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충무로 시나리오작가 8인 [2] - 이원재
2006-10-19
글 : 이종도
사진 : 오계옥
<혈의 누> <짝패>의 이원재 작가

술자리서 얻은 아이디어도 메모해 꿰면 보배

<혈의 누>와 <짝패>를 쓴 이원재 작가(<위대한 유산> 등을 쓴 이원재 작가는 동명이인이며 여러 데이터베이스엔 두 작가의 필모그래피가 뒤죽박죽되어 있다)는 어렸을 적 꿈이 발명가, 만화가, 추리소설작가였다. <혈의 누>에서 묵직한 역사적 상상력을 스릴러 장르와 버무리고 <짝패>에서 부동산 조폭의 흥망을 재기있게 가로지르는 능력을 보면 꿈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중학교 근처에 큰 비디오 가게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작가 대신 발명가를 얻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중2 때부터 가장 재미있는 영화가 자신의 길임을 ‘의심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어머니가 싫어해 연극영화과는 가지 못했다. 대신 영화의 본산인 프랑스, 남들도 영화 유학을 가는 프랑스에 가까운 공부를 하기로 했다. 불문과로 가서 친구 7명과 어울리며 단편영화도 만들고 ‘길거리에서’ 영화를 배웠다. 그러나 영화를 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돈이 가장 안 드는 게 뭘까. 그건 시나리오였다. 대학 4학년 겨울방학 때 학교 도서관에서 시나리오를 한편 쓰기 시작했다. “너무 B급이고 허접한 흡혈귀영화였다.” 마침 좋은영화사가 시나리오를 공모했다.

영화사는 이걸로 영화는 못 만들겠지만이라며 말꼬리를 흐렸지만 대신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해왔다. 이 작가는 좋은영화사에서 2개의 각색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그는 나중에 <여선생 vs 여제자>도 썼다). 그러나 두 영화는 모두 엎어진다. 이 경험이 그에게는 소중한 배움의 기회가 됐다. “내 아이템이 아닌 걸로 써보면서 수정을 어떻게 하는지, 영화계 생리는 뭔지 내 것을 지키면서 다른 의견을 포함시키는 방법도 알게 됐다. 두 작품을 하는 1년이 내게는 습작기간이라 생각한다.” 더구나 ‘습작’을 하는데도 진행비와 용돈을 받아가면서 했다는 게 행운이었다.

물론 작품이 엎어진다는 게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궁지에 몰리면서 그는 영화사로부터 내침을 받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스릴러를 좋아한다니 스릴러 한편 써보라는 제안을 했다. 그리고 김미희 대표는 <아랑은 왜>라는 소설을 주면서 사극추리물은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시놉시스를 써서 보여준 게 바로 <혈의 누>였다. 천주교 성지에서 접했던 끔찍한 형벌들 그리고 TV에서 본 <무원록> 관련 다큐멘터리 등 그동안 ‘키프’해놓은 아이템들을 조합해 쓰기 시작했다.

이 작가는 아이디어는 사방에서 온다고 믿는다. 영화, 책, 만화의 주변부 캐릭터들, 신문의 사건사고란, 술자리 얘기 등 직·간접 경험들을 주위 사람들과 브레인스토밍하다보면 특이한 생각들이 떠오른다. 이런 아이디어를 메모로 옮기는 건 필수다. 예전 무명작가 때는 술자리에서도 메모를 하노라면 민망했지만 이제는 다행히 메모하는 걸 봐도 주위에서 자연스럽게 여긴다. 메모가 기획감이면 가제를 붙이고 노트북 다이어리 프로그램에 가나다순으로 정열시킨다. 기획한 영화들을 쓸 때 막히면 이런 방식으로 모아놓은 대사와 캐릭터 장르 폴더를 열어본다. 여러 메모와 아이디어들이 조합되면서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것이다.

시나리오 훈련법으로 그가 드는 건 신 차트 만들기다. 영화를 보면서 ‘통으로’ 신과 신 내용을 볼 수 있는 차트를 만드는 것이다. 이야기의 전환과 캐릭터, 플롯, 시퀀스 전체가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시나리오 쓰기의 원칙은 ‘초고는 빨리 마음으로, 재고는 머리로’다. “초고 때 헤매서 끝까지 못 가는 경우가 많은데 초고는 말 그대로 영화화 안 되는 텍스트다. 초고를 우선 쓰고 그 다음 피드백이 중요하다. 작법서는 초고엔 도움이 안 되고 수정할 때 잊고 있던 걸 환기하는 데 쓴다. 초고는 빨리 써버리는 게 제일 좋은데 그래야 일관성이 안 깨진다.”

막힌 대목, 이렇게 뚫었다!

기본 설정을 뒤집었다

“<혈의 누>는 원래 섬 설정이 아니라 내륙이었다. 초고를 끌고간 이미지 두개는 혈우와 가문 논바닥의 시체 다섯구였다. 그런데 문제는 농민들이 광기에 휩싸여 범죄 공모자가 된다는 건데 그게 정서상 가능하겠느냐였다. 김성제 PD가 섬으로 가면 어떻겠느냐고 하더라. 섬에 가면 장르적 컨벤션, 고립감이 생기니까 좋았다. 우연히 일본영화를 봤는데 한지 가내수공업을 하는 공장장면이 재미있더라. 섬에서 제지업을 하는 걸로 하면 산업사회로의 변화지점도 잡을 수 있고 물질만능주의와 타락이라는 주제와도 어울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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