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충무로 미국 공략 [2]
2006-10-20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글 : 문석

미국은 충무로의 새로운 돌파구

많은 사람들은 이 같은 흐름이 충무로의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진단한다. 수년 동안 한국영화의 제작비는 꾸준히 상승해왔으며, 100억원대의 대형 프로젝트가 1년에 여러 편 만들어질 정도로 규모도 커졌다. 하지만 시장은 그리 넉넉하지 않다. 게다가 한때 한국영화 제작비의 상당 부분을 메워줬던 일본시장마저 찬바람이 불고 있으니 탈출구가 거의 없는 셈이다. “제작비의 덩치는 자꾸 커지는데 시장은 빤하기 때문에 옷이 튿어질 지경”이라고 한국 영화산업의 현주소를 진단하는 이준동 나우필름 대표는 “아직 중국시장이 열리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영화의 야망을 실현해줄 유일한 곳은 미국”이라고 설명한다. 미국이 유럽, 남미 등 다른 대륙으로 진입하는 데 있어 통로 구실을 한다는 사실 또한 충무로의 ‘아메리칸 드림’을 자극하는 요소다.

<네버 포에버>

이렇게 충무로가 미국 진출을 공언할 수 있는 것은 급상승한 한국영화의 위상이 뒷받침해주기 때문이다. 이승재 LJ필름 대표는 “과거 같으면 미국시장으로 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재원 조달이 가능하고 미국에서도 한국의 창의력을 인정하는 분위기”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웨스트 32번가>의 제작비 250만달러와 <아메리칸 좀비> 제작비 100만달러는 각각 CJ와 IHQ가 전액 투자했고, <네버 포에버>의 제작비도 한국 프라임엔터테인먼트가 모두 투자했다. <줄리아> 또한 전체 2500만달러 중 절반인 1250만달러를 한국쪽에서 투자할 계획이다. 또한 이미 <레이크 하우스>로 리메이크된 <시월애>를 비롯해 <엽기적인 그녀> <조폭마누라> <달마야 놀자> 등의 리메이크 판권이 할리우드에 팔렸다는 데서 알 수 있듯, 한국의 독창적인 이야기는 큰 인정을 받고 있다. 박이범 이사는 “할리우드에서는 시나리오 한편을 만드는 데 3년 정도 걸리고 비용도 400만∼500만달러가 든다. 결국 괜찮은 리메이크 판권을 사는 게 빠르고 비용이 적게 드는 길”이라고 말한다. 독창적 이야기를 가진 한국이 한·미 합작에서 좋은 조건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미국 내 여건 또한 좋아지고 있다. 특히 꾸준하게 늘고 있는 미국 내 아시아계의 영향력도 충무로의 미국 진출에 힘을 실어주는 요소다. 현재 미국 인구 중 흑인은 13%, 히스패닉은 12%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들을 대상으로 한 케이블채널은 큰 인기를 누리고 있고, 흑인 커뮤니티 영화 또한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아시아계 인구가 11% 정도에 이르러 그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됐다. 게다가 이들 중 아시아계의 소비수준이 가장 높다. <로스트>에 김윤진과 대니얼 데이 김이, <그레이스 아나토미>에 샌드라 오가 출연하는 등 이전보다 아시아계의 성장이 두드러지는 것도 이러한 사회적 영향력과 관련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눈앞의 흥행보다 현지화 노하우 확보에 중점을 둘 때

이렇게 유리해진 조건이라면 미국에서 현지화 전략을 구사할 게 아니라, 아예 한국영화를 미국시장에 더 비싸고 더 많이 내보내자는 생각을 할 만도 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웨스트 32번가>의 프로듀서 테디 지는 “좀더 현실적이 돼야 한다. 출연진이 모두 아시아인인데 <와호장룡>이나 <영웅> 같은 무술영화가 아닌 경우 미국에서 크게 흥행한 사례는 없다. 미국에서는 자막을 읽어야 하는 외국어영화를 모두 아트하우스영화로 간주한다”고 말한다. 결국 충무로의 미국 현지화 프로젝트의 절대적인 전제조건은 ‘영어로 된 영화’다. 물론 한국어로 된 예술영화나 한국어 대사로 이뤄진 무협, 판타지, 액션 등 장르영화도 미국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겠지만, 일반적인 상업영화의 경우 언어라는 장벽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얘기다. 영어로 소통이 가능한 감독, 배우, 프로듀서 등을 확보하는 것은 이들 프로젝트에 가장 중요한 과제다.

