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하얀거탑>이 남긴 것
2007-03-20
글 : 문석
사진 : 오계옥

1월6일 시작한 MBC의 20부작 드라마 <하얀거탑>이 3월11일 주인공 장준혁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 <주몽>처럼 50%대의 시청률을 기록한 것도 아니고,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한 적도 없었지만 <하얀거탑>은 유난히 시끌벅적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수많은 매체가 <하얀거탑>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를 다뤘고, 인터넷의 게시판들은 주인공 장준혁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담은 글로 가득했다. 의학드라마라기보다는 정치드라마, 정치드라마라기보다는 한 인간에 대한 집요하고 냉정한 탐구에 가까웠던 <하얀거탑>이 남긴 흔적을 돌아본다. 아울러 야망에 불타는 인물 장준혁을 완벽하게 묘사한 김명민을 비롯해, 이선균, 김창완, 이정길 등 이 드라마에 격렬한 박동을 불어넣은 배우들의 인터뷰와 소설가 정이현과 전 <한겨레21> 편집장 고경태의 <하얀거탑>에 대한 단상 또한 함께 싣는다.


장준혁이 죽.었.다. ‘장준혁은 죽지 않습니다’, ‘장준혁은 부활합니다’라며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린 네티즌의 애타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장준혁은 담관암이라는 병을 끌어안은 채 세상 밖으로 나갔다. 강인한 의지와 정밀한 현실감각, 영악한 잔꾀까지 갖춘 채 거친 장애물을 차례로 돌파하며 시청자에게 묘한 흥분감을 전해줬던 장준혁의 사망은 곧 드라마 <하얀거탑>의 종언을 의미한다. 이제는 진정 장준혁에게 영원한 작별 인사를 건네고 주말 밤마다 느꼈던 흥분을 진정시켜야 할 시간인 셈이다. 그러나 TV를 등지고 현실로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 콕 박혀 있는 묘한 갑갑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럴 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주변을 돌아봐야 한다. 장준혁은 물론이고, 우용길, 이주완, 민충식, 유필상 등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가. 당신이 속한 그곳이 병원이건 일반 기업이건 국회의사당이건 교무실이건 그곳은 ‘거탑’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네티즌이 옳았다고 할밖에. 장준혁은 죽지 않았고, <하얀거탑>은 여전히 당신 앞에 솟아 있으니 말이다.

<하얀거탑>은 ‘인간거탑’이었다

정말이지 <하얀거탑>은 남 이야기가 아니다. <하얀거탑>은 ‘의학드라마’를 표방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시청자는 별로 없다. 이 드라마는 헌신적인 의사에 대한 예찬이나 환자와 의사 사이에서 배어나오는 감동에는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 차라리 <하얀거탑>은 병원을 무대로 한 정치드라마에 가깝다. 여기서 정치란 국가 등을 배경으로 한 거시적 의미의 정치보다는 조그마할지라도 권력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미시정치를 의미한다. 외과과장에 오르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장준혁(김명민), 원장의 꿈을 품고 그를 돕는 진료부원장 우용길(김창완), 향후 각종 로비를 위해 역시 준혁을 돕는 의사회 회장 유필상(이희도), 퇴진 뒤 껄끄러운 장준혁과 상대하지 않으려고 노민국(차인표)을 밀어주는 외과과장 이주완(이정길) 등 <하얀거탑> 세계의 대부분 인물들은 병원 안의 자그마한 권력을 둘러싸고 거대한 격투를 펼친다. 어디 병원만 그러랴. 무대배경을 대기업으로 옮기거나 의사당으로 이동시킨다 해도 권력의 크기가 조금씩 달라질 뿐이지 피튀기는 살육전은 어김없이 벌어질 것이다. <하얀거탑>을 놓고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느니, ‘딱 우리 회사네’라고 말하는 것도 모든 집단을 막론하고 관통되는 권력 관계의 본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얀거탑>이 그저 현실을 리얼하게 묘사하기만 했다면 이토록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을 것이다. <하얀거탑>의 진정한 매력은 장준혁이라는 괴력의 캐릭터에 있다. 최고의 기량을 가진 외과의사이자 레지던트와 인턴을 휘어잡는 강력한 리더십의 소유자이며, 권력의 판세를 정교하게 읽어내는 전략가이자 종일 분주히 뛰어다녀도 지치지 않는 정력가인 그에게 중요한 것은 딱 하나, 바로 권력에 대한 불타는 욕망이다. 홀어머니 아래서 어렵게 자라 국립대 부속병원의 부교수 자리까지 오른 그에게 권력은 생존이라는 본능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유일무이한 목표다. “생명을 다루는 병원이라 해도 권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건 결국 실력만이 전부가 아니란 소리야”라는 그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최강의 수술 실력을 갖고 있음에도 그는 지방 병원으로 좌천될 위기를 겪기도 하고, 외과과장 승진길도 막힐 뻔한다. 어쩌면 그에게 권력은 궁극의 목표가 아니라 패배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편인지도 모른다.

