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국 배우 전성시대 [2]
2006-04-11
글 : 김도훈

그들은 캐리 그란트의 진화한 후예들

클라이브 오언

지금의 젊은 영국 배우들은 눈을 내리깔고 윗입술을 세운 영국 귀족의 얼굴도 아니고, 탄광촌 노동계급의 성난 얼굴만을 대변하는 프리 시네마의 ‘앵그리 영 맨’도 아니다. 그들은 캐리 그랜트의 진화한 후예들이다. 더이상 신사연하지 않으며, 머뭇거리지도 않는다. 그들은 바람피우고(주드 로), 섹스 비디오를 유출하고(콜린 파렐), 새로운 스티브 맥퀸의 자리를 넘본다(클라이브 오언). <타임>이 캐리 그랜트에게 보낸 칭송을 빌리자면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남자 동물”들이다. 여배우들 역시 <뉴욕타임스>의 말대로 “영국식 고고함을 끝끝내 지키다 잊혀져간”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와는 다르다. 캐서린 제타 존스, 케이트 베킨세일, 키라 나이틀리와 시에나 밀러는 가죽 의상을 입거나 빅토리안 치마를 걷어올리고 말 안장에 올라타 검을 휘두른다.

새로운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배경에는 90년대 이후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이고 있는 영국 영화계의 힘이 도사리고 있다. 워킹 타이틀을 비롯한 영국 제작사들의 부흥은 출연배우들에게 국제적 조명의 기회를 안겨주었고, 말쑥하게 만들어진 워킹 타이틀의 영화들은 오래된 제국을 뭔가 쿨하고 현대적인 장소로 다시 창조해냈다. 워킹 타이틀이 기나긴 미니시리즈의 로맨틱한 축약본처럼 만들어낸 <오만과 편견>은 더이상 지루한 고전이 아니었고, 런던은 다이어트를 고민하는 귀여운 노처녀들의 도시로 변모했다. 게다가 <해리 포터> 시리즈의 성공은 때마침 미국에 불어닥친 영국 숭배(Anglophilia) 신드롬에 불을 붙였다. 심지어 게리 올드먼에게도 이는 전혀 성가신 사태가 아닌 모양이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영국에 대해서 생각할 때 왕실과 버킹검 왕궁, 롤링 스톤스와 비틀스를 떠올렸지만 이제는 <해리 포터>가 되었다. 게다가 거기 출연하자 나는 갑자기 슈퍼스타처럼 대우받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이야기는 세치 혀 위로 되돌아간다. 미국인의 오래된 영국 억양 페티시는 어제오늘 일도 아니다. <뉴스데이>의 로버트 맥닐의 설명에 의하면 영국 억양은 “같은 말을 하더라도 더욱 품위있고 설득력있게 들리기 때문”에 미국인들에게 막연한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화이널 디시전>(1996)에 출연한 데이비드 서쳇의 경험은 보통의 미국 배우들이 영국 억양에 대해 품고 있는 환상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동료 배우들은 내 억양을 듣고 나더니 영국 출신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왕립극예술학교에서 공부했다고 대답했더니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 굉장하군요. 우리 모두 당신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영국식 억양이 언제까지나 배우들의 질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젊은 영국 배우들은 미국 억양을 선배들보다 더 자유롭게 구사하는 것을 무기로 미국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전통 속에서 할리우드식 에너지를 뿜어내다

