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6년 하고도 4개월 전. 그들은 지금처럼 나란히 카메라 앞에 섰다. 자신들의 장편 데뷔작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의 공동감독으로 <씨네21>과의 인터뷰에 응했던 김태용, 민규동 감독. 사적이고 기이한 기운으로 가득한 첫 번째 영화를 만들었던 두 사람은 그간 해외 유학 생활을 경험했고, 길고 긴 시간을 돌아 각각 자신들의 두 번째 장편영화이자 첫 번째 단독 장편 연출작을 완성했다. 지난해 가을 민규동 감독은 서로 다른 빛깔을 지닌 일곱 커플을 주인공으로 하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을 개봉시켰고, 김태용 감독은 지난 5월18일 각자의 개성을 자랑하는 세 커플(?)이 서로 다른 과정을 통해 색다른 가족을 꾸리는 영화 <가족의 탄생>을 개봉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구성의 영화를 완성한 두 사람을 한자리에 불러, 그중 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청하는 것은 민감한 일처럼 느껴졌고, 대화를 청하는 입장은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막상 옛날 기억에 대한 회상에서 시작하여 각자의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장난스럽고도 애정어린 질문과 대답들은 막힘없이 술술 흘러나왔다.
민규동 영화의 수정부터 출산까지 모든 걸 지켜본 입장에서 VIP 시사 때 너무 기분이 좋았어. 사실 그때 본 게 두 번째였지. 편집실에서 이미 많은 얘기를 했으니까. 지난해 4, 5월쯤 지금 버전의 시나리오를 봤을 때부터 좋았다니까. 읽자마자 전화도 했잖아.
김태용 그때 그랬잖아. “진짜 네가 쓴 거야? 어디서 주운 거 아냐?” (좌중 폭소)
민규동 근데 시나리오보다 완성된 영화가 훨씬 좋아. 2000년인가 2001년인가, 네가 호주 있고 내가 파리 있을 때, 여자 세명이 함께 살게 되는, 지금의 첫 에피소드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했잖아. 그러고 난 뒤 내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연출을 제의받고 마음 내켜하지 않고 있던 차에 네가 여러 시나리오를 두고 고민하고 있을 때, 사람들 많이 나오고 여러 관계가 섞인 멜로가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기도 했는데.
김태용 그때가 <내 생애…> 연출 제안을 받았을 때였구나. 날 위해서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웃음)
민규동 네가 원래 삶을 멜로적으로 살잖아. (좌중 웃음)
김태용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민규동 굉장히 쿨하고 냉정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정서적이고 감정에 많이 휘둘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김태용 그러니까 내가 즉흥적으로 산다는 거지? 나 나름대로 계획적이야.
민규동 그렇지. 나름대로는 계획적인데 객관적으로 계획적이진 않아. (웃음) 근데 이 영화가 정말 너 자신을 잘 표현하는 영화라고 생각해?
<가족의 탄생>은 사적 감정과 공적 화두가 공존하고 있는 느낌이었어
김태용 사실 난 영화를 사적으로 보는 편이라서 <미녀삼총사> 같은 영화의 대사 하나가 꽂히면 죽을 것 같거든. 그래서 이 영화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보이길 원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영화를 사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건 아니잖아. 재능보다 진심이 앞서는 영화를 만들고 싶지는 않거든. (웃음)
민규동 사적인 멜로가 되려면 지금보다 훨씬 정서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김태용 조금 더 사적인 영화였으면 하는 생각도 했어?
민규동 꼭 그런 건 아니고. 예전에 네가 시나리오를 두고 고민할 때 어정쩡하다고 말했던 거 기억나? 이 영화는 공적인 화두의 힘이 큰 영화인데, 그것이 사적 감정과 공존하고 있는 느낌이었어. 처음에는 제목이 <사랑받고 하나 더>였다가 <가족의 탄생>으로 바뀌면서 영화가 유기적으로 통합돼 메시지가 선명해진 과정도 그런 거였잖아.