시청자들 장준혁에게서 자신을 보다

<하얀거탑>이 흥미로운 점은 이처럼 권력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라도 저지르는 악한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뿐 아니라, 그 악한이 시청자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장준혁을 그저 악인으로 분류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결론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제쳐놓는다 해도 출세를 위해 환자를 내팽개쳐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사실은 조금의 동정심도 얻기 힘든 악행임에 틀림없다. 놀라운 점은 그럼에도 그에 대한 팬들의 사랑은 그리 줄지 않았다는 것이다. 안판석 감독은 그 이유를 시청자와 장준혁이 공유하고 있는 동질성이 크다는 데서 찾는다. “시청자는 장준혁이라는 타자를 보게 되는데, 어느덧 거울을 보듯 그 안에서 자기를 보게 된다. 인간이라는 게 다 자기애가 있어서 감정을 이입해서 사랑하게 되고 자기와 동질시키게 된다.” 장준혁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질 때는 냉혈한처럼 자기 계획을 추진하는 와중에 간혹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고등학생 시절 어머니를 위해 두개의 도시락 중 한개를 남겨놓고 집을 나서는 모습이나 한밤중에 고향집을 찾았다가 끝내 그대로 돌아오는 장면 등은 캐릭터를 더욱더 입체적으로 만들어준다.

장준혁의 대척점에 놓인 최도영(이선균)이 팬들로부터 큰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는 참된 의사의 길은 권력과 무관하게 묵묵히 의사로서의 도리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준혁에게 “넌 이미 누구나 인정하는 훌륭한 외과의야. 그런 네가 왜 감투에 이렇게 연연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등의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속세가 아닌 선계에나 사는 인물처럼 보인다. 비타협적으로 순수를 추구하는 최도영은 어떤 면에선 비현실적이어서 시청자가 그에게서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공간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오로지 병리 연구와 환자의 생명을 생각하는 그의 모습은 숭고할 따름이지만, 때로는 비현실성을 넘어 무능력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꼭 필요한 연구장비가 우용길 부원장의 방해로 들어오지 못하게 됐는데도 땅이 꺼지게 한숨만 내뿜는 것 외에 아무 일도 못하는 그를 보며 답답해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물론 후반부, 크나큰 자기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진실을 위해 앞장선 것이 짜릿한 흥분을 자아내긴 했지만 말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묻다

이에 대해 안판석 감독은 최도영 캐릭터가 비현실적인 게 사실이라면서 “스토리가 발생하려면 욕망이 있어야 하는데, 최도영은 욕망 자체가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이 드라마는 완벽하게 장준혁이라는 한 사람의 스토리다. 그 외의 인물들은 장준혁의 인간됨을 계량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다”라는 그의 말로 압축된다. 있는 힘을 다해 성공의 고지를 향해 온몸을 밀어붙인 장준혁이라는 한 인물을 철저하게 파헤쳐 그의 내밀한 속내까지 보여주려 하는 게 의도였다면 <하얀거탑>은 그 의도를 충실하게 채워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긴박감있는 영상과 치밀한 편집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숙련된 배우들의 숨막히는 연기 호흡은 장준혁이라는 인물을 둘러싼 세계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일등공신이었다. 그렇다면 역대 한국 드라마 사상 가장 매력적인 악인 캐릭터라 할 만한 장준혁을 전면에 내세운 <하얀거탑>은 시청자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려고 한 것일까. “이 드라마는 장준혁이라는 인간을 철저히 해부하는 것인데, 결국 관객은 자기 해부를 하게 된다. 이전까지만 해도 권모술수를 쓰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을 짓밟는 사람을 나쁘다고 생각해왔는데, 이 드라마를 보다보면 어느덧 장준혁을 지지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 무언가 진지한 생각을 한번이라도 하게 된다고 본다.”

이제 장준혁은 죽었고, <하얀거탑>도 끝났다. 기상관측 이래 가장 따뜻했던 겨울이 지나자마자 닥친 꽃샘추위가 더욱 춥게 느껴지는 건 장준혁처럼 권력에 대한 욕망을 계속 채워넣을 수 있는 정력과 교활함을 갖지 못했고, 최도영처럼 욕망을 비운 채 독야청청 살아갈 만큼 공력도 쌓이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뒤의 허탈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 남은 건 정말 많이 욕망했고 정말 열심히 노력했던 장준혁을 대기 속으로 날려보내는 일이다. 그의 어깨 위에 얹었던 우리의 헛된 욕망도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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