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을 주목해야 할 이유
민규동 감독과 함께 데뷔작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완성한 이래, 두 번째 장편을 단독 연출한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은 묘한 영화다. 남매, 모녀, 연인이라는, 서로 다른 시간대에 놓인 한없이 가깝고도 먼 관계를 통해 관객의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자극하는 이 영화는 꼼꼼히 곱씹을수록 새로운 맛이 느껴지는 섬세한 텍스트다. 이에 네명의 평론가가 서로 다른 관점에서 한편의 영화를 바라봤다. 헤픈 여자들이라는 캐릭터(김봉석), 다중 플롯 영화 중에서도 흔하지 않은 이 영화의 구조(김지미), 오랜 공백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은 감독의 감수성(남다은), 또 다른 가족을 말하는 사려깊고 정치적인 방식(듀나)에 관한 다음의 글들은 <가족의 탄생>으로 향하는 또 다른 지도가 되어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태용 감독의 오랜 친구이자 날카로운 조언자인 민규동 감독이 <가족의 탄생>과 그 안에 드러난 감독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한 대담을 함께 싣는다.
이상적인 가족의 탄생신화
헤픈 여자들의 너그러움과 다정함으로 만든 <가족의 탄생>
그 여자들은 헤프다. 오면 오는 대로 다 받아주고, 조금만 공들여 부탁하면 뭐든지 들어준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안쓰럽기도 하지만, 대체로 답답하고 가끔은 정말 화가 난다. 어쩌면 그렇게 만사에 너그러운지, 어쩌면 그렇게 만인에게 다정하기도 한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녀의 연인이나 자식들은, 짜증이 나고 세상을 때려 부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건 다, 그녀들이 너무 헤프기 때문이다.
미라는 제대한 뒤 5년이나 소식이 없다가 돌아온 동생 형철을, 따뜻하게 받아준다. 20살이나 연상인 애인을 데리고 들어와도, 속상하기는 하지만 내치지는 못한다. 선경의 엄마 매자는, 목하 유부남과 연애 중이다. 선경이 보기에, 엄마는 바람기 다분한, 절대 닮고 싶지 않은 여자다. 경석의 연인 채현은 너무 착하고, 너무 다정하다. 모든 이들이 곤란에 처할 때마다 채현에게 도움을 청한다. 채현은 언제나, 기꺼이 그들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물질적, 정신적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 그녀들은 너무 헤프다.
그녀들의 마음도 평온한 건 아니겠지만, 그녀들을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은 한없이 쓰리다. 엄마의 바람기에 진력이 난 선경은, 꼴 보기 싫어 외국으로 나가기만을 꿈꾼다. 암에 걸린 엄마에게, 선경은 닦달한다. 그 남자들은 다 돈을 바라고 엄마한테 온 거라고. 하지만 매자는 굳게 믿는다. 내가 예뻐서라고. 그게 정말일까? 채현은 그 남자들과 다 사랑을 나누는 건 아니다. 채현이 사랑하는 남자는, 경석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조금 다른 종류의 사랑을 아낌없이 건네준다. 경석은 단지 채현을 독점하지 못하기 때문에 질투하는 건 아니다. 그들이, 착한 채현을 이용하고 있다는 의심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채현에게 기대는 이유는, 그녀가 예쁘기 때문이다. 얼굴만이 아니라, 마음이.
선경이 매자를 이해하는 것과 경석이 채현을 이해하는 것은 많이 다르다. 선경은, 한순간에 매자의 마음을 알게 된다. 어째서 그녀가, 그렇게 헤펐던 것인가를. 그리고 선경은, 연애는 하지만 결혼은 하지 않는 여자가 된다. 동생인 경석이 보기에는, 헤픈 여자가 되는 것이다. 경석이 채현을 보는 눈에는, 그런 의심이 깔려 있다. 너무 헤퍼. 웃음도, 정도, 관심도, 사랑도. 어째서 내가 아니라, 그걸 남에게 주고 있는 것일까. 왜 내가 우선이 아니고, 그들이 먼저일까. 끊임없이 경석은 의심한다. 그래서 돌아서지만, 결코 경석은 채현을 떠날 수가 없다. 그건 경석이 매자의 아들이고, 선경의 동생이기 때문이다. 헤픈 여자들을 계속 보아왔고, 그녀들이 얼마나 예쁜지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석만이, 채현의 가족이 될 수 있다. 그런 이력이 없었다면, 아마 경석도 일찌감치 채현에게서 떠나갔을 것이다. 사실은 자신이 떨려난 것인지도 알지 못한 채로.
매자를 사랑하는 남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껏해야 ‘사랑한다’는 말뿐이다. 그 남자들은 가정을 깨고, 매자와 새로운 가족을 이룰 만한 결의가 없다. 남자들은 예쁜 여자를 사랑하지만, ‘진짜’ 가족을 이루기에는 너무 이기적이고 야만적이다. 미라와 무신의 관계가 증거다. 무신을 데리고 온 것은 형철이지만, 진정으로 그녀를 받아주고 마음을 터놓은 것은 미라다. 무신의 전남편의 전 부인의 아이도, 결국은 받아들인다. 그리고 무신에게 매달리던 충동적인 형철과 미라가 결혼하려 했던 단순하지만 이중적인 남자는, 바깥으로 밀려난다. 아니, 아마도 그들 스스로가 나갔을 것이다. 언젠가 또 내키면 돌아오겠지만, 그때는 그녀들이 받아주지 않는다. 그냥 공식적으로 말하는 가족이 아니라, 진정한 가족은, 미라와 무신이 만들어낸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가 성장하여 결혼을 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통상적인 가족의 개념은 <가족의 탄생>에서는 무색해진다. ‘진짜’ 가족은, 헤픈 여자들의 너그러움과 다정함을 통해서만 만들어진다. 헤픈 그녀들은, 목적의식적인 가정해체주의자도 아니고, 쾌락을 좇는 타산적인 여자들도 아니다. <가족의 탄생>의 그녀들은,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진정으로 너그러운 여인들이다. <가족의 탄생>은, 진정한 가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여주는, 이상적인 가족의 탄생신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