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찬 감독의 <로마빵집의 휴일>은 <소름>과 함께 준비됐다. 데뷔 당시 그가 준비한 이야기는 세 가지. 심리공포에 가까웠던 <소름>, 누아르풍의 폭력물, 그리고 멜로 성향이 짙은 <로마빵집의 휴일>. “세 이야기는 장르적 차이는 있지만 주제적 측면에서는 하나로 관통된다”는 윤종찬 감독은 <로마빵집의 휴일>과 재회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왔다. 그는 대작 <청연>을 끝낸 뒤 <인간극장>을 원안으로 한 <친구와 하모니카> 시나리오 집필에 한동안 매진했다. 그러나 <친구와 하모니카>는 자신이 직접 쓴 시나리오도 아니었고 촬영환경과 이야기 구성의 어려움이 겹쳐 난항을 계속한다. 고심 끝에 윤종찬 감독은 가슴에 품었던 <로마빵집의 휴일>을 꺼내어 차기작으로 결정한다. 그가 수년 동안 반복해서 찾아갔던 강원도 철암의 공간적 아우라가 이러한 결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윤 감독이 강원도 철암을 처음 방문한 건 <소름>을 끝낸 직후였다. “개천을 따라 몇 십년에 걸쳐 조성된 마을이다. 탄광촌의 호시절이 지나고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린 곳. 마을 사람들이 들으면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추락의 기운이 동화적인 공간을 만들었다”고 윤 감독은 말했다.
<로마빵집의 휴일>은 “버려진 공간에서 살아가는 버려진 자들의 사랑 이야기”다. 1년 동안 병원 신세를 진 건달 영식은 이미 조직에서 버림받은 찬밥 신세다. 자신의 병원비를 대느라 가족들은 컨테이너에서 사는 초라한 처지. 식당을 하는 어머니, 정신지체 증상이 있는 친형 상식은 영식에게는 그저 부담스러운 짐일 뿐이다. 그러던 영식은 어느 날 기억을 잃어버린 수영과 길에서 마주친다. 성폭행을 당하고 버려진 수영은 어쩔 수 없이 영식의 가족과 함께 살게 된다. 수영이 나타나면서 어머니를 비롯한 영식의 가족들은 조금씩 삶에 대한 의지를 되찾는다. 하지만 그녀의 잔인한 기억이 돌아오는 동시에, 참혹한 현실이 그들을 덮친다.
윤종찬 감독의 영화는 대체로 “인간의 근본적인 불완전함”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소름>의 선영(장진영)과 용현(김명민)이 사람을 죽이는 건 “자신들의 심리에 내재된 두려움과 공포가 빚어낸 결과”다. 윤종찬 감독은 “<소름>이 그러한 불안정함에서 비롯된 부작용을 중심으로 한 영화라면 <로마빵집의 휴일>은 동일한 불안정함을 통해 얻어지는 삶의 치유와 긍정적 방향을 다뤘다”고 말한다. 시나리오 겉장에 쓰여진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돌이킬 필요가 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문구는 이인성의 소설 <낯선 시간 속으로>에서 인용됐다. 소설이 과거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끈질긴 의지를 그리듯이 <로마빵집의 휴일>도 “삶이란 견뎌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로마빵집의 휴일>은 제목에서도 그러한 “삶의 불균질함과 어려움”이 그대로 드러난다. 윤 감독은 “사실 ‘로마의 휴일’이라는 로맨틱한 제목은 콜로세움에서 60만명이 죽는 혹독한 대가 이후에 얻은 값진 휴식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실처럼 가느다란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 끔찍한 과거와 현실을 견뎌내는 대가를 치르고 얻은 안도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암시한다.