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 감수성으로 무장하라
하는 일 없이 하루하루를 소일하는 백수 건태(강현중)는 어느 날 동네 건달 힘줄 삼형제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마침 힘줄 삼형제에게 원한을 갖고 있던 사이보그 창녀 향수(예수안)는 건태를 이용해 그들에게 복수할 계획을 세우고, 건태를 부추겨 수상한 과학자 닥터 헬(이상훈)에게로 데려간다. 손가락이 망가져 총을 쏠 수도, 칼을 휘두를 수도 없는 그에게 닥터 헬이 제안한 새로운 무기는 다름 아닌 성기총. 사정을 하면 정액 대신 총알이 발사되는 성기총을 장착한 건태는 복수에 성공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하고 싶게’ 만드는 무기의 성능(?) 탓에 의도치 않은 살인을 저지르면서 점차 나락으로 빠져든다.
줄거리만 들어도 엉뚱하기 그지없는 <삼거리 무스탕 소년의 최후>는 <대학로에서 매춘하다가 토막살해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로 잘 알려진 남기웅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다. 사이보그로 개조된 인간, 성기에 장착된 총 등 캐릭터와 소재가 <대학로…>를 강하게 연상시키는 <삼거리…>는 실제로 감독이 <대학로…>의 속편을 구상하던 중 탄생하게 된 작품. “<대학로…>의 여고생 캐릭터로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했다. 이번에는 그녀에게 이용당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 싶었고, 그렇게 쓰게 된 <게으름뱅이의 복수일기>라는 시놉시스가 약간의 변형을 거쳐 <삼거리…>가 됐다.”
광각렌즈를 이용한 극단적인 왜곡과 날아다니는 듯 거친 카메라의 움직임이 주를 이루었던 <대학로…>에 비해 <삼거리…>는 정적인 대신 한결 안정감있고 매끈한 외양을 갖췄다. 하지만 주류사회를 향한 공격적 시선과 B급 감수성은 그 수위가 한층 더 높아졌다. <대학로…>의 담임 선생님이 원조교제 여고생에게 ‘5만원짜리’ 서비스를 강요했다면, <삼거리…>의 힘줄 삼형제는 아예 여고생을 납치해서 사이보그 창녀로 개조해 착취하는 지경에 이른다. 뒤틀린 사제관계라는 설정은 남학생에게 성관계를 요구하고 욕구불만의 대가로 체벌을 가하는 여교사 미미의 캐릭터를 통해 계승됐고, 아버지가 호랑이인지 개인지 모호한 건태의 가계도는 신화적인 요소를 차용해 가족제도에 대한 발칙한 농담을 던진다.
기괴하면서도 발랄하게 반죽된 <삼거리…>의 캐릭터와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성기총. <대학로…>에서 담임 선생님을 산산조각내는 무기로 잠깐 등장했던 성기총은 엽기적인 상황을 유발하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소재이자, 남성성을 둘러싼 영화의 중심 화두를 집약시킨 결정체와도 같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성기총을 작동시키기 위해 애써 뇌쇄적인 춤을 춘다거나, 발레리나의 포스터를 들이댄다는 식의 비딱한 유머에는 남성성을 향한 노골적인 조롱과 야유가 담겨 있고, 성기총이 본격적인 살인 병기로 발전하는 영화 후반부에는 통제 불가능한 인간의 욕망과 폭력성을 향한 염세적인 시선이 짙게 묻어난다. “성기총은 한편으로는 극명한 남성적 상징 같지만 결과적으로 그 남성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남성성에 대한 거부와 저항, 더 나아가서는 인간이 가진 불가항력의 폭력성에 대한 나 자신의 안타까움이 반영돼 있다고 할까.”
남기웅 감독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삼거리…>의 가장 강력한 매력 역시 온갖 장르의 소재들을 끌어다가 제멋대로 변주하는 특유의 잡종 스타일에 있다. <강철> <우렁각시>에서 보여줬던 설화적 상상력은 건태의 형인 ‘호랑이 인간’ 기태를 탄생시켰고, 온몸을 검은 가죽 의상으로 감싼 사이보그 창녀 향수는 일본 성인만화와 할리우드영화의 여전사 이미지를 뒤섞어놓았다. “미안하다”는 대사가 들어서야 할 자리에 난데없이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포스터가 등장하고, 지하 보일러실을 배경으로 <스타워즈>의 패러디가 튀어나오는 등 천방지축의 상상력은 말 그대로 허를 찌른다. “장르, 주제, 스타일을 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시나리오를 쓰기 때문에 그런 결과물이 나오는 것 같다. 사실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그러면 보는 사람만 골치 아프지(웃음).”
<삼거리…>는 얼마전 폐막한 부천국제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관객을 만났다. 본래 배급사도 잡혀 있었고 극장 개봉도 예정되어 있었지만, 믿었던 배급사가 갑작스레 등을 돌리면서 졸지에 ‘허공에 뜬’ 상태가 됐다. “한국의 영화 현실에서는 저예산 영화가 설 자리가 없다. 소위 예술 극장이라는 곳도 뚫고 들어가기가 정말 힘들더라. 어디 창고라도 하나 빌려서 천원 받고 상영하고 싶은 심정이다.” 진지한 표정으로 “창고 상영을 하면 꼭 보도해 달라”고 다짐을 받을 만큼 애를 태우는 남기웅 감독이지만, 창작을 향한 의지 만큼은 꺾이지 않았다. “현재 상업영화를 준비 중이고, 몇 편의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있다. 물론 상업영화를 독립영화처럼 만든다는 것은 힘들겠지만, 내가 하는 상업영화는 남기웅 고유의 스타일이 분명 살아있는 작품이 될거다. 그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는 지금 나도 상상이 안간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