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이 막바지라 그런지, 인터뷰 약속 잡기가 정말 힘들었다.
=나는 설렁설렁하는 인터뷰는 안 좋아한다. 뭔가 집중해서 해야 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촬영 중간에 5분만 내서 하는 인터뷰는 죄송하지만 거절한다. 그렇게 인터뷰를 하면 내 마음은 다른 데 가 있을 거다. 겉으로만 인터뷰하는 거 기자분들도 다 알 테고. 그럼 마음이 찜찜하다.
-오늘(3월6일) 최종화인 20화 대본이 나왔다. 받아본 순간 감회가 새로웠을 것 같다.
=벌써 끝이구나, 라는 느낌? 원작을 읽었기 때문에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한 마음의 준비도 조금은 하고 있었고. 다만 지금 촬영하고 있는 부분이 <하얀거탑>의 시작이자 끝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요즘이 나에겐 굉장히 힘들다. 1화부터 19화까지 찍어왔지만, 그 전체와 이번주를 바꿀 정도로 이번주 촬영분은 중요하다. 육체적으로도 힘들지만, 정신적으로 많이 예민해져 있다.
-결말이라 하면 장준혁의 죽음인데, 많은 시청자가 장준혁을 살려달라고 하더라.
=그건 무조건 원작대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얀거탑>이 훌륭한 원작이고 계속 회자되는 작품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드라마가 원작과 크게 벗어난 부분도 없었고, 장준혁의 죽음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한다.
-장준혁의 죽음이 (드라마 전개상) 당연하다는 건, 장준혁이란 캐릭터를 설정하는 부분과 연관된 문제인 것 같다.
=장준혁의 죽음은 선과 악의 구도에서, 악은 결국 죽음을 맞이하며 죗값을 치른다는 식의 결론이 아니다. 죽음과 함께 악인이 변한다는 걸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정말 상투적이지 않나. 장준혁은 죽으면서까지도 자신의 수술이 잘못됐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죽기 전에 상고문을 쓰고 죽는데 거기에는 ‘앞으로 어떠 어떠한 의학 기술이 더 나와야 하고, 자신은 근치적인 수술만이 암세포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는다’는 내용이 써 있다. 장준혁은 죽든 죽지 않든 존재감이 지속되는 인물이다. ‘하얀거탑’이 병원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하얀거탑’의 거탑은 장준혁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에 장준혁은 자신의 수술을 이주완 과장에게 부탁한다. 지금까지 적으로 마주하기도 했던 인물인데, 그 대목에 대한 감정은 어떻게 정리했나.
=세상을 살다보면, 정말 싫은 사람, 나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이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 특히 그 사람이 내가 추구하는 분야의 실력자라면 다른 방법이 없다. 가령 의사들끼리도 누가 실력이 있으며, 누가 실력이 없는지 너무 잘 안다. 내가 어떤 사람과 친하다고 해서 실력이 없는 사람에게 내 가족을 맡길 순 없지 않나. 또 반대로 말도 붙이기 싫은 사람이라도, 내 가족을 위해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장준혁은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그 다음은 이주완 과장이라고 판단한 거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속이고 있지만, 이미 자신의 병이 간단하지 않다는 걸 예감하고, 자기 다음으로 가장 권위가 있는 사람을 찾은 거지.
-마지막에 유서 두장을 남긴다고 들었다. 그 유서의 내용은 원고 항소와 자신의 진단이 맞았는지를 확인해 달라는 거. 그런 의미에서 장준혁은 상황을 판단하고 대처하는 데 굉장히 민첩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본적으로 머리회전이 빠른 사람이니까. 어떤 상황이 펼쳐지면, 거기서 후회하고 자책할 시간에 다음 계획을 짠다. 그런 면이 죽음이라는 상황에서도 일관된다는 게, 참 매력적이지.
-안판석 감독은 최도영이란 인물을 장준혁의 일면을 보여주기 위한 리트머스로 설정했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최도영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갔나.
