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용서받지 못한 자> 윤종빈 감독의 신작 <비스티 보이즈>(가제)
2007-01-09
글 : 문석
사진 : 오계옥
강남 호스트바의 일그러진 욕망

<용서받지 못한 자>를 개봉시킨 이후 윤종빈 감독의 머릿속에는 ‘서울, 그리고 강남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과 ‘돈, 자본(주의), 계급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막연하게 맴돌았다. 쉽게 얽힐 것 같았던 이 두 이야기는, 하지만 서로 궤도가 다른 위성처럼 좀처럼 결합되지 않았다. 폭넓게 소통할 수 있고 색다른 재미를 주는 영화가 뭐 없을까, 고민하던 그는 고향인 부산의 한 친구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이른바 ‘호빠’, 즉 호스트바에서 ‘마담’으로 일했던 그 친구의 생생한 이야기를 그의 뇌가 되새김질한 것이다. 특히 그의 촉수를 잡아당긴 것은 ‘일을 해서 돈을 벌려는 게 아니라 일을 통해 여자를 꼬여 빌붙어살려 한다’는 호스트들의 삶의 방식이었다. 호스티스들은 술을 마시건 몸을 이용하건 일을 해서 돈을 벌지만, 그들을 주고객으로 삼는 호스트들은 호스티스들을 상대로 착취해서 살아간다는 그들의 현실은 그가 고민하던 두개의 축을 하나로 엮어줄 것 같았다. “지금 서울 강남의 핵심은 엔터테인먼트, 이른바 화류계 아닌가. 이 소재는 이와 가장 근접한 것 같았다. 그리고 돈에 대한 욕망이나 우리의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설득력있는 이야기를 펼칠 수 있을 듯 보였다.”

부산 친구를 통해 서울의 한 호스트바를 소개받은 윤종빈 감독은 그곳에 ‘위장취업’해 한달 동안 웨이터로 지냈고, 그렇게 친해진 호스트바 식구들을 상대로 다시 한달 동안 취재를 벌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비스티 보이즈>(가제)의 시나리오 초고였다. 얼마 뒤 호스트바의 세계를 다룬 인터넷 소설 <화류계 일기>를 접하게 된 그는 저자로부터 원안을 사들여 생생한 에피소드와 캐릭터 일부를 녹인 시나리오 두 번째 원고를 완성하게 된다. 그것이 지금의 <비스티 보이즈>의 큰 골격인 셈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군대를 막 제대한 승우다. 잘생긴 외모와 세련된 매너를 갖춘 호스트계의 샛별 승우는 서울 강남의 한 호스트바에서 일하면서 자카르타로 떠나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차곡차곡 돈을 모은다. 하지만 호스트 생활에 점차 젖어가던 그는 지원이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지면서 서서히 나락으로 떨어져간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짐작할 수 있는 바는 머지않아 누군가의 배신이 자행될 것이며 곧이어 복수가 뒤따르리라는 점. 그러고 보면 이 영화에 대해 제작사인 청어람이 ‘열혈 청춘 잔혹 멜로’라고 정리한 것도 그리 터무니없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비스트 보이즈>는 화려하지만 신기루일 뿐인 자본주의의 그림자와 끊임없이 갈구하지만 결국 닿을 수 없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 속 청춘들은 화려한 강남을 무대로 외제차를 끌고 고급 호텔을 들락날락하며 돈을 펑펑 뿌리는 꿈을 꾼다. 하지만 그들의 실제 삶은 비루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호스티스와 호스트들이 모여 사는 ‘선수촌’의 좁다란 일수방 또는 월세방에 기거하면서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몸을 내던진다. “80년대 서울을 그리는 소설을 보면 지방에서 온 주인공은 달동네에 모여 살지만, 요즘의 젊은이들은 강남의 그늘진 곳에서 살면서 다다를 수 없는 것을 욕망한다.” 하염없이 높은 꿈과 터무니없는 현실. 때문에 이들의 삶은 비열하다. “화류계 이야기인데, 호빠 애들은 도박으로 망하고, 빠순이들은 호빠 때문에 망한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는 관계인 것이다.” 그가 이 영화를 생각하게 된 데는 <용서받지 못한 자>를 끝낸 뒤 다시 보며 새삼 깊은 울림을 얻은 스코시즈의 <비열한 거리>의 영향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윤종빈 감독이 지속해온 남성성 탐구 작업의 맥락에서도 바라볼 수 있다. 단편 <남성의 증명>이 겉과 속이 다른 남성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용서받지 못한 자>가 군대를 통해 남성성을 사회적으로 재생산해내는 권력구조를 보여줬다면, <비스티 보이즈>는 자본과 남성성의 함수관계를 풀어낼 전망이다.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이른바 강한 남자가 되려면 권력이나 자본이 있어야 하는데 주인공들은 그것을 가질 수 없다. 자본주의란 삼각형의 꼭지점에 서고 싶지만 이들에게 그 기회는 원천봉쇄돼 있다. 그럼에도 아등바등하니 결국 그들의 구질구질하고 찌질한 속성이 드러나게 된다.” 여자에게 몸과 웃음을 파는 행동은 남성성의 계율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자본의 남성이 되기 위해 이들은 호스트로서의 삶을 멈출 수 없다. 주인공 승우 또한 극단적인 경상도 출신 마초지만 생존과 허망한 꿈을 위해 남성성을 접어야 한다. 이 이율배반과 자가당착의 세계야말로 <비스티 보이즈>가 바라보는 남성들의 진짜 세계다. 윤종빈 감독은 “내가 남자니까 남자가 얼마나 찌질하고 지저분하고 우스꽝스러운 동물인지 잘 안다. 남성을 불쌍하게 그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줘서 아예 남성들에게 기대를 안 걸게 하자”며 그가 남성성을 탐구 또는 폭로하는 배경을 설명한다.

