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더 차일드>를 보는 네 가지 시선 [4] - 홍성남 평론가
2006-02-08
글 : 홍성남 (평론가)
복합적이고 심원한 피로의 감각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에서 로제타와 어머니가 다툼을 벌이다 로제타가 강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장면은 당혹스럽게 흥미로웠다. 물속에서 온통 진흙투성이라며 소리 질러대는 로제타를, 카메라는 대상에 가깝게 다가가곤 하던 이전 태도와는 다른 태도로 대한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이의 위험에 대한 방관자가 될 때와 마찬가지로 다른 이의 곤경을 지켜보면서도 그 앞으로는 두렵다는 듯 더이상 다가서길 꺼려하는 것처럼 보인다(주인공의 위험을 대하는 이런 식의 거리는 <더 차일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때 다르덴 형제의 다분히 이기적이면서 편의적이기도 한 카메라는 인간과 무관하게 작동하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의 손에 들려 인간과 함께하는 기계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바로 그것이 결국에 로제타가 물에서 빠져나왔을 때 영화를 보는 우리의 손을 잡고서 재차 집요한 관찰의 행보에 따라나서게 만든다.

은근히 젖어드는 피로의 감각

비록 엄정한 분류 방식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어떤 영화를 두고 진행 방식과 속도에 따라 흘러가는 영화나 뛰어가는 영화 등의 범주들 가운데 하나로 기술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한다. 여기서 후자의 범주를 제 혼자 내달리려 하는 영화와 보는 이들을 함께 뛰게 만드는 영화로 재분류하는 것도 한번 가정해볼 수 있다. 그럴 때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뒤이은 후자의 영화, 즉 어떤 ‘위기’에 처한 인물을 좇아가는 동시에 그걸 보는 관객의 손을 잡고 이끄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더 차일드>는 우리로 하여금 내내 물리적 이동, 그리고 상품과 존재 위치의 교환 행위를 해왔던 브루노 곁을 따라다니게 했다. 그와의 동행은 영화의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만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비어버린 듯한 시간에도 이뤄졌다. 그래서 마치 로베르 브레송의 <소매치기>를 연상시키는 듯한 구원의 순간으로 끝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밀려오는 감정은 (적어도 개인적인 경험에 따르면) 정신적 각성과 연관된 어떤 고양감보다는 보는 이의 몸을 향해 파고드는 피로감쪽이었다. 그처럼 끈질긴 보행과 그에 밀착 동반하는 시선이 자아내는 육체적 피로감은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을 보는 경험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주요한 인자라고 이야기해도 좋을 듯하다.

물론 세상에는 피로감을 안겨주는 다른 종류의 영화들도 있다. 이를테면 리들리 스콧의 <블랙 호크 다운>은 망막과 고막을 찢어놓을 듯한 영화적 소진의 감각을 주었다. 하지만 그런 ‘영화적 스트레스’는 잠시 눈과 귀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듯하더니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않고 훌쩍 사라져버리는 유의 것이었다. 반면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볼 때 느끼는 피로감은 육체로 전해져 그 내부로 침투해 들어오는 어떤 것이다. 그들 영화적 유물론자에게 ‘동행’이란 불투명한 존재로서의 인물들과 그들이 자리한 물적 리얼리티를 이해하고 그것들에 동참하고자 하는 물리적인 대응방식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발걸음을 따라간다는 것은 그들과 함께 ‘수수께끼’를 좇아가는 육체적·정신적 행위이면서 대상에 대한 어느 정도의 감정이입과 함께 완전한 이해의 실패를 경험하는 행위이며 그래서 내면에 모종의 두려움이 생겨나는 것을 불현듯 인지하는 행위가 된다. 여기서 비롯하는 복합적이고 심원한 피로의 감각은 브레송의 후기작 <유순한 여인>을 봤을 때 느꼈던 드물고 또 소중한 영화적 체험의 산물이라고 할 만했다.

걸음을 멈춰도 현실은 계속된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인물과 동행하는 발걸음으로 시작되었던 만큼 그것을 그만 멈추기로 결정했을 때 끝나버린다. 이건 어떻게 보면 예술적 기교를 부리는 듯해서 다소 거슬리는 면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간 지켜보던 리얼리티의 연속성을 승인하기 위한 최선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는 그저 걸음을 멈춘 것뿐이니 현실은 그와 상관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 이어지는 불투명한 현실에서,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의 온당한 지적대로, <약속>의 이고르나 <로제타>의 동명 주인공이 어떤 행동을 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이건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우리에게 안겨주는 또 다른 불안감의 원천인데, 예컨대 이고르는 다시 아버지의 포악한 세계로 돌아갈지도 모르고 로제타는 이제껏 꿈꿔왔던 정상적인 삶의 방식을 깡그리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의 프랑시는 5년 전의 세계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더 차일드>의 브루노는 이고르나 프랑시의 성장한 뒤의 모습이거나 로제타의 이성적 분신이라고 보는 게 가능해진다. 어떤 이들은 이런 지적이 다르덴 형제에 대해 대략 <아들>부터 떠돌곤 했던 의심 가운데 하나, 즉 게으른 반복의 의혹을 밑받침하는 증거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까지 다르덴 형제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은 사람은 다르게 생각하고 싶어진다. 부지불식간에 그들은 삶의 가변성을 통합적으로 사고하는 그들만의 우주를 바야흐로 구축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이다. 그들이 다음에는 어떤 식으로 우리의 손을 잡아끌지는 앞으로 더 흥미진진해지지 않을까?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