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10분짜리 단막극장에 인생을 담는 사람들
2007-03-22
글 : 최하나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유년 시절의 살풋한 짝사랑에서 100여년 전의 불가사의한 사건까지, 재연 프로그램이 풀어놓는 이야기보따리에는 경계가 없다. <신비한TV 서프라이즈> <솔로몬의 선택> <꼭 한번 만나고 싶다> <新 TV는 사랑을 싣고> 등 짧지만 쫄깃한 드라마로 시청심(心)을 사로잡은 재연 프로그램의 주역은 뭐니뭐니해도 이웃처럼 살가운 얼굴의 배우들이다. 툭 어깨를 치며 인사를 건네고 싶을 만큼 친근하지만, 막상 생각해보면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는 배우들. 재연 프로그램의 무대 위에서 우리를 웃기고 울렸던 그들은 누구이며, 어떠한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는지 브라운관 뒤편에 감추어진 세계를 들여다보았다. 이제 막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풋풋한 신인부터 10년차의 노련한 베테랑까지, 재연 프로그램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는 6인의 이야기를 함께 싣는다.


<신비한TV 서프라이즈> 촬영현장

“오늘 밤, 그 집을 찾아갈 것이니라.” 어스름한 궁궐의 한구석, 묵직한 용포를 걸친 황제가 검은 옷을 두른 자객과 밀담을 나눈다. 비밀스러운 미소가 황제의 입가에 번지고, 자객은 이내 발걸음을 옮겨 궁 밖으로 사라진다. 궁중 암투의 현장일까, 아니면 적국을 무너뜨릴 비책이라도 세우고 있는 것일까. 자못 비장한 분위기가 감도는 궁궐 마당은 노란 비옷을 입은 50여명의 스탭들 외에도 우산을 들고 발걸음을 멈춘 구경꾼으로 가득하다. 가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매서운 바람이 몸을 시리게 하지만, 쉬이 자리를 뜨기엔 눈을 즐겁게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분홍빛 예복을 곱게 차려입은 궁녀들과 굳게 무장한 병사들, 포박된 채 억울함을 호소하는 그을린 얼굴의 평민들까지. 기시감이라는 단어는 이런 경우에 적확하다. 신분의 귀천에 상관없이, 선뜻 다가가 인사를 건네고 싶어지는 친숙한 얼굴들. 이름은 떠오르지 않아도 무의식에 각인된 듯 낯익은 얼굴들이 이야기를 엮어내는 이곳은 영화도, 대하드라마도 아닌 <신비한TV 서프라이즈>의 촬영현장이다.

시청자를 홀리는 이야기보따리

하나의 사연이나 상황을 극화하여 보여주는 프로그램, 이른바 ‘재연 프로그램’은 다재다능한 화술가가 되어 브라운관을 누비고 있다. 빛바랜 사진 속 과거를 펼쳐내 끊어졌던 인연을 다시 이어주기도 하고(<新 TV는 사랑을 싣고> <꼭 한번 만나고 싶다>), 논쟁이 되는 사건을 통해 법률 상식을 강의하기도 하며(<솔로몬의 선택>), 으슥한 밤 모닥불가에 둘러앉아 속삭이듯 기이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신비한TV 서프라이즈>). 흔히 뉴스나 다큐멘터리에서 사용되던 재연 형식이 단순히 특정한 상황을 보여주는 수단의 차원을 넘어 그 자체로 드라마적인 재미를 선사하는 주인공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재연의 형식이 예능·교양 프로그램에 접목되기 시작한 시점을 꼭 집어 헤아리기란 쉽지 않겠지만, 커다란 흐름을 그려보는 것은 가능하다. 90년대 중반 <경찰청 사람들> <TV는 사랑을 싣고>가 등장해 인기를 얻으면서 재연 프로그램의 터를 닦았고, 2001년에는 <타임머신> <이것이 인생이다>가, 이어 2002년 <신비한TV 서프라이즈> <솔로몬의 선택>이 잇따라 탄생했다. 큰 제작비를 들이지 않고도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효자 프로그램’의 입지를 굳히면서, 재연 프로그램은 <연애의 재구성> <삼색토크쇼> 등 케이블TV에도 빠른 속도로 일반화됐다. <신비한TV 서프라이즈>의 오승열 PD는 “드라마는 한 가지 주제를 몇회에 걸쳐 풀어가는 반면, 재연 프로그램은 10여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이야기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일종의 단편영화 같은 재미라고 할까. 질리지 않고 집중해서 볼 수 있고,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또 완벽하게 다른 분위기의 이야기가 이어지니까, 시청자가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한다.

