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1세기 촬영감독 10인 [3] - 해리스 사비데스
2006-09-15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감각의 형상화, 잔영의 구조화

<엘리펀트> <라스트 데이즈>의 해리스 사비데즈

촬영감독 해리스 사비데즈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는 감독 구스 반 산트에 대해 먼저 말해야만 한다. 정확히 말하면 구스 반 산트의 변화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게리> 이후에 <엘리펀트>와 <라스트 데이즈>에 이르러 이른바 3부작을 완성하면서 구스 반 산트의 영화는 환골탈태했다는 말 이외에 다른 설명이 구차해질 정도의 결과물을 내놓았다. 그리고 프로듀서 대니 울프, 사운드디자이너 레슬리 샤츠를 포함해 ‘감각의 형상화 내지는 잔영의 구조화’라는 이 창조 작업에서 구스 반 산트를 도운 일등공신이 바로 촬영감독 해리스 사비데즈다.

세편의 영화는 모두 실화에서 영감을 얻어 착수됐고, 삶과 죽음 사이에 머물다간 인물(들)에 관한 성찰이다. <게리>에서 카메라는 시간을 영원히 보존하겠다는 듯 사막이라는 풍경을 힘겹게 건너는 두 젊은이의 순간을 장시간 지켜보았고, 흐름은 무한정 길었다. 거기에 비해 <엘리펀트>와 <라스트 데이즈>는 <게리>보다는 적극적인 개입으로 시간을 조립하기 시작했고, 카메라의 위치와 시간이 결정되는 것과 동시에 그 인물의 시간에 대한 물음도 가중되었다. 해리스 사비데즈는 이 세편의 실험에 임하는 자신의 자세에 대해 “관습적인 범위를 피하려고 노력하는 그런 식의 촬영은 훨씬 도전적이면서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밝힌다.

<엘리펀트>

세편의 영화가 벨라 타르의 <사탄탱고>와 샹탈 애커만의 <잔느 딜망>에 영향을 받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구스 반 산트의 언급이 해리스 사비데즈의 역할을 확인시켜주는 근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벨라 타르와 샹탈 애커만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는 카메라가 무엇을 얼마나 볼 것이며, 어디까지 볼 것이며, 언제 그만 볼 것인가를 신중하게 결정하는 태도를 배웠다는 말이 된다. 영화의 뇌관이 요구하지 않는 화려한 카메라의 지속과 운동은 값싼 것이 되기 십상이다. 벨라 타르와 샹탈 애커만의 비주얼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 ‘카메라를 움직인다는 것과 대상을 본다는 것에 대한 정당한 필요’를 거듭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건 곧 “나의 (촬영) 철학은 카메라를 반드시 움직여야 할 때만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하는 해리스 사비데즈의 신념이 합치된 지점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영화가 말하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있을 때에만 카메라는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고, 세편의 영화에 그것은 고스란히 묻어 있다. 그러므로 <엘리펀트>에서의 그 유연한 움직임은 역설적으로 “거기에 심리적인 이유”가 타당하게 있을 때만 그렇게 한 것이다. 해리스 사비데즈의 그 말에 관해 구스 반 산트는 “(이 영화를 통해) 당신은 고등학교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라며 맞장구를 친다.

그동안 자주 거론돼온 1.33 대 1 비율 사용에 대해서도 구스 반 산트와 해리스 사비데즈는 전적으로 서로 동의했다. 물론 이 방법을 제안한 것은 구스 반 산트지만, 해리스 사비데즈 역시 “오랫동안 1.33 대 1의 비율로 촬영한 영화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해보고 싶었던 것은 물론이고,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고 나서는 인물들의 연기가 프레임의 정중앙에서 이뤄지는 것을 보는 것이 좋았다. 그건 마치 다이앤 아버스의 사진 같아 보였다”고 말한다. 구스 반 산트가 1.33 대 1의 비율을 고집한 것은 제작사인 HBO를 고려한 포맷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그 나이 또래의 학생들이 만져볼 수 있는 16mm 카메라의 포맷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대상이 취할 수 있을 만한 매체를 선택해 내용을 담아야 더 적확하게 그들의 심상을 포착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해리스 사비데즈는 정사각형 비율의 카메라를 들고 소년과 소녀들을 따라, 또 하나의 학생인 듯 혹은 이미 유령인 듯 학교 복도를 걷고 또 걸으며 같은 순간을 반복, 지속적으로 담아낸다.

