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류승완의 <짝패> [1]
2006-05-24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류승완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 <짝패>는 오랜만에 만나는 순수 액션영화다. 류승완 감독 본인과 정두홍 무술감독이 주연을 맡았고, 한국 스턴트 액션의 명가인 서울액션스쿨이 공동제작자로 참여했다는 점에서도 드러나듯, <짝패>는 한국 액션영화의 새로운 진화를 과감하게 시도한다. ‘액션을 위한 액션에 의한 액션영화’ <짝패>의 쾌감을 영화평론가 김봉석이 전한다. 류승완 감독의 인터뷰와 류승완, 정두홍 두 사람의 주요 액션장면에 대한 해설도 덧붙인다.

10년 전에 고향을 떠난 남자가, 형사가 되어 돌아온다. 이제는 영정 사진으로밖에 만날 수 없는 친구 앞에서, 그는 모든 것이 변했음을 알게 된다. 20년 뒤에, 성공한 뒤에 함께 마시자며 묻어두었던 뱀술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기뻐하며 마실 친구들은 없다. 평화로웠던 소도시는 이미 우정도, 의리도 사라져버린 ‘폭력의 도시’가 되어버렸다. 간단한 스토리만으로도 너무나 익숙하게 들리는 <짝패>는 전형적인 영화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1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남자가 친구의 복수를 한다. 어떻게? 폭력으로, 아니 액션으로. <짝패>는 한국 무술영화의 새로운 길을 찾는, 탄탄한 액션영화다.

류승완만이 찍을 수 있는 액션영화

형사인 태수는 고향 친구 왕재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는다. 모든 것을 뒤로하고 고향 온성으로 향하는 태수. 한때 조폭 두목이었던 왕재는, 은퇴하고 호프집 주인으로 조용히 살다가 동네 양아치들의 칼에 찔려 죽었다. 왕재와 태수, 왕재에게 조직을 물려받은 필호, 고시공부를 하다가 학원선생으로 전락한 동환 그리고 동환의 동생 석환은 어린 시절부터 어울린 죽마고우였다. 장례가 끝나고, 태수와 석환은 각자의 방식으로 왕재의 살인범을 쫓는다. 당연하게도 왕재의 죽음은 사고가 아니었다. 퇴락해가던 온성은 관광특구 지정과 카지노 건설이 예정되면서 난장판이 되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폭력조직과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는 필호가 손을 잡고, 한몫 챙겨보려는 마을 사람들까지 얽히면서, 왕재가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짝패>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태수와 석환이다. 일종의 버디무비인데, 사실 태수와 석환의 어울림이 맛깔나지는 않다. 버디무비가 재미있으려면, 두 사람의 성격이 천지차이일수록 좋다. 버디무비의 전형 <리쎌 웨폰>의 릭스와 머터프는 피부색만이 아니라 세계관 자체가 완벽하게 다르다. 액션만이 아니라, 그들이 주고받는 말과 감정이 빗겨나가고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불협화음과 조화에서 버디무비는 빛이 난다. 하지만 <짝패>의 태수와 석환은 흡사한 인물이다. 말보다 주먹의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고방식이나 세계관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둘이 함께 악당과 싸운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사실 <짝패>가 버디무비란 것이 큰 의미는 없다. 그냥 멋진 액션장면이 쌍으로 나올 뿐이다.

두 사람의 액션만으로도, <짝패>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짝패>는 지금 한국에서 류승완만이 찍을 수 있는 액션영화다. 예고편이 <킬 빌> 같다거나, 홍콩영화 같다거나 하는 말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짝패>는 두 남자가 등장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치고받는 영화다. 세계? 물론 그것도 필요하다. 온성이란 소도시는, 평화로운 공동체에서 오로지 힘과 폭력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정글로 이행 중이다. 여기에서는 어떤 과거의 논리도 통하지 않고, 그들은 모두 공범자가 되어 있다. 필호의 동업자라고 착각했던 청년회장에게도 죄가 있고, 언제나 왕재와 태수의 아래였던 필호에게도 변명할 여지가 있는 것처럼, 그들은 누구나 다 이유가 있고 동시에 사악한 기운도 있다. 이를테면 온성은 누아르의 세계인 것이다.

