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의 양해훈 감독
2006-12-06
글 : 이영진
사진 : 이혜정
살벌한 성장통 뒤의 지독한 상실감

제휘는 좀처럼 바깥나들이를 하지 않는다. 어둑컴컴한 방 안에만 머문다. 식사도 방 안에서 혼자 해결한다. 그의 유일한 대화 상대는 인터넷이다. 그런 제휘에게 장희가 다가온다. 제빵부터 용접까지 모든 자격증을 손에 넣은 독특한 그녀는 제휘에게 관심을 보인다. 처음엔 마다하지만 제휘 또한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제휘가 조금씩 변화를 보이기 시작할 무렵 고등학교 동창인 표와 그의 연인 로미가 나타난다. 표는 과거 제휘를 괴롭히던 덩치. 제휘는 졸업 뒤 만난 표에게 또다시 구타와 모욕을 당한다. 표를 피해다니던 제휘는 장희가 보는 앞에서 체면을 구기게 되고, 결국 인터넷 너머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한다.

“제목만 보면 동물영화 같다. 사실 그 치타가 아니라 타잔의 곁에 따라다니는 치타라는 뜻인데.” 양해훈 감독의 익살스러운 소개와 달리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는 살벌한 성장영화다. 죽을병이 걸렸다면서 병원을 들락거리는 병철은 초라한 치타 꼴이 된 제휘의 사연을 듣고서 표를 납치한다. 제휘는 표를 풀어달라고 하지만, 병철은 이미 납치 과정에서 또 다른 누군가를 살해한 뒤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며 병철은 제휘 또한 잡아들이고, 병철의 위협에 떠밀려 제휘와 표는 재갈을 문 채 시체를 끌고 야산을 오른다. 영화는 관심을 끌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외로운 존재들이 선혈 낭자한 저수지에 빠져드는 과정을 숨막히게 뒤쫓는다.

“관객과 오래 대화하고 싶었다. 단편영화의 유일한 창구는 영화제다. 영화제에서 단편영화들은 대개 묶어서 상영된다. 관객과의 대화도 여러 명의 감독들이 함께한다. 관객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고 싶은 욕망 때문에 장편을 만들었다.” 이런 별난 계기가 한편의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는 꽤나 복잡한 화학작용이 필요했다. 그는 먼저 사회적 이슈를 끌어모았다. 대구지하철 참사를 모티브로 한 <실종자들>을 비롯해 <바람> <견딜 수 없는 것> 등과 같은 전작에서 그러했듯이 말이다(전작들에서 그는 민제휘라는 극중 인물의 이름을 빌려 썼다). 왕따와 인터넷 심판이라는 사회적 현상을 빌려왔고, 제휘와 표 같은 인물들은 자신의 경험과 기억들을 빚어 만들었다. “군대에 있을 때 고문관 후임병이 있었다. 제대 뒤에 그와 교회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는 너무 반가워하는데 난 죄책감이 밀려오더라.” 여기에 루이스 브뉘엘의 <잊혀진 사람들>을 보고나서 떠올렸던 “버려지는 존재의 느낌”까지 보태려 했다.

성장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저수지에서…>에서도 되돌리기 싫은 끔찍한 고통이 여러 번 등장한다. 단, 허우적대는 인물들을 구원하기 위해 영화가 “기적적인 순간”들을 친절하게 마련해주진 않는다. “대개의 성장영화들은 어떤 사건을 겪은 뒤에 훌쩍 컸다고 믿는 식이다. 그런데 내 경우엔 성장에는 상실이 뒤따른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연쇄적인 극적 장치들을 끌어온 것도 그런 성장 이면의 상실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다.” 영화 속에서 제휘는 과거의 어떤 관계를 복원할 수 없다. 그가 되찾으려 해도 이번엔 사회적인 시스템이 막아선다. 치타는 결국엔 저수지에서 건져지지만, 오슬오슬한 공포 혹은 상실감은 평생 떼낼 수 없다.

<저수지에서…>는 배우들의 생생한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다. 주인공 제휘 역의 임지규는 “대사가 있는 연기는 처음”인 초보 연기자였다는데 어떻게 가능했을까. 양해훈 감독이 쓴 방법은 즉흥연기 추출. “콘티도 없었다. 카메라가 따라갈 테니 컷 부르기 전까지 배우들에게 자유롭게 연기하라고 했다. 대사도 촬영 당일에 만들어서 줬다. 심지어 배우들에게 서로 다른 대본을 준 적도 있다.” 몰래카메라 같은 느낌으로 접근하다 보니 미묘한 눈동자 떨림까지도 잡아낼 수 있었다는 그는 외려 이러한 즉흥연기 요구가 촬영현장의 긴장을 한껏 높여줬다고 전한다. 한때 배우를 꿈꿨던 그의 이력과 관심이 연출로 돌아선 뒤에도 플러스로 작용한 것일지 모르겠다. “TV 스타가 되려고 서울예대 관련학과에 연기전공으로 들어갔는데 초반부터 적응을 못했다. 그래서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8mm카메라 들고 화장지에 쪽대본 써가면서 장난치다 보니 지금까지 왔다.”

느긋하게 영화제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감독들과 달리 그는 후반작업을 끝내지 못해 개막 직전까진 <저수지에서…>에 올인해야 하는 상황이다. “소니에서 운좋게 HD 현물지원을 받았다. 그걸 빼고 3천만원 정도를 들여 찍었는데. 겨울장면을 빨리 찍어야 해서 프리 프로덕션 기간이 거의 없었다. 급히 촬영하는 바람에 손볼 데가 많다. CG로 저수지 장면에 구름도 깔아야 하고.” 물론 그 뒤로도 할 일이 태산이다. <브라질에서 온 산시로>라는 제목의 부조리 희곡을 먼저 쓸지, 이미 찍어놓은 <기브스>라는 6분짜리 단편을 편집할지, 아니면 이미 써놓은 10개 정도의 시나리오 중 하나를 영화화할지 아직 결정을 못했다고. 물론 행복한 고민이고 지겹지 않은 일복이다. “오랫동안 함께해온 스탭들과 앞으로 계속 작업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근데 나랑 계속 같이 할지는 의문이다. 이번에도 꼬여서 겨우 붙잡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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