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미지의 독립장편영화 세편 [1] - <마지막 밥상>
2006-08-15
글 : 최하나

2005년 말 기준 전국 스크린 수는 1648개. 산책을 가듯 영화를 보러가는 시대다. 하지만 독립영화는 어떨까. 독립영화를 보기 위해서 관객은 1년에 몇번 찾아오는 영화제의 프로그램을 뒤적여야 하고, 반대로 독립영화는 관객을 찾아가기 위한 기회를 잡기 위해 기를 써야 한다. 땀 흘려 제작한 작품이 그들만의 잔치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독립영화가 관객을 만날 수 있는 통로가 절실하고, 그러기 위해선 작품의 존재를 관객에게 알리는 일 역시 시급하다. 얼마 전 로카르노영화제에 공식 초청된 노경태 감독의 <마지막 밥상>, <대학로에서 매춘하다가 토막살해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로 주목받았던 남기웅 감독의 <삼거리 무스탕 소년의 최후>, 그리고 동명의 단편으로 인기를 끌었던 오점균 감독의 <생산적 활동>. 아직 극장을 통해 관객을 만나지 않은 세편의 독립 장편영화를 소개한다. 주류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상상력과 화법이 빛나는 이 작품들을 통해 독립영화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매력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여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 이 순간에도 묵묵히 만들어지고 있을 수많은 독립영화들이 관객을 만날 수 있는 작은 물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함께 담는다.

노경태 감독의 <마지막 밥상>

아~ 화성으로 이민가고 싶다

두 가족이 있다. 할머니(황복순), 어머니(백현주), 딸(김도연)로 이어지는 한 가족과 아버지(홍석연)와 아들(오흥기)로 구성된 한 가족. 하지만 이들이 가족임을 보여주는 것은 그저 형식적인 호칭뿐, 집이라는 하나의 공간에 거주하면서도 그들은 각기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듯 홀로 고립되어 있다. 각자가 마주한 삶은 비루하며 고달프다. 감옥 안에서는 구타에 시달리고 출소한 뒤에는 일용직을 전전하며 복권을 긁는 아버지, 호스트로 몸을 팔아 생활을 유지하는 아들, 죽은 남편과의 이혼을 꿈꾸며 재래시장에 배추를 내다파는 할머니, 영안실에서 시체를 닦고 곡을 하며 돈을 버는 어머니, 그리고 성형수술만이 유일한 꿈인 딸. <마지막 밥상>의 주인공인 5명의 인물들은 모두가 시작도 끝도 없는 절망의 순환고리에 갇혀 있다.

“유령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바쁘게 흘러가는 사회가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 슬프고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마지막 밥상>이 첫 장편 연출작인 노경태 감독은 다소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삼성증권에 근무하던 중 돌연 직장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말하자면, 늦깎이 영화학도. 유학생활 중 말레비치, 마크 로스코 등의 추상화가에 깊이 매혹되었다는 그는 추상미술이 표명하는 극도의 간결함와 상징성을 자신의 영화로 옮겨왔다. “화면 안의 인물들이 소품처럼 느껴지길 바랐다”는 그의 말처럼 적대적인 현실 앞에서 화를 내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고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마지막 밥상>의 인물들은 감정이 거세된 기계 같고, 먼 발치에서 움직임없이 그들을 관조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시리게 느껴질 만큼 담담하다. 이들의 무대로 감독이 선택한 곳은 신도시가 막 들어서기 시작한 시점의 판교와 하월곡동의 철거촌. 고층 아파트와 납작한 판잣집이 빚어내는 기묘한 위화감은 장면을 내리누르는 침묵과 뒤엉켜 섬뜩한 단절감과 공허감을 불러일으킨다.

주인공들의 일상은 일견 이야기의 흐름과 무관해 보이는 몇개의 에피소드와 뒤얽혀 좀더 큰 그림을 완성한다. 바로 뒤에서 한 남자가 가스통을 들고 자살 소동을 벌이는데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가만히 자기 집 카펫의 먼지를 털고 있는 여자, 한밤중에 난데없이 삽을 들고 나타나 공무집행이라며 땅을 파기 시작하더니 ‘여기가 아니래’라며 허허로이 사라지는 공무원들, 대형 할인마트의 주차장에서 주차 자리를 놓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싸우는 두 여자. 현대사회의 우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은 이 통렬한 장면들은 노경태 감독의 ‘이미지 수집’을 통해 탄생했다. “일상 속에서 부조리거나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을 발견할 때마다 메모를 하는 습관이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장면들은 대부분 내가 살면서 직접 목격한 일들을 재구성한 것이다.” 꽉 짜여진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 <마지막 밥상>이 펼쳐놓는 것은 결국 하나의 사진첩에 가깝다. 소통불능에 빠진 현대사회에 대한 세밀하고 정교한 사진첩.

무채색의 느낌으로 흘러가는 사진첩 사이사이에 들어선 환상 시퀀스들은 영화에 독특한 색채를 부여한다. 간수들에게 폭행당한 아버지가 그들 손에 끌려가는 동안 각각의 감방에 자리한 죄수들은 춤을 추거나 뜨거운 태양 아래 바캉스를 즐기고, 지하철에서 피로에 찌들어 잠든 승객들에게는 외계에서 온 듯한 인간들이 나타나 퍼레이드를 벌인다. 현실을 초월한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온 기이한 판타지. <마지막 밥상>이 주인공들에게 던져놓는 유일한 탈출구는 다름 아닌, ‘화성 이민’이다. “사회가 더 나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내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아파트 옆집에 누가 사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단절된 삶을 살고 있지 않나. 지구를 떠나서라도 좀더 인간적인 삶을 찾고 싶어하는 이들은 분명 존재할 거다.”

<마지막 밥상>은 얼마 전 제59회 로카르노 영화제의 ‘Play Forward’ 부문에 공식 초청됐고, 영화제의 수석 프로그래머인 티치아나 핀치로부터 “시와 삶을 잇는 아름다운 침례식”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서울과 부산에서 각각 한번의 시사회를 가졌지만, 개봉 전망은 불투명한 상태. 아직 현장의 여운에 젖어있는 노경태 감독이지만 지금 그에게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관객을 만나는 것이란다. “‘액션~!’ 하고 타라라 카메라가 돌아가고, 모든게 하나로 집중되서 시계 소리만 들리는 순간. 그 순간의 촬영장이 제일 행복하다. 천원짜리 김밥만 먹으면서 영화를 만들었지만 고생스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제 작품이 탄생한 만큼, 지금 나와 배우들, 스탭들이 원하는 건 무엇보다 관객을 만나는 거다. 많은 사람들에게 <마지막 밥상>을 보여주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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