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색이 빚어낸 정서
<와호장룡> <무극>의 피터 파우
피터 파우에게 촬영은 시(詩)와 같다.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와호장룡>이 우아한 검무(劍舞)로 명상적 화폭을 펼쳐 보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피터 파우에게 시인의 칭호가 적절한 이유는 그의 카메라가 무엇보다 정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인물의 내면이 가장 우선적인 요소”임을 강조하는 피터 파우의 시상(詩想)에는 경계가 없다. <소오강호> <백발마녀전> 등의 무협극, <드라큐라 2000> 같은 공포물, 뮤지컬영화 <퍼햅스 러브> 등 그가 스크린에 써내린 시는 다양한 정서를 머금었다.
홍콩의 촬영감독 중 최초로 오스카를 거머쥔 인물이자 금장상 촬영상을 5번이나 수상한 피터 파우는 샌프란시스코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졸업 뒤 홍콩으로 돌아온 그는 <템테이션 오브 댄스>로 데뷔한 뒤, <소오강호>로 실력을 인정받는다. 이후 우인태, 오우삼 등 저명한 홍콩 감독들과 호흡을 맞추며 “마음을 읽는 법을 깨달은” 피터 파우는 “정서가 테크닉에 우선한다”는 원칙을 세워나갔다. <와호장룡>의 백미인 대나무신은 인물의 내면에 주력한 결과였다. 상대를 향한 사랑과 두려움, 살의가 뒤엉킨 장면에서 피터 파우는 카메라를 인물과 같은 높이에 설치했다. “관객이 화려한 칼놀림에 감탄하기보다는 복잡한 마음을 느껴야” 했기에 시각적 쾌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앵글을 일부러 피한 것이다. 드가를 연상시키는 빛의 사용으로 사랑의 심리를 포착한 <퍼햅스 러브>, 색의 충돌로 갈등을 표현한 <무극> 등 그의 렌즈는 언제나 내면에서 출발점을 찾았고, “영상 하나만으로 마음을 전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촬영감독은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사물에 대한 관찰을 통해 삶의 정수를 발견하는 것이 촬영감독의 일”이라 말하는 피터 파우의 시선은 확실히 세상을 향한 시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주관과 객관의 격전지
<존 말코비치 되기>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랜스 어코드
랜스 어코드는 광고와 뮤직비디오쪽에서 이름을 먼저 알렸다. 물론, 이런 과정을 밟아 출중한 촬영감독의 도정에 오른 인재들이 한둘은 아니다. 하지만 그 주요 파트너가 스파이크 존즈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팻 보이 슬림의 노래에 맞춰 크리스토퍼 워컨이 마치 무중력 상태라도 되는 양 공중을 사뿐히 날아다니며 기품있게 춤을 추던 스파이크 존즈의 뮤직비디오 <웨폰 오브 초이스>. 그 장면을 잡아낸 것이 랜스 어코드였다. 광고가 아니더라도 랜스 어코드의 친구들은 미국 인디영화의 총아들이다. 빈센트 갈로의 <버팔로 66>은 랜스 어코드의 장편 데뷔작이었고, 소피아 코폴라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와 최근작 <마리 앙투아네트>의 촬영을 그에게 맡겼다.
“카메라의 시점은 주관적인 것”이라는 랜스 어코드의 말은 <버팔로 66>에서 인물들이 식탁에 둘러앉을 때 180도 가상선의 전격적인 파괴를 끌어낸다. 그걸 통해 무차별적으로 망가진 가족의 상태를 보는 주인공의 혼란스러운 주관을 피력하고 싶어한다. 그 주관적인 시선은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말코비치가 자신의 뇌 안에서 수많은 말코비치들의 욕망을 목격하는 어지럼증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어댑테이션>에서처럼 주관과 객관의 격전지로 묘사된 음험한 늪지대의 비주얼을 창조해낸다. 랜스 어코드는 현실에 있는 사물과 풍경의 외관을 파격적으로 변형시키지 않고도 그것들에 환상의 성격을 부여할 수 있는 독특한 촬영술을 선보인다. 때문에 그가 현실과 환상의 부조리한 상태에 매혹되어 있는 스파이크 존즈와 같이 일하는 것은 어울리는 일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촬영을 마친 랜스 어코드는 지금 스파이크 존즈의 새 영화를 작업 중이다.
색채와 감정의 조화
<연인> <천리주단기>의 자오샤오딩
중국에서 최고의 촬영감독이라는 뜻의 ‘황금표 촬영감독’이라고 불리는 자오샤오딩. 그는 훌륭한 촬영감독의 조건으로 두 가지를 꼽는다. “촬영감독은 우선 중요한 예술창작자다. 이외에 기술적 책임도 있다. 예를 들어 필름에 맞는 정확한 조명에 대한 이해나 색채에 대한 컨트롤 등 말이다.” 그중에서 그는 색채야말로 “촬영에서 가장 중요한 조형요소”라고 주장한다. 빨강과 초록, 파란색 옷을 입은 세 사람이 삼각관계의 기쁨과 슬픔 속에서 노란 사막, 넘실대는 대나무숲, 푸른 호숫가를 휘달렸던 <연인>. 특히 붉은 천을 허공에 날리며 춤을 추거나 북을 두드리는 여주인공의 역동적인 유희는 극도의 시각적 쾌감을 선사한 바 있다. 반면 아들을 위해 중국을 찾은 일본 남자의 사연을 담은 <천리주단기>는 일본의 무채색 도시와 중국의 황토빛 자연을 대비시키며 눈에 보일 듯 아비의 마음을 실어날랐다.
그럼에도 자오샤오딩은 “촬영은 기본적으로 이야기 자체와 감독의 요구를 중심으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2005년 <연인>이 오스카 최우수 촬영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자 장이모 감독의 이름을 가장 먼저 입에 올린 그였다. “(촬영감독은)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자오샤오딩은 무엇보다 감독의 의도에 렌즈를 갖다댄다. 스스로 “촬영감독 출신이라 영상에 중점을 두”는 동시에 “표현 면에서 아주 강한 특색이 있다”고 표현한 장이모 감독의 스타일에 쉬이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1987년 베이징전영학교 촬영과를 졸업한 자오샤오딩은 본격적인 영화 일에 뛰어들기 앞서 코카콜라, 쉬에티에룽 자동차, 아르마니 향수를 비롯한 CF와 정부 선전광고물을 촬영한 바 있다. 장이모 감독과는 2000년 베이징올림픽 관련 홍보영상물 <신베이징, 신올림픽>을 시작으로 <연인> <천리주단기>를 함께 작업했고, 장이모의 차기작 <황금갑> 역시 자오샤오딩 촬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