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과 카메라를 게으르게 하는 유혹자
배우를 국적으로 갈라 연기를 논하는 것은 크리켓의 규칙을 이해하려는 것만큼 부질없는 노력일지도 모른다. 영국 배우들은 결코 단번에 들이켤 수 있는 한잔의 홍차가 아니다. 제레미 아이언스와 휴 그랜트가 데이비드 니븐과 마이클 요크의 계보를 잇는 영국 귀족 신사의 얼굴이라면, 노동계급과 아웃사이더로 자주 분하는 로버트 칼라일, 크리스토퍼 에클레스턴, 데이비드 튤리스, 이안 하트는 리처드 해리스, 알버트 피니를 위시한 ‘앵그리 영 맨’ 세대 배우들의 좀더 왜소한 후배들이다. 웬만하면 영화도 문학 각색물을 선호하는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있는 반면 연극에 별로 미련을 두지 않는 마이클 케인도 있다. 팀 로스와 게리 올드먼은 언제든 대서양을 건너가 ‘저수지의 개’ 멤버가 될 수 있는 배우이며, 미국인은 물론 동양계로 분해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변신의 귀재 밥 호스킨스, 벤 킹슬리 같은 배우도 있다.가장 예외적인 인물인 숀 코너리는 개인주의적 영웅의 이미지와 육체성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오히려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게리 쿠퍼 같은 할리우드 스타의 풍모를 지녔다. 그럼에도 영국 배우의 집단적 속성과 힘을 간추릴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문학의 전통과 연극-TV-영화의 긴밀한 교류로 이뤄진 특정한 시스템에서 태도와 스타일을 형성한 연기자들이며, 할리우드와 유럽영화에 지속적으로 그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영국 배우들은 할리우드 스타 시스템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영화 텍스트에 창조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연기자 집단이다.
장인으로서의 배우
자국영화에 대해서는 자조를 넘어 자학을 즐기는 영국인이지만 배우에 관해서는 다르다. 긍지가 높다 못해 케빈 스페이시, 글렌 클로스, 존 말코비치 같은 우수한 미국 배우를 은근히 ‘명예 영국 배우’로 취급하기도 한다. “영국 배우는 연기를 잘한다”는 널리 유포된 속설은 따지고 보면 그들의 연기가 가장 감쪽같다거나 진정하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다. 사실 연기에서 무엇이 리얼하고 무엇이 과장인가의 기준은 시대와 더불어 변하게 마련이다. 당대에 형식파괴로 불렸던 연기는 수십년 뒤 ‘신파’가 된다(‘신파’도 새로울 신(新)자를 쓴다). 1993년 <인디펜던트>는 “온전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고, 우스꽝스럽지 않게 시대극의 의상을 소화하며 식탁과 결투의 매너에 통달한 연기”가 미국인들이 영국 배우에 갖고 있는 통념이라고 썼다. 한마디로 영국 배우들은 기교적으로 능란하다. 보잘것없는 영화의 조연으로 출연할 때면 그들은 한손을 등 뒤로 묶어놓은 듯한 가벼운 분위기로 모자람없이 제 몫을 한다.
영국의 거장 로렌스 올리비에와 액터스 스튜디오 출신 더스틴 호프먼이 공연한 <마라톤 맨>(1976) 촬영현장은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극중 인물로 둔갑하는 트릭을 밥 먹듯이 구사해온 올리비에에게 스릴러 <마라톤 맨>은 ‘일거리’ 중 하나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메소드 연기자 호프먼은 느리고 고통스럽게 캐릭터의 진실을 발견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극중 인물 토마스가 되기 위해 현장에서 줄곧 달리기를 하는 호프먼에게 올리비에가 말했다. “거, 세트에서 고만 뛰고 그냥 연기나 하는 게 어떻소?” 더스틴 호프먼처럼 훌륭한 메소드 연기자는 아예 그 인물로 살고자 한다. 그러나 연기는 어디까지나 완벽한 모방에 불과하며 배우는 극중 감정과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는 고전적 영국 배우의 눈에 ‘제2의 자아’를 찾기 위한 메소드 배우의 몸부림은 감상적인 호들갑으로 보인 것이다. “배우들은 무대에서 표현하는 감정에서 거리를 둔 냉정한 테크니션이어야 한다”라고 일찍이 설파한 프랑스 철학자 디드로라면 올리비에에게 한표를 던졌으리라. 고전적으로 훈련된 영국 배우들은 제인 오스틴식으로 말해 대체로 ‘합당한’(agreeable) 연기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리허설이 일이고 연기는 긴장의 이완이라고 표현한 배우 마이클 케인은 “촬영 중에 평소에도 캐릭터의 억양을 씁니까?”라는 질문에 “액션 신호가 떨어지기까지는 절대 안 쓴다. 나랑 아무 상관없는 억양이니까”라고 일축한 바 있다. 영국 배우들은 낭만적 예술가나 신적인 스타보다 장인(匠人)에 가깝다.
