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김기덕의 <시간> 4인 비평 [2] - 황진미
2006-08-24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시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시간은 존재와 관계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존재는 어떻게 동일성을 유지하는가? 변화하는 건 무엇이고, 불변하는 건 무엇인가?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면서 관계의 새로움을 꾀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시간은 흐르는 것인가, 존재하는 것인가? <시간>은 철학적 난제들로 가득하다. 물론 답도 있다. 그 답은 변증법적이거나 불교적이거나 들뢰즈적이다(가장 자신있는 키워드를 골라보시라). 어쨌든 <시간>의 세계관은 안티-플라토니즘적이다.

1. 세희와 새희, 그녀는 하나인가 둘인가

그녀는 지우와의 관계(R)를 새롭게 하고자, 세희의 얼굴을 버리고 새희(New희)가 된다. 그러나 그녀가 얻은 것은 ‘신선해진 관계’(NewR=New희&지우)가 아니다. 그는 세희와 열렬히 사랑했던 당시의 지우가 아니라 세희에게 실연당한 지우, 즉 지우^이다. 따라서 관계는 새희&지우^=R^이 된다. R^은 그녀가 바랬던 NewR과 다르다. 그녀는 지우^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과거의 연인 세희를 맞닥뜨린다. 새희는 이미 세희가 아니다. 그녀는 세희에게 질투를 느끼다가, 세희로 회귀하려 한다. ‘새희이자 세희’이려 하는 그녀로 인해 관계 R^=새희(세희)&지우^로 분열 직전에 이른다. 그녀는 새희의 얼굴에 세희의 가면을 쓰고 지우^에게 나타나, 자신이 ‘새희이자 세희’임을 밝힌다. 여기서 플라토니즘적이라면 세희가 본질이고 새희가 가상이므로, 지우는 ‘세희의 종이가면 속, New희의 얼굴 속’ 세희의 영혼을 만날 테지만, 안티-플라토니즘적이므로 이미 새희가 (또 다른) 본질이고, 세희는 지우^의 기억이자 종이가면, 즉 이미지로만 존재한다. 따라서 새희가 “이 가면을 벗기고 나를 봐”라 붙잡지만, 지우^는 ‘새희or세희’의 불일치를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간다.

2. 지우와 정우 혹은 다른 무수한 남자들

지우^는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한 상태로는 새희를 만날 수 없다고 판단한다. 즉 ‘지우^&새희(세희)’의 관계 R^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지우^가 아닌 존재(Not지우)가 되어, 새희 앞에 나타나려 한다. 그러나 어떤 모습일지 알지 못하는 새희는, 무수한 Not지우들 속에서 지우를 찾느라 안간힘이다. 새희는 만나는 모든 남자들 속에서 지우의 흔적과 동일성을 찾아 헤맨다. 사소한 것들이 그에 대한 암시가 된다. 마침내 몰래 그녀의 사진을 찍고 기다리던 남자를 만나 “지우씨”라 부르지만, “저는 정우(지우 역할의 배우 이름. 가상이 아닌 또 다른 본질 혹은 더한 본질)예요”라 대답하고 얼굴에 이불을 뒤집어쓴다. 세희가 새희가 되었듯 지우는 정우가 되었지만, 새희가 세희와의 자기동일성의 끈을 놓지 못했던 것과 달리, 정우는 지우에 대한 아집과 미련을 버린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지우를 찾고, 보이지 않는 존재로 그녀를 뒤쫓던 남자는 차에 치어 죽는다(지우는 <빈 집>을 편집하고 있었다. 태석처럼 ‘유령’으로서 육신을 비운다). 그녀의 집착의 단초였던 자기 몸을 그녀 눈앞에서 버린 것이다. 그녀는 피투성이로 “아무도 못 알아보게 해주겠다”는 의사에게 다시 수술을 받는다.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는 얼굴과 관계를 완전히 폐기하고 Not희가 되어 나온다.

3. 영원회귀 혹은 비인칭적 시간

그녀가 Not희가 되어 새희의 사진을 들고 나올 때, 부딪치는 여자가 세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만약 세희라면 전 과정이 세희의 상상실험일 수 있다. 세희가 아니라면 무수한 이들로 퍼져나가는 연쇄가 된다. 그러나 이는 중요치 않다. 이미 <나쁜 남자>에서 선화가 자살하려는 여자가 묻은 사진 조각에 자신의 얼굴을 맞춰볼 때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봄장면이 반복될 때, 비선형적 시간의 흐름을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여러 시간성이 공존하는 시간이며, 한 개인의 시간이 아니라 개인의 개별성과 동일성을 넘어선 비인칭적(impersonnel) 시간이다.

<파란 대문> <섬> <사마리아>와 마찬가지로 <시간>에서도 한 사람의 행위는 상대방의 행위로 옮아간다. 이는 소통의 몸짓이자 행위의 완성이 된다. <사마리아>의 여진이 재영을 따라 바수밀다-되기를 완수하듯, 지우는 세희를 따라 자기를 버리고 비아(非我)가 된다. 그녀 역시 ‘아무도 아닌 자’가 된다. 여기서 ‘비인칭적 삶’의 시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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