=장준혁과 최도영은 가치관 혹은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우리 주변에는 평소엔 말이 잘 통하지만 특정 주제가 나오면 싸우게 되는 친구가 있지 않나. 장준혁과 최도영은 그 정도로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 하지만 그외에는 사이가 좋다. 가령 장준혁은 최도영을 언제나 찾아가 기댈 수 있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치고받고 싸워도 장준혁은 최도영을 생각한다. 하지만 최도영은 반대다. 최도영은 하나가 틀어지면 절대로 먼저 풀지 않는다. 나는 그런 면에서 장준혁이 굉장히 의리있는 남자라고 생각한다. 아마 장준혁은 최도영이 어떤 이유로 벼랑에 몰린다면, 그 빠른 머리를 회전해 구해줄 거다. 그게 옳든 옳지 않든 최도영을 친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실제로 장준혁이란 친구가 있다면 참 좋겠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그의 행동은 정의와 거리가 멀지만, 최소한 자기 자신, 주변 사람들에 한해서는 정의롭다. 병원의 부하 의사들이 장준혁을 그렇게 믿고 따르는 게 단지 권력을 좇아서가 아니다.
-장준혁은 우용길 부원장, 이주완 과장, 최도영, 노민국 교수 등 다양한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면면이 드러나는 캐릭터다. 이런 점이 연기하는 데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일단 기본은 각본이다. 대본만 충실히 이해하고 분석하면 그런 관계들을 잘 살릴 수 있다. 나의 역할은 거기서 작가 선생님이 미처 심어주지 못한 서브텍스트를 찾아내는 거다. 이주완 과장을 대할 때의 말투, 최도영과 대화할 때의 톤 등. 이런 게 다 다르게 되어 있다. 그래서 대사를 하기에 껄끄러운 부분도 있고, 입맛에 안 맞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부분들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살려가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런 차이가 인물들과의 관계, 장준혁의 캐릭터를 일관되게 끌고가는 장치니까.
-대본이 거의 촬영 직전에 나오는데, 그런 부분들을 다 잡고 가는 게 물리적으로 가능한가.
=그래서 촬영 들어가기 전까지 대본을 놓을 수가 없다. 그냥 계속 본다. 내가 놓친 지문이 있나, 체크하면서. 지문 하나하나에도 인물의 상황과 감정이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놓칠 수 없다. 가령, ‘외면하며’라든가, ‘잠시 고개를 돌리며’와 같은 지문을 놓치면 드라마 전체적인 느낌이 배 이상 차이난다. 물론 시청자는 그런 디테일까지 모르지. 하지만 감동의 차이는 있을 것 같다. ‘너무 재밌다’와 ‘너~무 재밌다’의 차이? (웃음)
-장준혁이 우용길 부원장으로부터 외과과장에 선출됐다는 말을 들을 때는 가슴이 울컥하더라. 어떻게 보면, 정말 별짓을 다해서 과장이 된 건데, 그게 밉지 않게 보였다.
=그런 게 역할의 진정성인 것 같다. 아무리 악역이고, 독한 살인마라고 해도, 누구에게나 진정성은 있다. 장준혁이란 인물을 연기하면서도 진정성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얘가 왜 자꾸 이런 길을 갈 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하고, 내 자신을 합리화해가면서, 장준혁의 입장에 서려고 했다. 그랬더니 다 이해가 되더라. 회진을 도는 장면에서도 장준혁은 환자 한명 한명을 길게 봐줄 시간이 없다. 그건 당연하다. 제일 잘나가는 외과의사인데. 한명의 환자에게 5분을 할애한다고 하면, 그 시간에 두세명의 환자를 보는 게 맞다. 왜? 장준혁이니까. 사람들은 장준혁이 악역인데 옹호하게 된다고 하는데, 그건 옹호가 아니라 공감이다. 누구나 장준혁의 입장이라면 그렇게 하는 게 맞으니까, 그게 현실적이니까.
-장준혁이란 인물을 보고 처음부터 딱 내 역할이란 생각이 들었나.
=장준혁은 어떤 남자배우라도 탐낼 만한 인물이다. 굉장히 복합적인 캐릭터기 때문에 욕심이 났다. 동시에 두렵기도 했고. 이걸 잘하면 찬사가 있겠지만, 제대로 못하면 엄청난 비난을 받을 테니.
-촬영 들어가기 전에 수술실 참관하며 준비했다고 들었다.
=그건 영화 <천개의 혀>를 하면서 준비했던 거다. 거기서도 외과의사 역할이었기 때문에 영화 촬영을 마쳤을 때에는 수술하는 법, 기구를 다루는 방법을 어느 정도 마스터한 상태였다. 물론 배워도 끝이 없겠지만, 극중에서 외과의사로 보이기에 하자가 없는 정도는 됐다. 영화에서 수술장면 촬영이 많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감도 있었다.