김태용 만일 영화를 지적인 것과 정서적인 것, 두 가지로만 나눠야 한다면 이 영화는 지적인 거잖아. 근데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계속 다른 방향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 예를 들어 선경(공효진)과 준호(류승범)가 방에서 싸우는 장면은 맥락도 없고, 꼭 필요한 것도 아닌데 난 어떤 사람들은 그 장면에서 울컥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 장면을 찍는데, 마음이 갑자기 짠하면서, 내가 생각보다 여기에 집착하고 있다는 걸 느꼈어. 아마 내가 밑에 깔아두었던 사적인 무언가가 두 배우를 통해서 수면 위로 확 올라왔나봐. 편집실에서도 그 장면을 계속 넣었다, 뺐다, 늘렸다 줄였다…. 하지만 그런 신들이 저변에 깔린 사적인 톤에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물론 가까운 친구에게는 금방 들키지만.
민규동 나는 뭐, 김태용이 겪은 그런 싸움의 순간을 10년 넘게 목도해왔고(김태용 감독 폭소), 그건 자기 연민과 치유와 구원이 있는 장면이잖아. 아무튼 그 장면은 냉정한 편집감독이라면 당연히 뺐을 거야. 연애 자체는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전면에 대두되고, 거기서는 모녀 관계가 중심이잖아.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 장면을 넣는 것이 좋다, 나쁘다 말할 수는 없어. 아이를 지울까 말까 고민할 때 내가 키울 수 있든 없든 어느 순간 유산시키고 싶지 않은, 감정적 충동이 있을 수 있잖아. 그런 것에 사로잡힌 것이 아녔을까.
김태용 그때 네가 편집자의 입장에서 걸린다고 했던 장면이 또 있었잖아.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채현(정유미)과 경석(봉태규)이 길에서 싸우다가 갑자기 소가 나타나서 놀라는 장면. 짧은 장면이지만 그 신의 재치와 재미는 아무래도 어린 느낌이 든다고. 그때 네가 편집본 보고 했던 말 중에 가장 크게 와닿았던 것이 ‘생각보다 어른스럽게 만들었다’는 거였거든.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그 장면은 뺐잖아. 그렇지. 나 어른이지, 이러면서. (웃음)
민규동 나 역시 감독이 편집본을 고민할 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잖아. 친구에게 물어볼 때는 내 판단이 맞다는 걸 확인받고 싶은 거고. 사실 영화를 만들고 나면 항상 뭔가가 부족했다는 게 아니라, 과했다는 후회가 생기더라고. 시간이 지나도 후회하지 않게 욕심이 있다면 줄이는 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어.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은, 미라(문소리)와 무신(고두심)이 밥을 먹는 동안 채현이 마당에서 뛰어노는 부분이었어. 이 영화는 굉장히 거친 16mm영화의 느낌이고, 꾸밈이 없잖아. 근데 그렇게 정교하고 빈틈없는 완벽한, 예상치 못한 장면이 나오니까 좀 놀랐지. (웃음) 그 밖에 두 번째, 세 번째 에피소드도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판타지가 가미된, 시적인 표현들이 들어가 있잖아. 그런 아이디어들이 영화 전체의 톤을 해치지 않으면서 리듬을 부여하는 것이 좋았어. 선경이가 엄마의 죽음을 예감하는 장면도 압권이었어. 바로 장례식장으로 넘어가는 타이밍이 심장을 덜컹하게 하지. 앞으로 뷰파인더를 볼 때마다 그 속에서 얼쩡거리는 사람이 보이면 불안해할 거야.
김태용 그런 톤은 너에게 배운 걸거야. 원래 넌 판타지스러운 감흥이 많았잖아. 어떤 사람은 마지막에 선경이 떠오르는 장면이 <여고괴담…>에서 천장에 귀신 얼굴 떠오르는 장면 같다고도 하더라. (웃음) 영화 괜찮은데 갑자기 왜 이래, 이런 느낌.
민규동 하여튼 그 장면은 금세기에 남을 만한 이상한 장면이지. (웃음) 내가 <지각대장 태용>이란 단편 만들 때는 요정도 나오고 선생님이 천장에 붙어 있고, 그랬잖아.
