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가 짜증난다, 라고 말하면 돌 맞을 거 같다. 한데 짜증이 나려는 걸 어쩌랴. 바보가 아니라면, 장준혁보다 최도영이 의롭다는 거 안다. 변호사 김훈과 시민운동가 이윤진도 착한 사람들 맞다. 간호사 유미라와 레지던트 염동일의 용기도 가상하다. 결국 정의파는 이겼다. 그럼에도 시큰둥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나쁜 시청자다.
<하얀거탑>을 재미있게 보았다. 내내 장준혁을 지지했다. 그의 끓어오르는 욕망이 성취되기를 바랐고, 그가 덜 상처받았으면 했다. 담관암 걸릴 땐 연민이 극에 달했다. 나보다 더 나쁜 시청자들은 인터넷 게시판에 “장준혁을 죽이지 말라”고 호소했다지만, 아주 잘 죽였다고 생각한다. ‘가오’를 중시하는 장준혁에겐 구차한 삶보다 폼나는 최후가 어울린다. 억지로 살려내 개과천선을 시키는 건 촌스럽다. 그건 우리의 장준혁을 두번 죽이는 만행이다.
권력투쟁은 늘 흥미진진하다. <하얀거탑>을 한회도 거르지 않은 건 그래서다. <주몽>의 인기비결도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하얀거탑>은 시대적 배경상 <주몽>보다 훨씬 현실감이 있다. 특히 외과 과장 선거를 둘러싼 파워게임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사내 정치!
장준혁이 외과 과장 자리에 목맬 때, 내가 몸담고 있는 직장에서는 심상찮은 사건이 벌어졌다. 2년 전 직선제로 뽑힌 사장이 갑자기 사의를 표명했고, 돌발적 상황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합종연횡은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에만 있는 마술이 아니었다. 술자리에서는 그 내막을 둘러싸고 동료들간에 이런 농담이 오고갔다. “알아? ‘회색거탑’이 ‘하얀거탑’보다 백배는 다이내믹하다는 거?” 한겨레신문사의 빌딩 외벽은 회색이다. 이번호 <씨네21>이 발행될 즈음엔 두달여간 도무지 향방을 예측할 수 없었던 ‘회색거탑’의 주인공(새 사장)이 결정된다. 나는 장준혁과 최도영, 이주완의 캐릭터를 내가 아는 인물들에 대입시키면서 음미하곤 했다. 그리고 그동안 경험한 ‘거탑’과 ‘소탑’ 내부의 권력투쟁을 떠올려보았다. 드라마 같은 현실 앞에서 TV드라마의 각본은 초라해 보인다.
인간은 모두 초연한 척한다. 하지만 정치에서 자유로운 이는 없다. 부시냐 후진타오냐 또는 빈 라덴이냐(세계 정치), 박근혜냐 이명박이냐 노무현이냐(국내 정치), 내가 믿고 따를 회사 선배는 누구냐(사내 정치) 따위의 선택은 숙명이다. 그것은 우리의 크고 작은 운명을 결정한다. <하얀거탑>이 사내 정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켜줬다면 오버일까? 아무리 작은 권력에도 달콤함이 있다. 중독성이 있다. 그 권력과 어떤 거리를 유지할 것이냐는 인생 공부의 숙제다.
장준혁의 캐릭터도 인생 공부에 시사점을 준다. <하얀거탑>의 연출자는 그를 흑백논리를 넘어서는 ‘컬러형’ 인간으로 창조했다. 장준혁을 좋은 놈이나 나쁜 놈으로 분류하는 건 후지다. 그는 ‘복잡한 놈’이다.
이걸 조금은 엉뚱하게 비약시켜본다. 분단시대가 선물한 이분법적 반공교육은 사라지고 있다. 세상을 선/악과 예수천당/불신지옥의 잣대로 나누는 기독교식 세계관도 비판을 받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을 단순하게 편 가르고 규정하길 좋아한다. 작은 예로 ‘진보인사’, ‘보수인사’ 따위의 개념들이 그렇다. 진보인사는 집에서도 진보적일까? 보수인사는 하는 짓마다 다 꼴통일까? 5년 전, 수십년간 해외에서 통일운동을 했다는 자타 공인 ‘진보인사’와 3박4일 지내다가 화들짝 덴 적이 있다. 그의 언행과 여성을 대하는 태도는 선의의 통일운동을 욕보일 만큼 수준 이하였다. 인간에겐 보수니 진보니 하는 가치로만 평가할 수 없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장준혁의 스펙트럼이 하나가 아닌 것처럼 우리는 죄다 두 얼굴 또는 세 얼굴의 소유자가 아닐까(아, 장준혁 미화운동 너무 심하다).
장준혁을 통한 인생수업의 하이라이트는 그의 유언 내용이다. 실제 유언은 안 했지만, 나에게는 환청처럼 들렸다. “기를 쓰고 아등바등 살지 마. 그럴수록 더 허무해.” 그가 죽음으로 일깨워준 준엄한 메시지다. 권력은 무상하다. 알면서도 사람들은 달려든다. 그리하여 장준혁이 ‘봉숭아학당’에 출연한다면 이런 대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인생 뭐 있어? 노는 거야”라고. 그래봤자 나는 또 내일부터 기를 쓰며 살 것이다. 그 끝의 허망함을 알면서도 아등바등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