<비스티 보이즈>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얼핏 선정적인 소재를 전시하기 위한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 또한 대상들에 대한 윤리적 거리를 놓고 고심 중이다. 게다가 90% 이상을 서울 강남에서 로케이션으로 촬영해야 하고, 승우 역에 소년 이미지가 강한 특급 스타 배우를 기용해야 한다는 일도 큰 고민거리다. 비중있는 조연인 재현 역의 하정우를 제외하곤 대다수 조연급 연기자를 영화에 한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은 신인급으로 기용하겠다는 계획 또한 풀어내긴 쉽지 않다. 그러나 “지금은 극소수가 고급 승용차를 타고 값비싼 와인을 마시고 하는 것에 대해 그 누구도 문제제기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그게 굉장히 낯설었고, 또 낯설게 보이도록 만들고 싶다”는 순수한 열정의 소유자 윤종빈 감독이라면 그런 고민 정도는 쉽게 극복해낼 것이다.

윤종빈 감독, 상업영화를 만나다

2005년 11월에 개봉한 <용서받지 못한 자>는 약 1만3천명의 관객이 들어 당시로선 ‘독립영화의 쾌거’로 평가받았지만, 윤종빈 감독은 가슴 한켠에서 맴도는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사회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건데 국민의 1%도 이 영화를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씁쓸했다.” 한국영화의 시스템상으로는 저예산영화를 볼 수 있는 관객이 한정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 윤종빈 감독은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상업영화 시스템 안으로 들어갈 것을 결심했다. ‘상업영화의 장에서 네가 하려는 것을 이루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제작사인 청어람 최용배 대표의 전폭적인 지지 등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있지만, 그런 그에게도 고민은 있다. “처음 시나리오를 썼는데 영화사에서는 드라마가 너무 불친절하다는 반응이더라. 결국 좀더 설명적으로 고쳤는데 답답한 게 있다.” 사실 첫 상업영화를 만드는 그의 고민은 ‘상업영화 풍토에 젖을지도 모른다’는 게 아니다. “하고 싶은 대로 영화를 만들지도 못했는데 대중과 소통도 안 되는 게 가장 겁난다.” 하지만 언제건 다시 독립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각오를 가진 그이기에 상업영화와의 만남이 그의 본질까지 바꿔놓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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