아주 능글맞게 나쁜 관계, 우리의 초상을 말하고 있잖아
김태용 사람을 놀리려고 영화를 만들다니.
민규동 그런 게 아니라니까. 남들이 뭐라고 손가락질하든 나는 지각할 수 있다는 게 주제야. 그 지각이 철학적인 거야. 깨달음이라는 의미. (웃음) 어쨌든 시적인 감흥이 들어가 있는 장면들은 사실적인 토대 안에서 더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해. 만일 영화 전체가 ‘내가 한 상상력 하거든’ 이런 분위기라면 그 장면들도 별 힘이 없었을걸. 그리고 질문. 이 영화는 에피소드별로 구성을 가지고 있는데 처음부터 그렇게 구상하진 않았을 것 같아. 사실 <내 생애…> 같은 다중 플롯 영화는 연결의 기교는 필요하지만, 어쨌든 하나로 흘러가는 이야기잖아. 하지만 <가족의 탄생>은 시간적 비약도 있고,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될 때는 첫 번째 이야기가 마무리되면서도 그 감흥을 두 번째에 전달해야 되고, 마지막에서는 1 더하기 1이 3이 아니라 C가 되는 식의 화학적 전이가 필요하잖아.
김태용 서로의 이야기가 영향을 주고받는 식으로 만들어볼까 하는 고민은 시나리오 단계에서도 많이 했었지. 반은 재미삼아 편집실에서 이야기를 섞어서 편집해보기도 했어. 결국 결정은 논리적으로 내려졌다기보다는 그냥 직감이었던 것 같아. 특히 세 번째는 시간을 뛰어넘으면서, 경석과 채현의 멜로로 진행하면서 이야기를 정리해야 했기에 고민이 많았어. 아마도 각각의 관계의 총합이 주는 전체적인 정서를 중요시했던 것 같아. 무엇보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할 때의 기대감과 함께 지금 나오는 인물은 앞에 나왔던 인물과 어떤 관계인지를 계속 고민하고 질문하게 만들고 싶었어.
민규동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배경이 되는 에필로그도 좋았어. 처음에 플랫폼에서 모든 인물이 스쳐지나가는 장면을 찍는다고 할 때는 혹시나 사족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렇지 않더라. 영화가 끝난 뒤에 그들이 더 보고 싶고 궁금하게 만드는 긴장감이 있어.
김태용 원래 그 장면은 처음에 배우들 이름이 타이틀로 뜰 때 넣으려고 했어.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이 사람들의 사연이 궁금하나요, 라며 질문을 던지고 싶었거든. 근데 찍으면서 직감적으로 이건 프롤로그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영화의 톤을 정리해주는 느낌이었어.
민규동 그리고 또 궁금했던 게 있다면… 제목 폰트가 너무 커서 놀랐어. (좌중 폭소)
김태용 난 <내 생애…> 때 그게 너무 작아서 이상했는데. (웃음) 그렇지 않아?
민규동 비디오로 보니까 작지, 극장에서 보면 커! (웃음)
김태용 그래? 그래서 <가족의 탄생> 제목이 크게 들어갔나? 나야 비디오로 편집했으니까. (좌중 폭소)
민규동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어. 영화에 굉장히 자신이 있거나, 레오스 카락스나 왕가위 감독이 제목을 크게 넣는 것을 따라한 거라고. (갑자기 진지하게) 사실은 <내 생애…>를 만들고 많이 우울했어. 좀더 많은 사람을 내 영화에 초대하기 위해 그처럼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결정적으로 김태용이 내 영화를 안 보다니. (좌중 폭소)
김태용 아니, 그때 내가 촬영하느라고… 내가 그때 <내 생애…>를 볼 만한 마음의 준비가 안 됐던 것 같아. 그전에 편집본을 보고 이미 마음이 놓였거든. 사실 난 예전에 네가 <내 생애…>를 연출한다고 했을 때 말렸잖아. 시나리오를 읽어보면 왜 네가 그 영화를 하고 싶고, 동시에 왜 꺼리는지가 동시에 보였거든. 근데 편집본을 보니까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어. 네가 살릴 수 있는 부분을 많이 살렸고, 할 수 없는 부분은 과욕 부리지 않고 선택한 것. 그게 너무 어른스럽게 느껴졌어. 나는 <내 생애…>나 <가족의 탄생>은 기본적으로 착한 영화라는 지점에서 닮았다고 봐. 가짜 희망과 가까 판타지를 담은. 그 점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할 수도 있고, 실망할 수도 있겠지.
