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하얀거탑> 배우 인터뷰 3. 이주완 역 이정길
2007-03-20
글 : 정재혁
사진 : 오계옥
격이 있는, 바람직한 미니시리즈이다

-요즘 <문희>와 <하얀거탑>에 동시 출연하고 있다. 무척 바쁠 것 같다.
=뭐, 지금까지 계속 2편 이상씩 같이 해왔는데. 아무렇지도 않다. (웃음)

-<연개소문>은 이제 출연이 끝난 건가.
=<연개소문>은 1부 54화를 끝으로 내가 출연하는 부분은 더이상 없다. 원래 그때까지 하기로 계약했던 거다.

-<하얀거탑> 촬영이 막바지다. 이제 1주일도 안 남았는데, 서운하지는 않나.
=서운하다기보다는 뿌듯하다. 최근에는 젊은 연기자들을 내세운 짝짓기 드라마 일색이었다. 처음에 미니시리즈가 생긴 건 일반 연속극에서 할 수 없는 내용이나 작품의 질을 높인다는 취지였는데, 언제부터인가 구태의연한 내용들이 비슷하게 반복되고 있다. 시청률을 지나치게 의식한 탓이겠지. 미니시리즈 본래의 특성이 상실된 느낌이라 좋지 않았다. 하지만 <하얀거탑>은 안판석 감독이 2년 넘게 준비한 작품이고, 마지막까지 허술함없이 흘러가고 있다. 오랜만에 짜임새있는 작품에 좋은 연기자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기분 좋다. 고급스러운, 바람직한 미니시리즈를 만난 느낌이랄까.

-오랜 시간 드라마 제작 현장에 있다보면 그런 흐름이 남다르게 느껴지나보다.
=그렇다. 40년 넘게 연기를 하다보니 세월이 변하는 걸 연기 현장에서도 느낀다.

-<하얀거탑> 후반부에서 장준혁이 이주완 과장에게 자신의 수술 집도를 부탁한다. 그 대목이 아무래도 가장 신경이 쓰일 것 같다.
=수술하는 장면은 아직 안 찍었다. 이주완 과장은 장준혁과 한 조직사회에서 정말 부끄러울 정도로 감정대립을 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막상 한 인간이 위기에,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데 어떤 느낌이겠나. 그동안 자신에게 모질게 했던 장준혁이지만, 자신에게 수술을 부탁할 때는 어떤 신뢰가 있는 거다. 의사로서의 본분과 기본적인 마인드. 평소 이주완 과장이 이야기하는 것도 휴머니즘에 대한 거고. 이미 결과는 원작이 있으니 다 알고 있었던 거고, 마지막 대본을 받는데 마음이 찡하더라. 인생이라는 게 이거밖에 못 살고 가는구나, 당장 내일의 일도 못 보는 인간이 1화부터 지금까지 무지 달려왔구나. 인간의 속성을 이 드라마를 통해 반성하게 되는 부분도 있다.

-이주완 과장은 권위와 위엄을 내세우는 인물이지만, 자신의 자리 보존을 위해서는 비열한 수단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 차이에서 오는 인간의 속성이 이주완이란 인물을 다채로워 보이게 한다.
=이주완은 4, 5대에 걸쳐 내려온 의사 귀족 집안의 사람이다. 얼마나 오만하겠나. 보통은 비열한 면을 숨기고 있지만, 위급한 상황에서는 그런 부분이 돌출된다. 인간의 이중성을 많이 요구하는 게 이주완이란 캐릭터다. 허둥정길, 굴욕정길, 인쇄정길 등 별명도 스무개가 넘더라.

-개인적으로는 허둥지둥 달려가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위엄이 무너지는 모습과 동시에 위엄 뒤에 가려졌던 본능이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느낌이었다.
=이주완 과장은 기본적으로 철저한 권위를, 위급한 상황에서는 인간의 본능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연기의 큰 톤은 그렇게 설정했고, 거기에 하나씩 리얼리티를 채워나가려고 했다. 이주완 과장의 내면을 적시에 적절하게 배분하면서 인간의 보편적인 감성을 대입했다. 그래야 장준혁에 맞서는 이주완 과장이란 인간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 시청자는 ‘굴욕적이고’, ‘허둥대는’ 이주완 과장을 좋아하는 거 같더라.
=지극히 고답적이고 권위적으로 보이는 인물이 인간적인 측면을 드러내니까 재밌겠지. 보통의 이주완으로 보면 뜻밖인 부분이지만 그게 또 하나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런 부분에 진솔함이 담겨 있다. 내가 봐도 이주완의 굴욕적인 장면들이 좋더라.

-별명에 대해서는 어떤 느낌인가.
=네티즌, 젊은 친구들이 애정을 갖고 표현해주는 거니까 싫지는 않다. (웃음) 나를 패러디한 사진도 봤는데, 그냥 재밌다.

-새로 외과과장이 된 장준혁이 새로운 세대라면, 이주완은 사라져가는 세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단지 세대의 차이만은 아니라고 본다. 장준혁의 가치관과 이주완의 가치관이 다른 거지. 이주완은 의사 집안에서 의사를 하나의 직업으로 대물림받은 사람이고, 장준혁은 빈농에서 시작해 천재적인 머리 하나로 성공한 사람이다. 거기서 비롯되는 삶의 방향, 생각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 구조상의 차이랄까.

