다. 집에는 알코올 중독에다가 이웃집 아저씨들에게 몸을 파는 엄마가 있다. 와플 가게에서 다시 일을 하게 되지만 3일 만에 잘린다. 이런 징글징글한 소녀의 삶을 미니멀하게 보여주며 카메라는 역시나 소녀를 쉴새없이 따라다녔고, 소녀는 <아들>의 올리비에보다 더 ‘수상한 행동’들을 하고 있었다. 소녀는 집에 돌아가기 전 숲에 들러 숨겨놓은 장화를 꺼내 갈아 신는다. 자신의 신발을 아끼기 위해 장화로 갈아 신는 것일까 아니면 장화를 진짜 좋아해서 그러는 것일까 아니면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그러는 것일까, 잘 알 수 없었다. 소녀는 소년의 집에 놀러가서 하필이면, 낡은 장화를 달라고 한다. 소녀의 ‘수상한 장화’. 가난한 그녀는 곧잘 장화를 신고 뛰어다녔다. <섹스&시티>의 캐리가 맨해튼 거리에서 한 켤레에 50만원짜리 마놀로 블라닉과 지미추 구두를 수집하고 있을 때 벨기에의 가난한 소녀 로제타는 흙 묻은 중고 장화를 수집하고 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소녀의 장화가 어쩐지 신경 쓰였다. 낡은 장화를 소녀에게 주었던 소년이 소녀를 대신해 물고기를 잡으려다 강물에 빠지자 소녀는 그를 한참 동안 구하지 않는다. 소년을 모른 체하려 노력한다. 소년이 죽으면 자신이 소년의 와플 장사를 대신 할 수 있으리라는 섬뜩한 생각을 하는 걸까. 소년을 외면하고 도망가는 소녀의 흙 묻은 장화, 이상하게 눈에 밟히던 가난한 소녀의 수상한 장화. 다르덴 형제는 윤리적 판단의 상황 속에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른 채 수상한 장화를 신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소녀, 소년,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의 고통과 번뇌를 잔인하리마치 냉정한 시선으로 응시하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이 소녀를, 소년을, 그리고 이들의 상황을, 관계를, 용서를, 화해를, 구원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하고 조용히 묻고 있었다. 이후, <로제타>는 <케스>와 <도니 다코> 그리고 <릴리 슈슈의 모든 것>과 더불어 내 인생의 최고의 ‘성장통 영화’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의 모든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기다리게 만들었다.
약속과 용서는 시간을 모효화한다
<로제타>의 소녀가 자신의 일자리를 위해 소년을 미필적 고의로 죽기 직전 상황까지 몰고 갔다면, <더 차일드>에서의 가난한 소년은 돈을 위해 자신의 아기를 판다. <더 차일드>의 소년은 가난에 찌들어 도둑질을 하긴 했지만 그다지 ‘수상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가난에 떠밀려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멋부리기를 좋아하던 이 당돌한 소년은 자신의 자식을 비정하게 팔고 있었다. 그리고 후회하고 소녀에게 울면서 용서를 구했다. 여전히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그들의 곁에서 흔들리고 있었고 나에게 이 소년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혹은 이 소년을 이렇게 몰고 간 상황이 무엇일까요, 를 조용히 묻고 있었다. <아들>의 DVD를 다시 꺼내 봤다. 다르덴 형제는 인터뷰에서 ‘약속’과 ‘용서’가 시간을 무효화시킨다고 말하고 있었다. 지켜야 할 내일의 ‘약속’은 미래의 불안한 시간을, 어제의 잘못에 대한 ‘용서’는 과거의 잊고 싶은 시간을 무효화시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감’에 대한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 게다. 소녀는 소년의 어제를 용서하고, 소년은 소녀에게 내일을 (아마도) 약속할 것이다. 그 뒤는? 글쎄, 나는 영화가 마친 뒤 소년과 소년이 할지도 모를 ‘수상한 행동’이 어쩐지 신경 쓰였다. 그리고 영화를 찍고 있는 나를 쑥스럽게 돌아보았다. 그.렇.다.면. 나의 카메라는 어떻게 해야 하나. 어쩐지 신경 쓰이게 하는 다르덴의 카메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