앙상블의 기꺼운 동참자들
영국영화는 인적 자원과 자본을 연극과 TV 및 라디오 방송에 크게 빚지고 있다. 물론 부문간 교류가 비단 영국만의 풍경일 리는 없다. 그러나 한 배우의 일과를 그려보자. 낮에는 시내 스튜디오와 방송국에서 촬영한 다음 저녁에는 웨스트 엔드 무대에 설 수도 있는 런던과 대륙을 횡단해야 브로드웨이에 다다를 수 있는 LA의 환경은 사뭇 다른 것이 당연하다. 영국 배우가 지닌 상대적 강점도 여기서 비롯된다. 연극, 영화, TV, 라디오, 심지어 잘 다듬어진 발성을 이용하는 오디오 북에 이르기까지 영국 배우들은 다재다능하고 활동영역의 폭이 넓다. 재능의 유연함은 배역의 경중에 대처하는 자세에도 적용된다. 1980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앨런 베이츠는 “우리는 이번주에는 셰익스피어극에서 주연을 했다가 다음주에 ‘병사1’을 연기할 수 있도록 훈련받았다. 우리는 영화와 TV에서 주연한 직후 작은 배역을 연구한다고 체면을 잃지 않는다”고 말했고, 존 길거드는 “기본적으로 우리는 모두 성격배우들이다. 1940년에 히치콕이 할리우드로 진출하면서 알려지지 않은 영국 연극배우들을 조연으로 캐스팅한 것은 그들이 섭외를 수락하고 양질의 연기를 보여주리라는 것을 자신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영국 영화산업은 할리우드처럼 강력한 스타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했다. 또, 극단의 단원으로 연기생활을 시작해 스크린에 진출하고 영화배우가 된 이후에도 극단원의 신분을 유지하는 경우가 흔한 영국 배우는 스타의 에고가 희박하다. 영국 배우들은 할리우드 스타처럼 이미지 관리에 까다롭지 않고 개런티도 훨씬 저렴하다.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거나 영화 연기가 위대한 무엇이라고 믿는 영국 배우의 인터뷰를 찾긴 힘들다. 심지어 이런 전통은 <해리 포터> 시리즈의 꼬마 배우들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 덕분에 관객이 누리는 가외의 축복이 있으니, 영국 배우들의 탁월한 앙상블 연기다. 1300만달러 예산으로 헬렌 미렌, 매기 스미스, 마이클 갬본, 앨런 베이츠 등 한 무리의 근사한 영국 배우들을 <고스포드 파크>에 집결시킨 로버트 알트먼 감독은 “영국 배우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최고다. 훌륭하게 훈련돼 있고 제대로 된 태도를 갖추고 있다”고 예찬했다. 태생적으로 영국 배우의 집단 캐스팅을 요구하는 고전문학 각색물이나 시대극만 영국 배우의 집회 장소는 아니다. 마이크 리의 사실주의 드라마나 데이비드 마멧의 연극에서 불꽃을 튀기던 영국 배우들은 호그와트 마법학교나 배트맨의 고담 시에서도 위화감없이 유려한 화음을 뽑아낸다. 연기 중심으로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서로의 공력을 음미하고 동행을 즐길 줄 아는 영국 배우들의 앙상블만큼 황홀한 코스요리는 없다.
