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주목! <가족의 탄생> [4] - 듀나 비평
2006-05-31
글 : 듀나 (영화평론가·SF소설가)
모든 것이 연애고 로맨스다

가족의 성립 조건 제시하는 <가족의 탄생>

<가족의 탄생>은 대안가족 홍보영화가 아니다. 하지만 영화의 세 번째 에피소드가 절정에 이르면 이 영화는 노골적인 홍보영화의 분위기를 풍긴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면 밖에서 누군가가 대안가족 홍보용 팸플릿이라도 나누어줄 것 같다. 이건 영화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상황과 설정이라도 어쩔 수 없는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받을 수밖에 없는 사회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가족의 탄생>이 내세우는 대안은 무엇인가? 모계가족인가? 이건 편집부에서 제안한 주제이기도 한데, 그렇게까지 잘 맞는 건 아니다. 모계가족을 다룬 모범적인 영화인 마린 고리스의 <안토니아스 라인>과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안토니아와 그의 가족들은 가족의 전통과 가계에 대한 분명한 자기 생각이 있고 그를 능동적으로 실천할 의지도 있다. <안토니아즈 라인>은 정치적인 메시지가 분명한 모계가족 옹호 영화이다.

하지만 <가족의 탄생>에서 ‘가족’은 그냥 사고로 만들어진다. 그것도 그냥 어쩌다 생긴 사고라면 괜찮겠는데, 이 영화가 다루는 두 가족에는 부인할 수 없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두 가족 모두 책임감이 없는 남자들이 저지른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결과이다. 미라와 무신, 채현이 가족으로 뭉친 건, 진지하게 가족을 이루거나 결혼생활을 유지할 생각이 없는 무신경한 한 남자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고를 쳤기 때문이다. 선경과 경석이 가족으로 뭉친 건, 선경의 어머니와 바람난 유부남인 경석의 아버지가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책임감있는 가부장처럼 굴었다면, 미라와 무신은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경석은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며, 선경은 지금 일본에서 경력을 쌓으며 잘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 남자들을 어떻게 비난해야 할 것인가? 가부장 노릇을 하지 않았다고? 아니면 책임있는 한 사람의 인간처럼 행동하지 않았다고? 그들이 비난받아야 한다면 그 결과 탄생한 두 가족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 여기서부터 영화의 정치성은 흐려지기 시작한다. 하긴 <가족의 탄생>이라는 영화는 노골적으로 정치적이 되기엔 사람이 너무 좋다.

<가족의 탄생>에서 진짜로 정치적인 면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관계를 다루는 방식에 달려 있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커밍아웃한 동성애 캐릭터가 한명도 등장하지 않는 퀴어영화이다. 다소 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지나친 표현은 아니다. <가족의 탄생>은 퀴어영화의 특징들을 비정상적일 정도로 많이 가지고 있다. 물론 이건 퀴어라는 단어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재정의되고 확장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겠지만.

퀴어영화 관객은 <가족의 탄생>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웃음이 나올 정도로 친숙한 설정과 마주친다. 세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 채현에겐 ‘엄마가 둘이다’. 채현이 자기와 어떤 혈연관계도 없는 두 여자 모두를 엄마라고 지칭하는 장면은 메시지 담긴 레즈비언영화에 그대로 이식해도 문제가 없다. 물론 이 두 ‘엄마’가 섹스 파트너가 아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가 재미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고정된 장르 안에서 꾸준히 반복된 감정의 공식은 그대로 남는다. 관객이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두 ‘엄마’의 이야기는 10여년에 걸친 긴 로맨스의 분위기를 풍긴다.

<가족의 탄생>에서는 모든 것이 연애이고 로맨스다. 어떤 것도 미리 고정된 가족의 틀 안에서 강요되지 않는다. 그것이 모녀 관계이건 모자 관계이건 아니면 다른 무엇이건, 가족이 성립되려면 자발적으로 상대방과 관계를 맺어야 하고 가부장제도의 안전망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 관계를 이어가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그나마 정상적인 이성애 커플처럼 보이는 채현과 경석에게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아마 경석은 끝까지 채현을 독점하지 못할 것이다. 경석은 결국 채현과 관계를 맺는 방법을 알아낼까? 그것이 그의 가족을 시작하는 초석이 될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진짜 주제는 이 질문에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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