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은 접어두고, 끝없이 달리고 달린다
정서경 작가는 4년 전 예비 감독으로 <씨네21>과 인터뷰를 했다. 영상원 시나리오과 3학년 때 쓴 <전기공들>이 코닥 단편영화 제작지원 선정작으로 뽑혀서다. 필름 맛을 봤으니 지금쯤 충무로에서 감독 데뷔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터인데 전업 시나리오작가라니. 작가 출신 감독들이 속속 데뷔하는 걸 보면, 잠시 택한 우회로인가. “감독은 애초 생각이 없었다. 사실 학제가 바뀌어서 영화를 만들어야 졸업이 가능했다. 그래서 낸 건데 덜컥 됐다. 촬영 첫날 어떻게 슛을 부르는지, 언제 컷하는지도 몰라서 스탭들한테 눈총받았다. 한컷 찍고 20분 쉬다가 촬영감독한테 욕먹고, 화장실에 갔는데 목 매달고 싶더라. 정말이지 돈 주고 감독을 사고 싶었다.”
이후 메가폰을 다시 들지 못했지만, 그는 이제 꽤 유명한 시나리오작가다. <모두들, 괜찮아요?>로 충무로에 발디딘 뒤, <친절한 금자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등 박찬욱 감독과 내리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다. 본인은 “‘너나 잘하세요∼’를 포함해 관객이 기억할 만한 대사들은 모조리 감독님 아이디어”라고 심드렁하지만, 이쯤 되면 ‘박찬욱 전속작가’라는 세평이 틀린 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모든 게 꼭 같진 않았다. 일테면 모든 장면에서 퀴즈를 내고 싶어하는 감독님의 방식이 관객에게 쉴 타임을 줘야 한다는 내 입장에선 부담스러웠다.” 물론 그는 이미 중독 상태다. “어느새 내가 감독님처럼 끝 모르고 달리는 폭주형 작가가 되어 있더라.”
시나리오는 고치는 게 훨씬 낫다. 고민하는 동안 한줄이라도 쓰는 게 낫다. 막히면 1신부터 다시 쓰면 된다. 박찬욱 감독에게서 실전 작법을 배웠다면, 홍상수 감독에게선 태도를 깨우쳤다. “영상원 1학년 강의 때 매번 그러셨다. 어차피 너희들은 시나리오 못 쓴다. 써도 걸레다. 그러니 빨리 끝내는 게 중요하다.” 이 말을 듣고 그는 동급생 중 가장 빨리 시나리오를 써서 제출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매질을 당했다. “감독님은 싫은 이야기 하실 때 영어로 하신다. 내 시나리오는 ‘pretencious’였다. 젠체하지 말라면서 아예 다른 걸로 새로 쓰라고 하셨다. 처음엔 수강생 모두 영어로 욕 먹은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더라. (웃음) 그때까지 젠체하는 삶을 살고 싶어 안달했구나 깨달은 순간이었다.”
혹독한 매질 자국이 아직도 욱신거려서일까. 그는 자신의 삶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런 식이다. “원래 꿈이 뭐였나?” “수녀.” “왜?” “옷이 예쁘잖나. 게다가 유니폼을 좋아한다.” 서울대 철학과를 중도 포기한 이유를 물었더니 또 이런다. “남들 취직 걱정하는데 난 졸업 걱정하더라.” 도피처로 영상원을 택한 까닭은. “수능 다시 보기 싫어서.” 시나리오과를 점찍은 건 “배우면 뭔가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얄라셩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뒤늦게 연락했더니 잘라 말한다. “출신이라고 하기도 뭣하다. 남친 얻고 곧바로 탈퇴했으니까. 고민하는 분위기가 싫어서 영화동아리를 찾았는데, 거기도 영화는 안 찍고 고민만 하더라.” 그러니 잉마르 베리만과 아벨 페라라와 로만 폴란스키와 스탠리 큐브릭에 빠져들었던 시기를 물어 뭣하랴.
잠시 임필성 감독의 <악의 꽃> 시나리오를 쓴 다음 다시 박찬욱 감독의 신작 <박쥐>에 매진하고 있는 그는 아직 좋은 시나리오가 무엇인지 말하진 못하겠다면서 다만 입문자들에게 일기를 써보라고 권한다. “일기를 쓰면 자신과 주변에 대해서 객관적인 거리를 갖게 된다. 웃기고 황당한 일들이 주변에 널려 있는 것도 알게 될 거고. 끊임없이 친구들과 떠드는 것도 좋은 연습이다. 상상의 세계라고 할지라도 떠들다 보면 현실감이 느껴질 것이다.” 13년간 교도소에서 머물다 나온 금자를 만났고, 자신이 사이보그라 여기는 정신병원 소녀를 만났고, 그리고 남은 게 뱀파이어라니. “판타지일지라도 이젠 좀더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인물들과 상황들을 좀 맛보고 싶다”는 그는 당분간은 혼미한 세계를 계속 들락거려야 한다. 어쩌면 그는 매일 아침 주문처럼 자문할지 모르겠다. “정 작가, 괜찮아요?”
막힌 대목, 이렇게 뚫었다!
낯선 인물과 상황에 빠져들게 하는 주문이 필요하다
“아무래도 영화사나 감독으로부터 아이디어를 받은 뒤 시나리오를 쓰기 때문에 좀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주어진 인물이나 상황에 젖어들기가 쉽지 않다. 내 경우엔 처음엔 낯선 인물과 상황에 빠져들기 위해서 주문 같은 게 필요하다. 주문이라고 해서 별건 아니고. <친절한 금자씨>의 경우는 금자가 교도소에서 기도하기 좋은 곳이라며 간증하는 장면의 대사를 쓰고 나니까 수월해졌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경우엔 영군의 이모가 부르는 노래가 그랬고, 3번째 도전하는 <박쥐>의 경우 신부가 성 프란체스코 기도처럼 읊는 게 있는데 그걸 해결했더니 진도가 나간다. 그런 주문들은 나를 구원하는 일종의 노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