할리우드의 동경과 배척
제3국 관객에게는 유사 미국 배우로 보이고, 할리우드의 관점에서 보면 이방인을 대표한다는 점이 영국 배우의 역설이다. 할리우드는 영국 배우를 동경하는 동시에 저어한다. 로열셰익스피어극단이 상징하는 고전적 연기의 권위에 대한 존중은 영국 배우와 공연하는 할리우드 배우들의 인터뷰에서 흔히 감지할 수 있다(그들은 연기로 작위도 얻었지 않은가!). 적대적 거리감의 노골적인 예는 마리사 토메이가 바네스 레드그레이브, 주디 덴치, 미란다 리처드슨 같은 영국계 명배우들을 제치고 여우조연상을 차지한 1993년 오스카 시상식일 것이다. 시트콤 <프렌즈>에서 로스가 영국 여자 에밀리와 사귈 때 극중 다섯 친구와 시청자들의 감정을 상기하면 당시 아카데미 회원들의 기분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동경과 배척의 공통된 바탕은 거리감이다. 이는 영국 배우의 할리우드 캐스팅에서 상류층과 악당이라는 두 가지 얼굴로 나타났다. 1970년대 미국영화 전성기에 영국 출신 배우들이 미국 배우에게 주연급을 내준 다음 특히 두드러진 현상이다. 2000년 <뉴욕타임스>는 <순수의 시대>에서 뉴욕의 귀족을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연기하고 <리플리>에서 미국 재벌의 아들을 주드 로가 분한 것을 두고, 이민자 사회 미국의 미묘한 계급의식이라고 풀이하기도 했다. 또 기네스 팰트로의 상류층 연기는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나 케이트 블란쳇 같은 영연방 배우들의 그것에 비해 왠지 ‘이미지 흉내’처럼 보인다는 인상기까지 곁들였다. 대중과 친근한 이미지를 지켜야 할 미국 스타로서는 여러모로 다루기 껄끄러운 ‘귀족성’을 영국 배우에게 떠맡겨버린다는 해석이었다. 비단 상류층만은 아니다. 영국이 오래된 신분사회라는 것 외에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영국 배우들은 경제적인 계층으로서만이 아니라 관습과 문화의 총체로서 계급을 표현하는 데 언제나 탁월하다는 평을 듣는다. 그런가 하면 악역은 할리우드 오락영화가 영국 배우들에게 진 가장 큰 빚이다. 영국식 연기의 품위와 정확성은, 평면적인 이야기와 캐릭터를 지닌 액션영화의 악역에 뉘앙스를 불어넣는다. 갖은 악행에도 불구하고 왠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보이는 인물을 표현하는 데에 영국 배우들은 적격이다. 이들은 나아가 프로젝트의 중량감과 신용을 더하는 기능도 한다.신화적인 단순 대립구도와 원형적인 인물, 일상성이 없는 대사 때문에 자칫하면 유치해 보이기 쉬운 판타지블록버스터에서도 영국 배우들은 드라마의 중심을 단단히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 이쯤 되면 인간적 ‘특수효과’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무엇이 우수한 영화 연기인가
세상은 넓고 연기는 다양하다.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은 배우들의 몽환적 연기를 위해 최면술을 동원하기도 했다. <폴라 익스프레스>에서 디지털 캐릭터를 상대로 열연을 편 톰 행크스가 열렬히 증언하겠지만, 영화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함께 우수한 영화 연기의 정의는 확장되고 있다. 영국 배우들의 우아하고 엄격한 스타일을 좋은 연기의 유일한 교범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영국 배우에 대한 대표적 불만의 하나는 욕망과 감정의 표현이 딱딱하다는 것이다. 주로 잉글랜드 출신 배우들의 ‘경직된 윗입술’에 집중되는 이 지적은, 영국영화가 감정적으로 건조하다는 비판과 짝을 이룬다. 그러나 영화학자 리처드 다이어는 <사이트 앤드 사운드>에서, 이 비판이 감정과 감정의 표현방식을 혼동한 결과라고 반론했다. 다이어에 따르면 해머 호러와 <캐리 온> 시리즈 같은 소동극 코미디조차 그 절정은 넘치는 리비도와 감정을 감추고 억제하려던 인물이 끝내 실패하는 순간에 있다(예컨대 늑대인간의 변신은 유예된 욕망의 폭발이다).
감정적 규율과 행동의 규약 때문에 영국 배우들은 종종 여자는 차갑게, 남자는 여성적으로 보인다는 평도 듣는다. 상대적으로 흐릿한 성적 정체성은 할리우드 배우에 비해 스타성이 떨어지는 요인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히스클리프와 미스터 다아시, <어나더 컨트리>의 루퍼트 에버렛과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의 섹시함에 전율하는 관객이라면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영국 배우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비판은 “영화적이지 않다”, “목 위쪽으로만 연기한다”는 것이다. <영국영화의 현재>에서 줄리언 페틀리는 영국 배우들이 “연기하는 티를 내지 않으면서 어떻게 보일 것인가를 연구해야 할 영화연기의 에센스를 모른다”고 불평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미장센과 몽타주보다 대사와 인물에 의존하는 영국영화의 전통에 대한 우려와 연결돼 있다. 분명히 영국영화에는 편향이 존재하고 영국 배우들은 그 편향의 축이다. 그러나 확고부동한 단점은 종종 장점의 씨앗이다. 정확하고 좀처럼 허영에 사로잡히지 않는 영국 배우들의 연기는 제대로 된 안티테제를 만나면 굉장한 합(合)을 만들어낼 단단한 잠재력이다. 그때까지는 페틀리의 근심에 우리는 전적으로 찬동할 수 있다. 감독과 카메라를 게으르게 만들기 쉬운 유혹자라는 점. 그것은 확실히 영국 배우들이 지닌 최대의 악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