<엘비스>의 조너선 리스 메이어스

영국판 <퀴어 애즈 포크>의 스타이자 <니콜라스 니클비>의 주연을 맡았던 찰리 헌남은 일찌감치 LA에 터전을 잡았다(그는 영국 TV에서도 미국 억양을 고수하는 바람에 고향 팬들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촬영이 있을 때만 콩코드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던 선배들과는 달리 젊은 배우들은 캘리포니아에 저택을 사서 장기간 거주하고 있다. 영국 배우들의 미국 억양이 해가 갈수록 완벽해지고 있다고 평가하는 프린스턴대학의 영어교수 엘라인 쇼왈터는 그 이유를 “젊은 영국 배우들 중 많은 수가 미국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젊은 영국 배우들은 더 많은 돈과 기회가 도사리고 있는 할리우드에 정착하기 위해 영국성을 감추는 일을 어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로렌스 올리비에가 무덤에서 깨어날 일이지만, 찰리 헌남 같은 젊은이들은 늙은이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최근 <매치 포인트>의 조너선 리스 메이어스는 <CBS> 미니시리즈 <엘비스>에서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기했다. 미국과 영국 언론들은 아일랜드 배우가 미국의 전설을 연기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의심과 근심을 시작했고, 메이어스조차 인터뷰에서 초초하게 자문했다. “나 같은 아일랜드 남자가 미국의 아이콘을 연기하는 것은 만용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지인들에게 엘비스를 연기하게 되었다고 밝히자 모두들 키득거리기 바빴다. 농담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채자, 그들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사색이 되었다.” 그러나 메이어스는 올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TV(미니시리즈·영화)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모든 근심을 떨쳤다. 자신만만하게 시상대에 오른 그의 얼굴은 새로운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선배들처럼 윗입술을 올리고 건조하게 셰익스피어식으로 말하는 능력을 지녔으되, 젊고 건방지고 지칠 줄 모르는 할리우드식 에너지를 품었다. 젊은 영국인들은 미스터 다아시이며, 엘비스 프레슬리이며, 배트맨이다. 지금 영국 영화계는 역사상 가장 섹시한 방식의 진화과정을 거치고 있는 중이다.

영국 배우들의 산실

그들은 셰익스피어의 가르침을 받았다

길거리 캐스팅으로 스타덤에 오른 조너선 리스 메이어스 정도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젊은 영국 배우들은 크고 작은 드라마학교와 극단에서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을 한번쯤은 연기해본 경험이 있다. 물론 영국과 아일랜드의 수많은 드라마학교와 극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어야 할 곳은 RADA와 RSC일 것이다.

영국왕립극예술학교(RADA: Royal Academy of Dramatic Art)

1904년 셰익스피어 연극 제작자인 허버트 비어봄이 설립한 RADA는 영국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지닌 드라마학교. 1920년 영국 왕실로부터 칙허를 받은 뒤, 24년부터는 영국왕립극예술학교로 개명하고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매년 32명의 신입생만 선발하는 RADA는 영국에서 가장 입학이 힘든 학교로 알려져 있다. 단, 학력에 관계없이 지원이 가능하며 합격 조건은 순수하게 오디션의 결과에 달려 있다. 이곳 출신으로는 숀 빈, 로저 무어, 존 길거드, 앨런 릭만, 존 허트, 케네스 브래너, 앤서니 홉킨스, 요안 그리피스, 매튜 리스, 매튜 맥파든 등이 있다.

로열셰익스피어극단(Royal Shakespeare Company)

셰익스피어의 고향인 스트래퍼드 어폰 에이본에 자리한 RSC는 언급이 새삼스러운 전통의 극단이다. RSC의 역사는 스트래퍼드에 세워진 셰익스피어 기념 극장이 처음으로 <헛소동>(Much Ado About Nothing)을 공연했던 18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극장에 소속되어 있던 극단은 곧 전 영국에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고, 1925년 왕실의 칙허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1960년에 극단장 피터 홀의 계획으로 항구적인 극단이 결성되어 마침내 로열셰익스피어극단이라는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현재는 스트래퍼드 외에도 런던과 뉴캐슬에 지부를 두고 있다. RSC 출신으로는 폴 베타니, 케네스 브래너, 팀 커리, 주디 덴치, 미아 패로, 레이프 파인즈, 더스틴 호프먼, 제레미 아이언스, 벤 킹슬리, 이안 매켈런, 헬렌 미렌, 피터 오툴 등이 있다.

사진제공 REX, GAM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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