<웨스트 32번가> 촬영현장

그렇다면 이들 미국 현지화 영화 또는 한·미 합작영화는 주 타깃인 미국시장에서 어떤 반응을 얻을 것인가. 작품 규모와 지향점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아주 낙관적으로 전망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테디 지는 “<웨스트 32번가>는 갱스터영화라는 점에서 미국시장에서도 먹힐 수 있다고 본다. 한국식 룸살롱 세계나 존 조의 캐스팅 또한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수천개 스크린에서 와이드 릴리즈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말한다. CJ의 관계자는 “일단 영화를 보고 판단할 일이지만, 우선 아시안 커뮤니티가 주관객이 될 것 같다”고 전망했다. <네버 포에버>의 김진아 감독도 “너무 큰 대중적 성공을 기대하는 것은 금물”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사실은 이들 영화가 미국이라는 새로운 대지에서 충무로가 거두게 될 첫 수확이라는 점이다. 이들이 당장 싱그런 과실을 주렁주렁 안겨주지 못한다 해도 토양을 실험하고 해충을 점검하며 비료를 체크하는 계기를 마련해줄 것은 확실하다.

흥행 외에도 미국과의 협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많다. 이승재 대표는 “우선 제작과 마케팅 차원에서는 창의성과 시장을 어떻게 연결시키나를 배울 수 있고, 배급 관점에서는 북미시장과 유럽, 아시아시장 공략 노하우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복스3와 각종 인허가 서류나 노조 관련 리포트, 제작 보고서 등 미국의 영화제작 관련 문서를 공유키로 했던 나우필름의 이준동 대표는 “이 경험은 우리뿐 아니라 미국으로 가려는 다른 한국 영화사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얘기한다. 물론 복잡한 노동시간이나 문화 차이에서 오는 다양한 소통의 오류 등 다양한 문제가 존재하지만, “신뢰감만 쌓인다면 그 어느 것도 문제될 게 없다”는 이준동 대표의 경험담은 설득력있게 들린다.

한·미 모두 이해 가능한 코리안 아메리칸도 적극 활용해야

새벽녘에 접어들자 <웨스트 32번가> 촬영장도 조용해진다. 행인이 적어지면서 촬영의 집중도는 높아졌다. 분주한 스탭들 속에서 유난히 한국계의 모습이 많이 띈다. 마이클 강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든다는 소식에 많은 코리안 아메리칸들이 자원했다고 말한다. 노틀담대학에서 영화를 복수전공했다는 스물세살의 연출부 인턴 에디 송도 그중 한명이다. “만약 마이클 강 감독과의 작업이 아니었다면 영화에 입문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조역인 미연 역을 연기한 엘레나 장도 뉴저지주립대학인 러트거스에서 연극을 전공했지만, 영화는 처음이라고 했다. 전체의 30%가 넘는 한국계 스탭들의 대부분과 조단역을 맡은 한국계 연기자들은 이 영화를 통해 현장에 처음 들어왔다니, <웨스트 32번가>는 영화에 대한 열정은 가졌지만 인종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했던 코리안 아메리칸들에게 큰 기회를 마련해준 셈이다. 영화계에서 일하는 코리안 아메리칸이 많아진다면 한·미 합작 또는 미국 현지 프로젝트 또한 큰 힘을 받을 수 있다. 한국과 미국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는 이들 인력은 양쪽의 소통에 도움을 주고 완충지대 역할도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싱그런 미래까지 만들고 있으니, 만약 충무로 최초의 미국 개척자들이 당장에 어려움을 겪는다 해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게다가 충무로의 미국 탐험은 이제야 막 시작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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