-오늘 촬영장면을 보니, 장준혁의 병을 두고 병원 내부에서 이해관계를 따지는 대목이 있더라. 그때 이주완 과장이 내뱉는 대사는 ‘장준혁 과장도 환자입니다’였다. 법정 대립 이후 병원 내 권력 싸움에서 초월해진 이주완 과장이 이제는 이전과 다른 가치의 삶을 살겠다는 의미로 비쳐졌다.
=병원에서 퇴임하고, 다른 병원의 원장으로 가려던 노력도 장준혁에 의해 물거품이 됐다. 굉장히 분노했겠지. 하지만 장준혁의 죽음을 알고서는 의사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을 것 같다. 집도의와 환자 사이에 서로 속고 속이는 일이 있으면 안 된다. 게다가 장준혁이 나를 찾아와 부탁을 했는데, 어떻게 그를 환자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겠나. 드라마 후반부의 이주완은 의사의 덕목을 충실히 재현하는 인물이다.

-특별히 어려웠던 대목이 있나.
=특정한 대목이라기보다는 <하얀거탑>이란 드라마의 전반적인 연기 톤이 쉽지 않았다. <하얀거탑>은 일반 연속극처럼 커다란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식의 드라마가 아니다. 하나의 조직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본질적인 싸움이 주를 이룬다. 그러니 심리적인 연기가 중요할 수밖에 없고, 그걸 살리는 게 힘들었다. 특히 의사 집단은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의사의 방식이 보통의 아저씨들과는 다르다. 그런 보이지 않는 미세한 부분들을 잡아서 연기에 접목시키는 게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백편에 이르는 작품에 출연했는데, 그중에서 <하얀거탑>이 어떤 의미일지 궁금하다.
=예전에 안판석 감독과 일일연속극을 한 적이 있다. 그때는 안 감독이 거의 신인이었을 때인데, 현장을 바라보는 눈이 굉장히 섬세하더라. 그래서 이번에 안판석 감독한테 오랜만에 제의가 들어왔을 때, 다른 건 보지도 않고 하겠다고 했다. 물론 그전에 어떤 작품이란 건 들었지만. (웃음) 당시에 다른 두 작품의 출연 제의가 더 있었지만, <하얀거탑>을 하기 위해 거절했다. <하얀거탑>은 드라마가 그 자체의 빛을 잃어가는 요즘, 모처럼 격이 있는 작품이다. 그런 작품을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사실이 기쁘다. 그 기쁨에서 의미가 생기는 거 아닌가. 이제는 작품이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기보다는 그냥 동료, 후배들과의 작업에서 오는 즐거움이 더 큰 것 같다.

-많은 중년 배우가 누구의 어머니, 아버지의 역할을 많이 하는 것과 달리, <부활> <아름다운 날들> 등 강렬한 악역을 많이 연기했다.
=배우에게 역할의 선택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지금까지 오랫동안 주인공을 해왔고, 이제는 그 자리를 후배 연기자들에게 물려준 느낌이다. 그래서 들어오는 역할들이 다 비슷비슷하기도 하다. 홈드라마라면 무조건 누구의 아버지. 하지만 운이 좋았던지 개성적인 역할도 꾸준히 들어온다. 그리고 그런 게 더 재미있다. 정의를 연기하는 것보다, 악인의 진솔함을 찾고 연기하는 데 욕심이 생긴다.

-<연개소문>은 육체적으로 굉장히 힘들었을 것 같다. 쉬지 않고 계속 많은 작품에 출연하고 있는데 체력은 어떻게 관리하나.
=<연개소문>은 정말…. 혼났지. 30kg이 넘는 갑옷을 입고 연기했으니. 연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체력이다. 40여년 연기해본 경험에서 깨달았다. (웃음) 수백 작품을 하면서 술도 많이 마셨고 밤도 많이 지샜지만, 집중력이 떨어지면 연기를 할 수 없다. 집중력은 곧 체력이다. 나는 연기에 대한 근성으로 지금까지 버티고 있지만, 정말 체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특별히 하고 있는 운동이 있나.
=골프는 한 30년 했고, 스키도 한 10년 탔다. 하지만 요즘엔 잘 못한다. 시간이 없으니. 예전에 압구정동 살 때는 아차산이나 한강 둔치를 달리곤 했다. 지금 이사온 집이 수지인데, 근처에 산이 있다. 가능하면 일주일에 두세번, 두 시간 코스를 산책하려고 한다.

-예전에는 연극도 많이 한 걸로 알고 있다. 지금 다시 무대에 서고 싶은 마음은 없나.
=처음엔 연극을 했다. 연극은 항상 생각한다. 언제나 시간이 문제지만. 지금까지 한 70편 정도 출연했다. 마지막에 한 작품이 아마 <사의 찬미>일 거다.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 같은 역할은 지금도 도전해보고 싶다. 연극 초기에 로렌스 올리비에가 하는 걸 보고 홀딱 반했었다.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세일즈맨의 죽음>의 윌리 로만도 해보고 싶고.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어서…. (웃음)

-영화에 대한 욕심은 없나.
=영화가 한참 어려웠을 때 20편 정도 했다. <만추>를 리메이크한 고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부터 고교청춘물 <여고 졸업반>까지. 최근에는 글쎄…. 몇 작품 들어오기도 했다. <살인의 추억>도 그렇고. 근데 안 하다 버릇하니, 계속 안 하게 되더라. (웃음)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 뭐, 기회가 된다면 할 수도 있겠지.

-<하얀거탑> 이후의 구체적인 계획은 뭔가.
=일단은 <문희>를 열심히 찍어야지. 당분간은 한 작품만 하면서 개인적인 시간을 갖고 싶다. 제한받지 않은 식사와 제한받지 않은 잠, 어디에도 제한받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 (웃음) 계속 주 단위로 얽매여 있다보니 좀 답답하다. 어딘가 여행을 가고 싶기도 하고. 여유를 갖는 게 계획이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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