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혈의 누> <가을로> 김대승 감독의 신작 <연인>(가제)
2007-01-09
글 : 문석
사진 : 오계옥
50, 시간의 나이테가 품은 사랑의 숨결

김대승 감독의 신작 <연인>(가제)이 펼쳐놓는 상황은 대략 이렇다. 30년 이상을 함께 살아온 50대 부부가 있다. 어느 날 남편은 아내가 암이라는 통보를 받는다. 그리고 그녀가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제야 남편은 상상조차 한번도 하지 않았던 그녀의 부재를 떠올리고 슬픔에 빠진다. 잠깐, 여기서 굳이 감독의 이름을 다시 확인할 필요는 없다. 맞다, 김대승. <번지점프를 하다> <혈의 누> <가을로>를 만든 그 감독 말이다. 당신이 이 시놉시스와 감독의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면 그 이유도 알 만하다. 그의 전작은 모두 멜로영화에 해당하지만 빙의와 동성애, 시대물과 스릴러, 거대한 재앙에 대한 기억 등의 이질적인 코드를 엮어놓은 독창적인 멜로였다. 그런데 TV단막극을 떠올리게 하는 이런 이야기 틀이라면 결국 신파 멜로영화 외에 갈 길이 있을까.

“이건 누가 봐도 신파잖나.” 김대승 감독은 이 조심스러운 예측에 쐐기를 박는다. 하지만 똑같이 시한부 인생과 그것을 바라보는 상대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사랑의 스잔나>나 <라스트 콘서트>와는 다르다”고 말하는 데는 분명 감독의 또 다른 야심이 있을 터. 게다가 50대 중반을 훌쩍 넘긴 남녀의 사랑이라니, 그의 본심이 궁금하다. “만약 야릿야릿한 20대 인물들의 신파였다면 연출을 맡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스무살짜리의 사랑이 뭐 그리 깊을까. 당장은 죽을 것 같아도 돌아서면 금세 잊을 것이다.” 그들의 사랑 이야기라면, 그 얄팍한 사랑을 깊은 것처럼 꾸며야 하므로 신비화할 수밖에 없고, 결국 리얼리티와 동떨어진 판타지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얘기다. 거꾸로 말하면 그가 이 프로젝트를 선택하게 된 것은 신비화할 것도, 판타스틱할 것도 없는 중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30년 이상 부부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뭐 새로운 게 있겠냐. 그러나 그렇게 무덤덤하게 살던 사람들이 뭔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면서 켜켜이 쌓아온 세월이 사랑으로 치환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깊은 사랑이겠냐.”

하긴 오랜 세월 속에 쌓인 정(情)이라는 이름의 심심한 감정이 어느 순간 농밀한 사랑의 감정으로 바뀐다면 그 폭발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김대승 감독이 <연인>이란 프로젝트에 임하는 전략은 시간의 나이테가 품은 애정의 수액을 모아 출렁이는 사랑의 물결로 전환시키는 것이요, 그것이야말로 진정 현실 속의 사랑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밋밋한 감정이 알고 보니 사랑이었노라’라고 무턱대고 우길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김대승 감독은 영화적 장치를 통해 이를 해결하려 한다. “결국 남편이 느끼는 그 감정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계기가 필요한데, 그것은 판타지가 될 수도, 플래시백이 될 수도, 아니면 하룻밤의 꿈이 될 수도 있다.” <번지점프를 하다>에서는 빙의라는 설정을 통해, <혈의 누>와 <가을로>에서는 플래시백과 현재 장면의 편집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공존시켰던 그는 이번 영화에서 좀더 과감한 시간의 실험도 생각하고 있다. “생각대로만 된다면 품격을 지키면서도 감정적으로는 힘있는 영화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신파라고는 해도 인물에 카메라를 뻔뻔하게 들이대거나 하지는 않을 계획이다.”