-<하얀거탑>의 수술장면은 물리적인 손동작 외에 시선교차, 인물간의 관계를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연기를 할 때 힘들진 않았나.
=수술 동작들은 내가 수술실에서 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다. 거기에 대사가 입혀지고, 상황이 주어진다. 다른 연기와 별개로 수술 동작은 그 자체가 자유자재로 될 수 있도록 훈련했다. 밥먹으며 이야기하고, 운전하면서 전화하듯이, 수술하면서 대사를 하고, 감정을 살리는 게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했다. 그만큼 연습을 많이 하는 수밖에.
-그럼 수술 동작 연습은 얼마나 한 건가.
=그냥 매일같이 했다, 매일같이. 그래도 극한적인 상황이나 외우기 힘든 대사, 감정신에서는 손동작이 엉키더라. 한 장면에서도 여러 컷을 따기 때문에 항상 더블액션을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내가 좀전에 믹스터를 했는지, 모스키즈를 했는지. 습관처럼 수술의 순서와 방식을 외고 있어야 한다.
-실제로 본인에게 장준혁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나.
=욕심이 많다는 것 정도? 하지만 장준혁은 천재이지 않나. 천재니까 욕심을 갖고 무언가를 해도 착착 전개가 되는 거지.
-영화 <소름>부터, <불멸의 이순신> <하얀거탑>까지 화제가 됐거나 당신의 연기가 주목받았던 작품들은 주로 그 인물이 다층적이다. 작품을 고를 때 캐릭터를 먼저 보나.
=일단은 작품을 본다. 하지만 쉽게 살아온 인물은 매력이 없는 것 같다. 단면적이고 평면적인 인물보다는 인간의 희로애락이 다 들어 있고, 내면에 뭔지 모를 무언가가 들어 있는 인물이 욕심난다.
-그렇다면 <하얀거탑>은 지금까지의 연기, 앞으로의 연기에 있어 어떤 의미가 있나.
=글쎄…. 지금은 잘 모르겠다. 시간이 좀 지나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지금은 다른 때랑 똑같이 드라마 한편 하고 있다. 매번 작품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다기보다는 이후에 ‘아, <하얀거탑>은 이런 작품이었지’란 식으로 생각되는 것 같다.
-오늘 촬영을 지켜보니 NG를 거의 내지 않더라.
=그게 꼭 좋은 건 아닌데. (웃음) 그냥 열심히 한다. 나는 내가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들이 준비하는 것보다 더 많이 준비해야 한다는 사고다. 잠을 못 자더라도, 대본이 나오면 밤을 새우더라도 완전히 숙지한 뒤 잠을 잔다. 선배님들은 그런 성실함이 연기로 보인다고 말씀해주시더라. 하지만 그게 내 최선이고, 당연한 거니까.
-안판석 감독은 당신을 장준혁이란 역할을 100%, 120% 완벽하게 구현한 완벽한 배우라고 칭찬하더라. 인터넷에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화제가 되고 있다.
=일단 나는 시청자 게시판이나 인터넷 게시판에는 안 들어간다. 인터넷에 나에 대한 칭찬이 있든 험담이 있든 인정을 못한다. 그 사람들이 초등학생인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까. 하지만 주위에 모니터를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친구, 학교 동기, 연출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 사람들은 정말 정확하게 짚어낸다. 드라마 방송이 끝나면 신랄한 모니터가 이어진다. 새벽 1시부터 3시 정도까지 계속 전화한다. 마치 내 치부가 드러나는 느낌이라 열도 받지만 결국 다 맞는 얘기다. 요즘은 촬영이 바쁘다보니 메일로 주고받기도 한다.
-연기자로서 더 욕심이 있나.
=연기를 더 잘하고 싶다. 연기란 건 정말 힘든 것 같다. 할 때는 미친 척하고 하지만, 나중에 보면 ‘아직 멀었구나’ 싶다.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은 뭔가.
=영화 <파트너>를 하게 될 것 같다. 아직 감독님도 못 만나봤는데 3월28일이 크랭크인이라고 하더라. (웃음) 같이 출연하는 변희봉 선생님한테만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