싸우고 또 싸우는 액션의 징검다리

하지만 <짝패>가 오히려 빛나는 지점은, 누아르의 세계 이전에 존재하는 비루한 촌티다. 필호의 캐릭터가 돌출되는 지점 역시, 비정함이 아니라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어리숙함이다. 일류가 되고 싶고, 누구나 두려워할 카리스마를 지니고 싶지만, 애초에 그건 필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왕재를 밟고 일어서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영원히 필호는 삼류 떨거지가 될 수밖에 없다. 서울 조직의 한마디면 당장 팽당할 수밖에 없는, 얼치기 시골 건달. 아니 건달조차 되지 못하는 양아치. 그런데, 어떻게 해도 자신이 올라갈 수 없음을 아는 순간, 오히려 필호는 강해진다. 더 야비해지고, 더 비정해진다. 우스워 보일지라도, 그게 필호의 필살기다. 악역인 필호가 한축을 튼튼히 담당하면서, <짝패>의 약간 성긴 대결 구조는 설득력이 생긴다.

<짝패>를 보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떠오른다. 영화의 내용이나 스타일이 닮았다고 하기는 힘들다. 고등학생들의 패싸움이 나오고, 야비한 조폭 세계가 등장하고, ‘하류사회’가 주요한 무대로 등장하긴 하지만 <짝패>의 그것과는 다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장점 하나는 리얼함이다. 직접경험이건, 간접경험이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는 인공적인 캐릭터와 잘 짜인 무대 대신에, 생동감 넘치는 양아치와 가급적 외면하고픈 일상의 세계가 넘쳐흘렀다. 그건 장르 이전에, 시선의 문제다. 당구장 패싸움 장면이 인상적이라 해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는 장르와 스타일 이전의 성실한 도발이 존재했다.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세계에 대한, 자신만의 이야기. 그것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매력이었다. 어설픈 공포영화로 잠시 빠져나가도, 가끔씩 허술한 구석이 보여도,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는 어떻게든 이 세계를 살아가려는 인간들의 에너지가 있었다. <짝패>에도 그런 에너지가 있다.

또한 <짝패>는 액션, 움직임의 에너지로 가득하다. 사실 정두홍과 류승완의 투톱은 모험이다. 연기가 아니라, 스타 파워의 문제다. 하지만 몸과 몸이 부딪치는 진짜 액션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선택이다. 몸놀림이 익숙하지 않은 배우와 함께 <짝패>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류승완은 스타로 관객을 끌어들이기보다는, 액션의 완성도를 원했다. 그 결과는 훌륭하다. <짝패>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액션의 징검다리다. 왕재를 누가 죽였는지를 밝히는 과정은 다소 뻔하게 진행된다. 긴장이나 조바심 같은 게 끼어들 여지가 없이, 척척 단서가 드러나고 슥슥 따라간다. 그리고 싸운다. 싸우고, 또 싸운다. 심지어 회상장면도 패싸움에 할애된다. 그 수다한 싸움이 바로 <짝패>의 언어다.

온성, 액션을 위한 가상의 공간

액션영화를 좋아한다고 공언했던 류승완의 영화에서, 멋진 액션을 보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짝패>의 액션은, 그동안 류승완이 좋아했던 모든 액션을 모아놓은 것 같다. 온성의 상가 거리에서 B보이와 야구부, 여자 깡패들을 동원하여 치르는 막싸움은 성룡이 연상된다.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각종 소도구를 이용하여 다양한 동선을 활용하면서도, 무지막지한 리얼리티가 느껴진다. 이런 종류의 막싸움은, 한국 액션영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면서도 별로 인상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짝패>는 집단 막싸움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것이 문제일 뿐, 안정적인 액션 연출을 보여준다. 액션의 합을 잘 알고 있는 감독과 배우의 조화를 읽을 수 있다. 클라이맥스에서 벌어지는 운당정의 액션은, 무협영화의 공간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2층으로 연결된 넓은 공간은, <킬 빌> 이전에 쇼브러더스 영화의 단골이었다. 운당정의 액션에서 인상적인 것은, 사시미칼의 탁월한 사용이다. 숨기기 좋고, 특별한 기술없이 사용하기도 편한 사시미칼을 이용한 좁은 공간에서의 혈투는 박수를 칠 만하다. <짝패>의 액션은 흥겹고, 긴장과 유머를 적절하게 활용한다. 아쉬운 점도 있다. 필호가 데리고 다니는, 서울에서 온 네명의 고수들. 그들과 태수, 석환의 싸움은 클라이맥스에만 집중된다. 그전에는 폼을 잡고 다닐 뿐, 그들이 어떤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게다가 마지막 대결 자체도 이전의 막싸움들에 비해 인상적이지 않다. ‘강한 놈이 오래가는 게 아니라, 오래가는 놈이 강한’ 거라는 필호의 말은, 마치 태수와 석환의 싸움에 대한 발언처럼 들린다. 석환과 태수는 거의 100여명에 가까운 악당들과 싸우면서, 맞고 맞고 또 맞으면서도 마침내 일어서서 이긴다. 끈질긴 놈이, 결국 이긴다. 고수들과의 싸움에서도 마찬가지다.

