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1세기 촬영감독 10인 [1] - 로드리고 프리에토
2006-09-15
글 : 오정연

과학과 예술 사이에서 태어난 영화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촬영감독은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감독이 영화의 주인으로 군림한 이래, 자주 잊혀지는 그들의 하는 일은 우리의 예상을 넘어선다. 앵글과 프레임의 사이즈, 카메라의 움직임을 결정하는 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다양한 포맷, 다양한 필름, 다양한 렌즈와 카메라와 현상방식, 무한한 변수를 지닌 조명…. 화면의 질감과 온도, 분위기를 책임져야 하는 촬영감독들이 매 순간 결정해야 할 목록들이다. 이 정도면 촬영감독은 영화의 눈이 아니라, 심장과 보조를 맞추는 머리에 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촬영감독을 중심으로 일련의 영화를 꿰는 것은 영화를 더욱 풍부하게 읽을 만한 또 하나의 기준이 되어준다. 갈수록 새롭고 자극적인 이미지가 눈길을 잡아끄는 요즘. 영화 고유의 가능성을 각자의 방식으로 고민하고 있는 해외 촬영감독 10인을 소개한다. <와호장룡>의 피터 파우를 제외하면 모두 1990년 이후 첫 번째 장편영화를 촬영한 이들의 다양한 면모는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의 스펙트럼만큼이나 다채롭다. <셀레브레이션>에서 <마이애미 바이스>로,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에서 <연인>으로, <엘리펀트>에서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이 소개글은 결국 영화의 또 다른 지형도를 그리기 위한 작은 시도다.

뒤섞인 시공간에 스며든 감정의 프리즘

<21그램> <브로크백 마운틴>의 로드리고 프리에토

<브로크백 마운틴>

<아모레스 페로스>와 <21그램>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두 영화를 “자매영화”라고 부른다. 자동차 충돌사고, 이를 축으로 한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교차시키는 이 영화들은 동일한 감독과 시나리오작가, 촬영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 라틴아메리카 특유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담은 영화를 통해 세계 영화계에 이름을 알린 세 사람의 두 번째 영화는 기대하지 않았던 식으로 방향을 튼다. 삶을 성찰하는 한결 묵직해진 시선을 담고 있는 <21그램>은 이야기 전개에서 일말의 방향성이 존재했던 <아모레스 페로스>와 달리, 앞뒤 설명없이 인물의 감정을 따라간다. 캐릭터와 시공간을 제멋대로 넘나드는 혼돈에 시각적인 질서를 부여하는 촬영감독 로드리고 프리에토의 몫이 더없이 중요해졌다.

아주 도식적으로 정리하자면 <21그램>이 각각의 캐릭터를 구분하는 것은 화면의 색감이고, 캐릭터가 겪는 내러티브의 진행 정도를 드러내는 것은 화면의 질감이다. 백색과 녹색, 그리고 적색으로 나뉜 캐릭터의 이야기는 클라이맥스로 치달을수록 고감도 필름과 특수현상의 정도를 더하며 거칠어지는 화면에 담긴다. 영화가 시작하고 도무지 누구의 이야기를 어떻게 따라가는지도 파악할 수 없는 혼돈에 빠지는 관객은 프리에토의 화면을 통해 영화의 고유한 리듬에 적응한다. 이를 위해 프리에토는 배우의 의상, 벽지, 조명의 색깔, 필름의 종류 등을 변수로 사전 테스트를 반복했고, 한 장면 안에서도 미묘하게 달라지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서로 다른 필름으로 촬영하는 파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프리다> <알렉산더> <브로크백 마운틴> 등 수십년의 시간과 광범위한 공간을 배경으로 인물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관건인 영화들에 프리에토가 기용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뒤섞인 시공간에 스며든 감정을 비주얼의 미묘한 차이로 표현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 마케도니아에서 인도의 정글까지 이어지는 알렉산더의 여정은 총 6종류의 필름, 다양한 필터와 다양한 정도의 블리치 바이패스(현상시 필름의 은 성분을 남기는 방법으로 은 성분이 많이 남을수록 화면의 입자가 거칠어진다)를 통해 구현됐다. 이상향이었던 브로크백으로부터 물리적, 정신적으로 멀어질수록 피폐해져가는 두 남자의 20여년도 비슷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관객이 세심한 변화를 인식할 수는 없겠지만, “촬영감독은 구도와 조명 등 화면의 모든 요소를 통해 시각적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프리에토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차이가 보는 이의 감성을 자극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그의 카메라워크를 단지 현란하고 역동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단한 오해가 될 것이다. 유일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인 <알렉산더>를 제외한 그의 촬영작들은 크레인이나 유려한 무빙이 가능한 스테디캠과는 거리가 멀었다. 때로 경제적이고 유머러스한 무빙이 눈에 띄는 경우가 있지만, 대개의 경우 장면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 카메라가 움직였다고 눈치채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카메라워크와 관련하여 유일하게 강점이라고 꼽을 수 있는 것은 핸드헬드지만, 단순한 카우보이 캐릭터를 닮아 촬영마저 극도로 간소한 <브로크백 마운틴>에서는 잭과 에니스가 다투는 단 한 장면에서만 카메라를 어깨에 얹었을 뿐이다. 인물의 감정이라는 악보를 성실하게 연주하는 그의 카메라는 과잉과 과시를 모른다. “흔히들 아름다운 풍경이 담긴 영화의 촬영을 칭찬하지만 풍경 숏의 대부분은 B카메라팀이 찍게 마련이다. 아무도 <아모레스 페로스>의 촬영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영화 자체에 감동을 받는다는 사실을 통해 영화 촬영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내가 할 일은 이야기를 파워풀하게 만들되 나의 존재를 감추는 것이다. 관객이 촬영감독의 존재를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영화로부터 멀어진다.”

