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련된 벽돌공처럼 튼튼한 이야기를 쌓는다
강제규 감독과 함께 쓴 <태극기 휘날리며> 그리고 김성수 감독의 20페이지짜리 트리트먼트를 기초로 했던 <야수>의 시나리오는 무엇보다 뜨겁다. 전쟁으로 상처입는 뜨거운 형제애가 있고 사회의 부조리함 또는 악함과 싸우려는 뜨거운 정의가 있다. 이 두편을 쓴 한지훈 작가는 실제로 호수 표면처럼 잠잠한 사람이다. 그는 시나리오작가를 기능공에 비유했다. “기획영화가 많아지면서 그런 측면이 더 강화되는 것도 있지만, 제작사의 성향과 감독의 의도라는 게 있다. 그런 것에 최대한 맞추려고 하는 편이다. 작가 혼자 작업할 때조차 기능공의 마인드가 필요하다.” 그런 현실적인 태도 때문인지 그는 “스타일이 잘 맞는” 감독과 함께했던 <야수>에 대해서도 스스로 객관적인 판단을 내린다. “유강진(손병호)의 캐릭터가 다소 진부하지 않았나 싶다. 악의 화신으로만 그려졌던 것이 아쉽다. 피의자 사망사건으로 형사 장도영(권상우)과 검사 오진우(유지태)가 법정에 섰을 때 오진우가 법과 정의를 강조하는 대사를 길게 하는데, 그게 실제 사건을 소재로 끌어왔기 때문에 당시 검사가 실제로 했던 말이긴 하지만 쓰면서는 조금 낯간지러웠다. 실제 사건 자체는 양면으로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했고.”
차분하고 냉정한 그의 성향은 본래 언론쪽에 마음을 두었던 그의 꿈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사춘기 시절 영화를 보러다니면서 홍콩, 중국, 대만 뉴웨이브 등 유독 중국문화권 영화에 끌렸더랬다. “그쪽 영화를 전공으로 하는 비평가가 되려고 중문학을 택했다. 그쪽 언어, 사회, 문화, 역사를 알고 나면 아무래도 도움이 될 테니까. 근데 그 외에도 공부가 엄청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선 포기하고 학업을 게을리했다.(웃음)” 군 제대 뒤 충무로 시나리오 작가교육원 광고를 보고 기초반에 등록했다. 재미를 느껴 수료까지 하고 천리안을 통해 송지나 작가의 팬사이트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작가를 지망해 모인 사람들끼리 습작을 올리고 문답해주는 곳이었는데 그때 송지나 작가의 눈에 들어 드라마 <카이스트> 작가에 합류한 것이 커리어의 시작이다. 이후 <러브스토리>라는 옴니버스 드라마에 참여했고, 장윤현 감독이 2년여 준비했던 SF <테슬라>의 각본을 쓰다가 <태극기…>에 합류하면서 정식 필모그래피가 시작됐다.
시나리오를 쓰는 원칙 또는 철칙에 대해 그는 할 말이 없다며 긴 여백을 두었다. “작법에 관해 드러낼 말은 딱히 없고 기본적으로 드는 생각은, 오래 버텨야 한다는 거다. 젊은 나이에 혜성같이 등장해서 멋지게 커리어를 쌓아나가는 사람들은 극소수다. 대부분은 오래 버티는 작가가 평가받는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시나리오라는 글은 무엇일까. “단정짓기가 쉽지 않다. 노동 아닐까. 나는 영감이 확 떠오른다거나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던진 것에서 돌파구를 얻은 경우가 없다. 벽돌 쌓는 것처럼 노동자의 정신으로 일을 하는 것이 시나리오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잘 썼다고 생각되는 시나리오를 묻자 “글쓰는 사람들이 원래 남의 글을 별로 안 좋아한다”며 웃더니 <공공의 적>을 든다. 이유는 “오직 캐릭터 때문”. “오직 캐릭터다. 캐릭터만 살아 있으면 인물이 밥만 먹고 이만 쑤셔도 말이 된다.” 그래서일까. 그는 기발한 이야기에도 큰 욕심이 없다. 익숙한 이야기 구조 안에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 그의 긴 바람이다. “대박보단 중박으로 오래 가고 싶다는 뜻”이라며, <태극기…>를 공동작업했던 김상돈 작가와 다시 뭉친 <소년은 울지 않는다>의 시나리오가 끝나면 인생이 남들보다 한 박자 느린 굼뜬 사기꾼들에 관한 소품을 쓸 거라고 그는 다음 계획을 조용하게 밝혔다.
막힌 대목, 이렇게 뚫었다!
맨 처음 구상으로 돌아가본다
“<야수> 시나리오를 쓰면서 유강진의 메모지(친구 박용식을 죽이라고 제 부하들에게 지령을 내리는 메모)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를 두고 고민이 정말 많았다. 유강진을 잡아넣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니까 중요한 장치이기는 한데 그 메모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오픈되는 순간 만사형통? 그런 결말도 써보긴 했다. 장도영이 주희(엄지원)에게 쪽지를 받아 법정에 ‘짠!’ 들고 나타나서 오진우는 풀려나고 유강진은 잡히고. 그러나 그건 아니다 싶었다. 오진우는 더이상 현역 검사도 아니고, 장도영이 깡패일 때도 그렇게 당했는데 이젠 그가 의원 출마할 사람이 됐으니 오진우가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봤다. 쪽지는 맥거핀으로 남기자고 합의를 봤다. 맨 처음 잡아놓았던 구상대로, 주인공은 실패하도록 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