<짝패>는 두 남자가 복수를 한다는 설정으로, 끊임없이 싸우기만 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허술하다는 것은, <짝패>에 별다른 흠이 되지 못한다. <짝패>는 원대한 목적으로 출발하지도 않았고, 도중에 크게 야심을 부리지도 않는다. 오로지 하나, 액션만 보여준다. 충분히 즐거운데, 어딘가에서 걸리는 게 있다. <짝패>의 공간은, 도대체 어디일까? 온성이란 공간은 분명히, 지방자치제 이후 오히려 혼란스러운 지역사회를 은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지금 여기’가 보이지 않는다. 온성이라는 공간은 일종의 판타지다. 액션을 보여주기 위한, 가상의 공간. 오로지 힘이 지배하는 가상공간. 성룡은 자기만의 액션을 만들어내기 위해 <프로젝트A>에서 역사적 판타지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프로젝트A>의 도전은 유효했고, <폴리스 스토리>로 성룡은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어쩌면 성룡의 액션이 좁은 공간에서 소도구를 활용한 액션으로 발전한 것은, 홍콩이라는 지역적 특성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성룡의 액션은, 이소룡과는 달리 일상의, 이웃의 액션이었다. 우리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을 것 같은.

움직임 자체에 대한 열광과 열망

<짝패>는 다르다. 액션 자체의 리얼리티는 대단히 뛰어나지만, 그 액션이 어디에서 벌어지는지는 짐작할 수가 없다. <피도 눈물도 없이>와 <아라한 장풍대작전>의 액션들처럼, 그건 영화적 공간 안에서만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토니 자의 <옹박: 무에타이의 후예>가 독창적이었다면, 그것은 무에타이라는 무술 자체가 아니라 그 무술이 타이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는 그런 질문과 답이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왜 우리는 싸우는가. 반면 <피도 눈물도 없이>와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는 잘 만들어진, 개성적으로 보이는 역할들이 나와 멋지게 놀다가 사라졌다. 장르를 위해, 스타일을 위해, 아낌없이 소비되는 인물들. <짝패>의 주인공들은, 적어도 그런 캐릭터가 아니다. 이들은 정말 열심히, 정말 피터지게 싸운다. 나름의 이유를 위해. 그게 친구에 대한 철없는 애정이든, 자기를 돌봐준 선배에 대한 무한한 충성이든,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들에게는 절실하고, 그들이 싸워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하지만 그들이 싸우는 곳은, 여전히 영화 속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류승완 감독의 <짝패>은 순수한 액션영화다. 류승완이 좋아하는 액션영화들의 모든 것을 모아,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주해낸 것이다. 좋다. 그런데 류승완은 이제 예전처럼 액션영화에 열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알 수 없는 일이다. 개인적으로, 류승완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영화에서 동적인 쾌감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나 상징 이전에 번득이는, 움직임 자체에 대한 열광과 열망. 그런 것이 류승완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는 있었다. 그것을 오랜만에 <짝패>에서 발견했다. 그래서 즐거웠지만, 이것이 류승완의 마지막 액션영화라면(그럴 리는 없겠지만), 한국 액션영화의 이정표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라는 아쉬움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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