<프리다>

카메라의 움직임과 함께 화면의 질감을 중요시 여기는 프리에토는 <프리다>부터 <알렉산더>까지 자신이 촬영한 모든 극영화를 DI(Digital Intermediate: 완성된 필름을 디지털로 옮겨 후반작업을 진행하고 이를 다시 필름으로 변환시키는 것)로 작업했다. 컴퓨터를 통해 잘못된 조명을 손보고, 잘못된 프레이밍을 조절하고, 심지어 180도 법칙에 어긋나도록 찍힌 화면의 좌우를 뒤집는 작업까지 가능하게 만드는 DI에 대해 아직도 많은 촬영감독들은 반신반의하는 상황. 한정된 예산 속에서 급박하게 촬영을 진행하느라 발생한 소소한 실수를 바로잡는 것부터 자신의 의도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색감과 콘트라스트를 구현하는 것까지, 프리에토는 DI를 “카메라에 장착하는 컬러필터와 다르지 않은, 또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DI를 통해서도 충분히 유사한 효과를 거둘 수 있음에도 여전히 다양한 정도의 블리치 바이패스를 시도하는 프리에토는 셀룰로이드 필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감추지 않는다. “디지털로는 절대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 필름은 언제나 통제 불가능한 구석이 있어서 네거필름을 조절하는 공정은 늘 뜻밖의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냐리투 감독과 함께한 <아모레스 페로스>로 유명세를 얻어 할리우드에 정착한 프리에토의 행보는 알폰소 쿠아론과 짝패를 이뤄 주류에 안착한 에마뉘엘 루베즈키와 여러모로 닮았다. 루베즈키 밑에서 촬영부로 일했던 프리에토는 결국 루베즈키의 뒤를 이어 멕시코에서 수혈된 가장 ‘핫’한 젊은 피로 미국 내에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인공적 세트에 리얼리티를 부여해온 루베즈키와 달리 프리에토는 여전히 실제 공간의 사실성에 매력을 느낀다. 디트로이트에서 100% 촬영한 <8마일>, 조명 설정이 불가능한 야간의 산속장면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던 <브로크백 마운틴>, 늘 좁은 로케이션 장소와 씨름한 <21그램> 등에 대해 그는 “벽을 떼어내면서 촬영할 수 있는 세트가 촬영에 용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결국 영화의 사실성을 떨어뜨린다. 리얼리티는 제약으로부터 만들어지는 셈”이라고 말한다.

결국 프리에토의 화두는 영화적으로 표현된 리얼리티다. 현실과 신화 사이에서 진동하며 때때로 초현실적인 화면을 연출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던 <알렉산더>에서 프리에토는 알렉산더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 장면을 실험적인 붉은 영상으로 처리했다. “죽음을 앞둔 이의 눈에는 세상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떨쳐버릴 수 없도록 버거운 운명을 감내한 예술가의 일대기를 그린 <프리다>는 프리다의 화폭을 그대로 흉내내지 않았다. 강렬하고 밝은 색채와 단조로운 명암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작품에 내재한 정체불명의 그림자를 담기 위해, 때때로 프리에토는 화면의 어두운 여백을 드리우는 파격적인 앵글을 시도했다. 인물의 주관을 최우선으로 놓는 것. 이것은 유난히 넓은 폭의 시공간을 유영하는 그의 카메라가, 지난하고 격정적인 감정의 여정을 따라가는 자신만의 방식이다.

이 장면! <21그램>의 화장실

두 인물의 심리를 잡아낸 두 가지 조명

좁은 모텔과 감방, 화장실 등을 전전하며 <21그램>을 찍을 때 프리에토는 작고 기동성있는 조명기를 100% 세팅해놓고 촬영에 임했다. 그러나 화면을 장악하는 색감은 모두 철저한 계산에서 얻은 결과물이다. 가족을 잃은 삶을 술과 약의 힘으로 연명하는 크리스티나가 술집 화장실에서 마약을 전달받는 장면. 카메라를 움직이는 것도 힘겨운 열악한 상황에서도 인물의 상황과 이후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연출하는 그의 세심함이 돋보인다. 촬영감독과 촬영부 1명, 두 여배우가 들어갈 만한 화장실은 두 가지의 광원이 존재한다. 크리스티나가 기댄 벽 위에 달린 백열등과 그에게 약을 건네주는 여자가 바라보고 있는 거울 위에 달린 형광등. 약을 가진 여자는 창백하고 병적인 푸른빛 아래 위치한 반면, 크리스티나의 빛은 여전히 따뜻한 편에 속한다. 아직까지는 두 사람이 다른 세계에 속해 있음을 프리에토는 이렇게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부 모텔방에서 코카인을 흡입할 때는 크리스티나 역시 한결 창백하고 푸르스름한 조명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 밖에도 영화 속 세 인물에게 설정된 각각의 주된 색감은 그처럼 일상적이면서도 세심한 설정 조명을 통해 이들이 한 공간에 모이더라도 계속 유지된다. 한 프레임씩 주의해서 넘겨보지 않는 이상 아무도 눈치챌 수 없는 조명에 굳이 신경을 쓴 이유를 묻지 말자. 우리의 감각은 무의식을 파고들 때 더욱 큰 힘을 지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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