이처럼 깊은 고민을 하는 단계까지 왔지만, 사실 김대승 감독조차 자신이 네 번째 영화로 멜로 장르를 택할 줄은 몰랐다. “누군가 정말 괜찮은 조폭영화가 있으면 내게 주고 싶다고 한 적도 있고, 스스로도 액션이든 뭐든 다른 장르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을로>가 뜻대로 만들어지지 않으면서 그의 고민은 자신이 만든 기왕의 영화들로 향했다. “지금까지의 내 영화는 서사에 눌려 인간이 안 보이는 영화였던 것 같다. 이를테면 <혈의 누>도 사건을 줄이고 구성을 단순화했다면 차승원과 박용우가 변화해가고 갈등하는 모습이 더 잘 보였을 거다.” 그러던 차에 받은 <연인>의 시나리오는 그에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굉장히 단순한 이야기 구성을 보며 그는 오히려 이 여백에 그동안 미진했던 캐릭터라는 요소를 채워넣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배우들에 큰 신경을 쓰는 것 또한 그 때문이다. 중년 연기자들이 한정돼 있다 보니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는 게 고민이지만 밀도 높고 무게있는 연기가 뒷받침만 된다면 영화 또한 리얼리티라는 날개를 달 수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그 캐릭터를 드러낼 수 있는 ‘그림’을 찾는 것 또한 중요한 과제다. “오래된 한옥집에 걸레질을 하도 많이 해 반짝이는 마루라든가, 녹슨 철대문이 달린 양옥집과 먼지가 허옇게 내려앉은 유리창이라든가, 그런 삶의 디테일이 결국 이들의 지난 세월을 이야기하는 것 아닐까.” <가을로>에서 보여진 풍광이 인간의 깊은 상처를 무화하는 자연의 거대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었다면, 이번 영화의 공간은 부부가 지나보낸 오랜 세월과 그 안에 응축된 정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때문에 그는 헌팅이야말로 이 영화에 생명을 불어넣는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시나리오를 완결짓는 일에 앞서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촬영지를 물색하려는 것도 그만큼 공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그는 촬영지를 정한 뒤 거기에서 영감을 받아 시나리오를 구체화하는 임권택 감독의 제자 아닌가.

그런데 마지막으로 드는 의문 하나. 만약 모든 게 자신의 뜻대로 된다 해도 과연 김대승 감독은 50대를 내세운 ‘신파’ 멜로가 흥행에서도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진정성이 담겨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오히려 트렌디한 영화보다 더 잘될 수 있지 않을까. 관객이 영화 보고 나와서 막 울면서 ‘영화 너무 후져요’라고 말할 것 같은 자신감(웃음)도 없진 않다.”

김대승 감독, 오기민을 만나다

“<가을로>를 겪고 보니 믿을 만한 제작자와 일하고 싶었다.” 김대승 감독에게 <가을로>는 일종의 전투였다. 이 영화 촬영 중반 이후 그는 사사건건 제작자와 부딪쳤다. 하지만 그와 스탭들이 생각했던 여러 구상은 제작자에 의해 규모가 작아지거나 계획 자체가 없어져야 했다. “비겁한 변명인지 몰라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었기에 <가을로>에 관해선 아쉬움과 회한이 더 크다.” 그것이 누구의 잘못이건, 결국 개봉 뒤 소송까지 가는 불행한 협업을 경험한 그의 소망은 “딴 데 신경 안 쓰고 일만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제작자와 만나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마술피리·아이필름의 오기민 대표가 함께 작업을 하자고 제의했다. “항상 바르게 살아가려는 모습을 보여줘 신뢰해왔던” 오 대표의 제안을 그가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애초 오 대표가 그에게 제안했던 작품이 상당히 규모가 큰 역사물이었다는 점이나 시간이 너무 걸리는 탓에 일단 미뤄놓은 채 대신 선택한 <연인>이 오 대표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라는 점을 고려하면, 오기민 대표의 김대승 감독에 대한 신뢰 또한 적지 않은 듯하다. 김대승 감독이 표정과 말투에서 내비친 자신감도 “믿을 만한 제작자”와의 결합에 대한 만족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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