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와 비교한 <가족의 탄생>
김태용 감독의 신작 제목이 <가족의 탄생>이라고 했을 때, 이 작품이 다중 플롯으로 구성될 것이라고 알려졌을 때, 나름의 연기력으로 무장한 배우들의 이름이 드러났을 때, 나는 적잖이 실망했다. 가족담론이 유행이 되고 상품이 되는 이 시대에, 가족주의건, 가족해체건, 대안가족이건, 가족을 전면에 내세우는 이야기는 너무 식상하지 않은가. 자고로 가족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고, 어느 인물의, 혹은 이야기의 파편적 배경으로 홀대(?)하는 것이 이 시대 가족의 뻔하면서도 미묘한 구석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식이다(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가족상에 적당히 지겨워진 관객에게 ‘이런 가족도 가족이야’라는 달콤하고 쿨한 가르침을 선사하는 영화는 선택받기 유리한 조건에 있다. 게다가 에피소드식 구성이라니.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함께 만들었던 민규동 감독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 혹은 필연을 가장한 우연으로 사건과 인물들을 조립하여 결국은 현실에서 새하얗게 아름다운 천국으로 건너뛴 영화. 다중 플롯의 영화는 자칫하면, 모든 걸 이야기하지만,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못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더욱이 대단한 배우들의 세밀한 연기력에만 시선을 고정시킬 때, 다시 말해 의존할 때, 영화는 속임수가 된다. 그러니까 나는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의 “그” 김태용이 너무 안전한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에 대해 진심으로 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가족의 탄생>은 영리한 균형감각으로 지탱되는 영화다. 혈연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모계사회를 다루고, 엄마의 모성보다는 연애를 다루고, 남자의 권력보다는 여자의 언어에 중심을 두는 급진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영화는 (거칠게 표현해서) ‘세지 않다’. 인물들을 연결하는 끈이 혈연적이건 아니건, 이들은 상대의 존재에 대한 애정을, 고마움을, 애틋함을 어찌 되었건 깨닫고 전달한다. 그들이 아무리 발톱을 세워도 진심은 그렇지 않다. 진심의 차원에서는 모두가 착하다. 그래서 김태용의 가족 이야기도 알고 보면 착하고 순진한 사람들의 온화한 가족 세계를 순환한다. 그는 관객이 ‘다양성’의 관점에서, ‘관용’적인 시선하에서, 인물들의 감성과 상황을 즐기고 이해할 순간들을 포착해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 순간들은 삶에 대한 관용이 아니라 다양한 볼거리에 대한 관용을 유발했을 뿐이다. 김태용은 지금 영화 밖의 관객을 보고 있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 김태용과 민규동은 스크린 밖의 반응을 의식하기 전에 영화 속 인물들의 세계를 의식했다. 그러므로 <가족의 탄생>의 김태용은 민규동처럼, 자기만의 세계를 이야기하기보다는, 관객의 반응을 거의 정확히 예상하고 출발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김태용’의 영화로 만드는 건, 이야기의 깊이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펼쳐내는 방식에 있다. 이를테면 인물들의 손이나 얼굴 등의 미세한 떨림을 포착해내는 카메라나 자연광을 백분 활용한 공간들, 그리고 핸드헬드로 촬영된 거칠면서도 세밀한 장면들은 이야기를 구태의연함의 위험에서 구해낸다. 특히 인물들을 가까이 따라가며, 그들의 동작과 함께 나타나는 가녀린 심리를 담아내기 위해 자연스럽게 흔들리고 울리는 카메라의 시선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 두 소녀의 옥상장면들을 떠오르게 한다. 무엇보다 구구절절 해설하고 억지로 설득하는 대신에, 압축적이고도 아련한 방식으로 시공간의 변화와 인물의 내면의 흐름을 연출하는 실력은 여전하다. 그는 관계의 결을 설명하는 대신, 표현한다. 그것도 매우 아름답게.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가늘고 긴, 창백한 실들로 엮인 슬픔의 영화였다. 그때 김태용과 민규동은 절박했고 실험적이었고 긍정적인 의미에서 감성적으로 위태로웠다. 2005년 민규동은 너무 화려하게 안정에 대한 욕심을 부렸다. 그에 비해 2006년 김태용은 적어도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의 그 감수성에서 섣불리 발을 빼지 않고, 여전히 소박하고 여전히 스타일리시하게 두 번째 장편을 완성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찬사 속에서도 나는 그가 좀더 위태롭지 못했던 것이, 좀더 세게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쉽고 또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