민규동 착한 영화가 뭔데?
김태용 <친절한 금자씨> <올드보이> <바람난 가족> 이런 영화는 안 착하고, <말아톤> <가족>은 착한 거지.
민규동 <내 생애…>와 <가족의 탄생>을 굳이 비교하자면, <내 생애…>가 착한 영화고 <가족의 탄생>은 나쁜 영화라고 봐. 사실 <내 생애…>는 현실적인 에피소드에 기반한 것 같지만 하나도 현실적이지 않고. <가족의 탄생>은 비현실적인 상황과 관계를 다루지만, 현실적이잖아. <내 생애…>는 착한 화해를 도모하면서, 착하게 살면 행복해질 거라는 어려운 주문을 하고 있지. 반면 <가족의 탄생>은 거꾸로 이야기하는 거야. 다들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그 관계는 굉장히 아프고 전복적이고. 착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서 아주 능글맞게 나쁜 관계, 우리의 초상을 말하고 있잖아.
김태용 내가 볼 때 이 정도면 한 285만명(<내 생애…>의 최종 스코어 280만명)은 보지 않을까 싶은데. (웃음) 흥행감독 되면 삶이 변할 줄 알았는데, 너를 보면 여전히 영화 찍는 건 어렵고, 생활도 마찬가지고. 널 보고 영화했는데, 흥행돼도 별수 없다는 생각에 암담하다니까. (웃음)
민규동 음, 6월 말쯤 촬영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자기가 슈퍼맨이라고 믿고 다른 사람들을 무작정 도와주면서 자신의 고통을 무릅쓰는 한 남자에 대한 얘기야. 가제는 <황금 심장의 사나이>.
둘이 있다가 혼자 만드니까 좀 허전하긴 하더라
김태용 차기작에 관해서는 정말이지 현재로선 아무 생각이 없어. 구조적으로는 잘 모르겠는데, 정서적으로는 <가족의 탄생>처럼 관계에 대한 영화를 하지 않을까. 이번 영화 흥행 안 되면 어떻게든 공동연출로 끼어서 빨리빨리 영화 만들고도 싶고. 둘이 하면 혼자 하는 것보다 더 많이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민규동 남들은 한 사람이 하나씩 만들 때, 우리는 둘이 하나를 만드니까 생산성은 떨어지지. (웃음) 문제는 우리 둘이 붙어도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믿음은 두배가 되는 게 아니라는 거야. (좌중 폭소) 불안만 두배가 되지.
김태용 둘이 있다가 혼자 만드니까 좀 허전하긴 하더라. 그래도 시나리오 쓸 때, 성기영 작가가 민규동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친구가 되어줘서 고마웠지. 촬영장에서도 촬영감독, PD, 배우들 모두 잘해줬는데 그래도 부족한 게 있어. 뭔가 내가 얘기를 하면, 에이∼ 그거 아니지,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는데 없는 거야.(웃음) 뭔가 어색해.
민규동 외롭다는 생각은 많이 했어. 나에게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도 없고, 원치 않은 어떤 권위도 생겼달까. 그래서 고독하게 등산하는 기분이 들어.
김태용 사는 게 외로운 것 같아. 그래서 친구랑 작업하면서 위안받고, 영화 만들면서 위안받고, 그 영화를 사람들이 좋아해주면 위안받고. 근데 시간이 흐르니까 그런 거에 안 속게 되더라. 칭찬이 영광이 아니고 비난은 치욕이 아닌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