<라스트 데이즈>

그렇게 <엘리펀트>를 지나 <라스트 데이즈>를 만들 즈음, 해리스 사비데즈와 구스 반 산트는 이제 특별히 따로 할 이야기가 많지 않을 정도가 됐다. “<엘리펀트>와 비슷하게 가자는 것 외에 특별한 방향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앵글을 잡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철저한 규칙 같은 것을 만들었다. 카메라는 언제나 방의 한가운데 고정하여 45인치 높이를 유지했고, 카메라는 언제나 벽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만들어 그 벽이 평면적으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구스 반 산트의 말이다. <라스트 데이즈>가 <엘리펀트>의 연장이라는 사실은 <라스트 데이즈>가 같은 비율을 택했다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색채와 필름 타입에서 최대한 <엘리펀트>에 가깝게 완성하려 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우리는 주로 이미지를 담는 방식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에는 슈퍼 8mm 디지털카메라로 작업하려 했고, 실제로 테스트 촬영도 했다. 캐논 포켓 카메라의 영상 촬영 모드로 찍으려고 생각한 적도 있다. 16mm필름을 사용하려고도 했고. 하지만 결국 35mm로 촬영하게 됐다. 필름 타입도 <엘리펀트>와 동일한 것을 쓰려 했지만, 그 필름이 더이상 생산되지 않는다고 해서 최대한 비슷한 타입을 골라 촬영했다. <엘리펀트>의 촬영과 유사한 방식인데, 인터컷을 되도록이면 생략하고 마스터 숏에서 많은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다시 구스 반 산트의 말이다. 가만히 보면, 해리스 사비데즈와 구스 반 산트는 마치 서로가 거울인 듯 보완과 보충의 의견을 내놓는다.

해리스 사비데즈는 원래 유럽에서 패션 사진작가로 먼저 경력을 쌓았다. 그러고나서 본거지인 뉴욕으로 돌아와 나인 인치 네일스, 알이엠, 마돈나, 피오나 애플 등의 뮤직비디오를 찍었고, BMW 광고(연출 왕가위)를 비롯한 많은 광고 작업을 했다. 구스 반 산트와 알게 된 것도 10여년 전쯤 리바이스 광고 작업을 함께하면서다. 물론 그동안에 조너선 글레이저, 제임스 그레이, 존 터투로, 데이비드 핀처 같은 실력있는 감독들의 영화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짧지 않은 경력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확실히 구스 반 산트와의 만남이 그에게나, 관객에게나 아주 귀중한 사례를 남겼다. 무엇보다 그건 자신의 촬영 철학을 충분히 카메라에 담아낼 수 있는 기회를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역으로, 3부작에 혼이 붙은 건 바로 그의 촬영 철학 덕분이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자칫 휩쓸리기 쉬운 카메라의 욕망보다 피사체와의 교감을 더 귀하게 여기는 촬영감독은 흔치 않다. 그런 점에서, 해리스 사비데즈는 좋은 귀감이다. 해리스 사비데즈는 확실히 구스 반 산트의 영화를 통해 확실한 자기 견본을 만들어놓은 것 같다.

이 장면! <엘리펀트>의 로커룸

말없이 숏으로 느끼는 수많은 공감

관객은 우선 3부작을 통틀어 <라스트 데이즈>의 기나긴 롱테이크 트래킹 후진 숏을 이 한 장면으로 꼽고 싶을지 모른다. 창문 밖에 놓인 카메라가 뒤로 후진하기 시작하면 방 안의 블레이크는 이 악기 저 악기를 만지면서 서성댄다. 주변의 대지와 프레임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음악 소리와 멀리 창문 너머로 멀어져가는 블레이크의 모습이 하나가 되어 지독하게 멍한 지속이 일어난다. 처연한 이별의 거리감과 물리적 시간. 그런데 이 장면을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만한 힌트를 해리스 사비데즈가 뽑은 <엘리펀트>의 명장면에서 얻을 수 있다. <라스트 데이즈> 앞에 <엘리펀트>가 있고, <엘리펀트>가 움직임과 구도의 명확한 심리적 충격을 반영하고자 한 것이었다면, 과연 이 영화에서 그가 선택한 장면은 뭘까? 해리스 사비데즈는 말한다. “그건 미셸이 로커룸으로 들어올 때”다. “카메라는 그 아이의 머리쪽으로 트랙인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 아이의 머리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관객은 그녀에 관해 말하는 다른 여자아이들의 수다를 듣는다. 그러면서 관객은 이 꼴사나운 여자아이들이 입고 있는 옷을 보게 된다. 내게 이것은 이야기를 말하는 훌륭한 구조로 보인다. 그 자체로는 다이얼로그가 없어도, 관객은 이 소녀에 관해 느낀다. 그녀의 외로움, 그녀의 순간, 그녀의 삶을 느낀다. 그 숏 안에는 수많은 공감이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의 말에 따를 때 <라스트 데이즈>에서 블레이크로부터 떨어져나오는 카메라는, 그 시선에 의지해야 하는 우리는, 확실히 블레이크의 심정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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