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싶은 절망을 겪은 두 사람이 가판대에서 빵이라도 팔면서 새로운 삶을 생각할 수 있는 국면을 맞이하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로마빵집의 휴일>은 상대의 숨겨진 과거가 밝혀진 뒤에도 처음 가졌던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유효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시나리오 구조로 보면 <로마빵집의 휴일>은 “관객에게 판단의 여지를 남기는 여백이 많은 영화”다. “여주인공의 비밀스러운 과거가 밝혀지는 순간에도 미스터리를 다루는 장르영화에서 사용하는 흔한 반전은 없다”는 윤 감독의 말처럼 <로마빵집의 휴일>은 장르영화의 문법에 쉽게 기대지 않는다. “단기적으로 권선징악을 구분하는 장르적 판단보다는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리얼리티를 끈질기게 추구하는 방식이 연출자 입장에서도 색깔과 깊이를 얻을 수 있는 시도”라고 윤 감독은 이유를 밝혔다. “무엇을 빼앗기면 복수하고 결국은 그것을 회복하는 관습적 기승전결을 따르지 않는” <로마빵집의 휴일>의 이야기 구조에는 “선악의 기준을 미리 정해두고 감독이 전지적인 관점에서 이야기에 개입하는 일을 최대한 배제”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배어 있다. <로마빵집의 휴일>은 “인간과 인간이 사회적 굴레를 벗어나 맨몸뚱이로 만나는 순간”을 포착하려는 영화다. 일상에서 누리던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영식은 자신이 처한 비참한 현실에 괴로워한다. 영식과 마주친 그녀는 기억을 잃어버린 낯선 상황에서 자신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기억을 되찾는 순간 더 참혹한 자기혐오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사회적 지위가 해체된 상황에서 두 사람은 더이상 잃을 게 없기 때문에 반대로 순수하게 서로를 대할 수 있다. 세간에서 말하는 지위, 물적 기반, 환경은 애당초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거나 최악이다. 이해관계를 논외로 한 그런 상황에서 인간관계의 본질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는 영화”라고 윤 감독은 말했다. <로마빵집의 휴일>은 2월쯤 촬영을 시작할 계획이다. 윤종찬 감독은 “주요한 공간인 식당, 카센터, 들길 등은 모두 실재한다. 거의 모든 촬영은 철암에서 소화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통념적으로 사람들이 상상하는 가라앉고 무거운 공간으로 그리지는 않겠다. 숨이 턱턱 막히는 삭막한 배경이라도 정겨운 삶의 모습이 담긴 화면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윤 감독은 <로마빵집의 휴일>을 통해 “사랑은 서로를 구원해줄 힘을 가질 수 있는 존재다. 한편으로는 ‘과거는 적당한 시간이 되면 마음에서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삶은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하니까”라고 출사표를 던졌다.
윤종찬 감독, 멜로영화와 만나다
<소름>에도 <청연>에도 멜로 코드는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두 영화의 사랑은 참혹한 파국을 부르고 주인공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운명의 저주’처럼 작용했다. <로마빵집의 휴일>도 인물들을 쉬이 사랑할 수 있는 평탄한 조건을 가진 이야기는 아니다. 동료 건달에게 삶의 터전을 위협받고 내버려진 영식과 기차길 건널목에 몸을 내던지려 했던 과거를 가졌던 그녀가 어떻게 사랑할지는 온전히 윤종찬 감독의 손길에 달렸다. “<소름>과 <청연>의 사랑이나 이성적 관계는 부수적인 요소였다면 <로마빵집의 휴일>에서는 두 인물의 사랑이 이야기의 전부”라고 윤 감독은 설명했다. <로마빵집의 휴일>이라는 제목으로만 유추해도 <소름> <청연>처럼 참혹한 결말로 마무리될 것 같지는 않다. 윤 감독은 “이야기가 관습적이지 않듯 ‘얼짱’들이 만나야 꼭 연애담이 아니라는 걸 보여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주인공은 다소 엉뚱한 성격이 강한 백치미가 있는 캐릭터로 표현될 가능성이 높다. 멜로영화라는 장르적 특성을 감안하면 <소름> <청연>에서 윤 감독의 페르소나로 열연했던 장진영이 이번에도 다시 기용될 것인가도 관객에게는 흥미로운 관심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