고정 활동배우만 50여명 안팎

그렇다면 친근한 얼굴의 주인공들은 어떻게 탄생하는 것일까. <신비한TV 서프라이즈> <솔로몬의 선택> <꼭 한번 만나고 싶다> 등 현재 지상파TV에서 방영 중인 재연 프로그램에서 고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 배우는 줄잡아 50여명 안팎. 일요일에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보았던 배우가 월요일에는 <솔로몬의 선택>에 등장하는 식이다보니, 시청자는 알게 모르게 특정 연기자들의 얼굴에 익숙해지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재연 배우’라는 직업이 따로 존재한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재연 프로그램의 단골이라 할 만한 얼굴들, 그래서 ‘재연 배우’라는 명칭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는 이들은 사실 드라마, 영화, 연극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활동하는 전천후 연기자들이다. 대부분 소속사 없이 프리랜서로 활동 중인 연기자들을 방송사와 연결하는 것은 ‘캐스팅 하우스’, ‘캐스팅 게이트’, ‘MTM’ 등 캐스팅 전문 업체들의 몫. ‘캐스팅 디렉터’라는, 국내에서는 다소 낯선 직함이 등장하는 것도 이때다. ‘캐스팅 하우스’의 김금식 팀장은 “수백명의 연기자들이 등록되어 있는데, 지금은 거의 다 외울 정도다. 어떤 배우가 어떤 역할에 맞는지 개인적인 특성들을 파악해서 그때그때 가장 적합한 인물을 골라내는 것이 캐스팅 디렉터의 역할”이라고 이야기한다. 캐스팅 디렉터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는 ‘캐스팅 북’에는 아역 연기자부터 노인 연기자까지, 성별과 연령대별로 분류된 배우들의 사진과 프로필이 빼곡히 수록되어 있다. 주단위로 빡빡하게 돌아가는 재연 프로그램의 특성상 배우들은 통상 오디션을 거치지 않는다. 방송 대본이 나오면 우선 캐스팅 디렉터가 각각의 역할에 적임자라고 생각되는 후보를 고르고, 촬영 전날 PD와 함께 캐스팅 북을 보며 최종 라인업을 결정한다. 배우들에게 출연 확정 연락이 가는 것은 촬영 전날 저녁으로, 대본을 받아보게 되는 것도 그때다.

베테랑만 소화할 수 있는 속전속결 현장

10~20여분 남짓한 동안 시작부터 끝까지 일사천리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 재연 프로그램의 특징이라면, 촬영현장의 공기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다간 “넌 놀러 나왔냐?!”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다. 한회 방송당 4개의 꼭지를 방영하는 <신비한TV 서프라이즈>는 목·금·토 3일 동안 상황극 촬영을 하고, 주말에는 가편집과 색보정, 월요일에 더빙, 화요일에 스튜디오 녹화, 수요일에 종합 편집으로 한주가 숨돌릴 틈 없이 돌아간다. 하루라도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 한주 전체의 스케줄이 틀어져버리기 때문에 예외란 있을 수도 없고 용납되지도 않는다. 재연 드라마의 하루 촬영 분량은 적게는 50신에서 많게는 70신 정도. 보통 아침 7시에 시작해서 다음날 새벽 4~5시까지 24시간 가까이 이어지는 논스톱 촬영으로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해낸다. 해가 떨어지면 낮신을 밤신으로 바꾸고, 눈보라가 휘날리면 야외신을 실내신으로 바꾸는 등 현장에서의 임기응변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신비한TV 서프라이즈>의 오승열 PD는 “말 그대로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일한다. 바로 지난주에 뭘 촬영했는지 기억이 안 날 때도 있다”며 “한 꼭지를 찍으면 보통 2~3신 정도를 야마신이라고 해서 공을 들이고, 나머지는 정말 기계적으로 찍는다. 현실적으로 그 이상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솔로몬의 선택>
<신비한TV 서프라이즈>

속전속결이 만족스런 완성도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재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연기자들을 아마추어나 어설픈 배우 지망생 정도로 속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가능하지 않을 법한 촬영 스케줄을 뚝딱 소화해내는 이들은 대부분 연기 경력이 만만찮은 베테랑들. 연극 무대에서 기본기를 다진 이들이 대다수고, 영화나 뮤지컬을 거친 경력자들도 적지 않다.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고, 최대한 빠르고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촬영 일정은 역으로, 일정 수준의 연기력을 갖춘 배우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캐스팅 게이트’의 김추석 팀장은 “연기자를 기다려줄 만큼 여유가 남지 않기 때문에, 연기가 안 된다고 판단될 경우 현장에서 즉시 배우를 교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며 “재연 프로그램에 고정적으로 출연하는 분들은 사실상 연기력이 검증된 배우들”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처우는 어느 정도 수준일까. ‘얼굴이 알려진’ 연기자들이 재연 프로그램 한회 출연료로 받는 금액은 대략 30만원에서 40만원 정도. AP(agency pay: 캐스팅 업체에 주는 수수료) 30%를 제한다면 실제 손에 들어오는 돈은 어림잡아 20여만원 정도다. 하지만 이것도 방송사에서 어느 정도 수준의 등급(방송사는 연기자를 1~18등급으로 분류해 출연료를 차등 지급한다. 경력과 프로그램 기여도 등을 평가해 1년에 한번 등급 심사를 한다)을 가진 연기자의 경우고, 등급이 없는 신인 연기자일 경우는 한회 출연료가 10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 출연 여부 자체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탓에 때로는 몇 개월 동안 아무 일도 들어오지 않는 ‘춘궁기’가 닥쳐오기도 한다.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 3년 정도 출연해왔다는 한 20대 연기자는 “그래도 웬만큼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한번은 8주 동안 아무 데서도 연락이 안 왔다. 이대로 끝나는 건가 불안하고 우울해서 집에 계속 틀어박혀 있었다”고 말한다. 개인 가게를 갖고 있거나 식당을 운영하는 식으로 부업을 하는 배우들도 적지 않지만, 이마저도 쉽지는 않다. 언제 출연 연락이 올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데다가, 촬영이 보통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스턴트맨 출신으로, 5년째 재연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는 Y씨는 “생활이 힘드니까 부업을 생각한 적은 많았다. 하지만 밤샘 촬영을 하고 나면 너무 힘들어서 솔직히 아무것도 할 생각이 안 든다”고 털어놓는다.

“배우 따로 있고 재연배우 따로 있나?”

그러나 배우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낮은 출연료도, 불안정한 생활도 아닌 바로 ‘재연 배우’라는 꼬리표다. 연극 무대를 거쳐 <신비한TV 서프라이즈> <솔로몬의 선택> 등에 출연하고 있는 K씨는 “도대체 재연 배우라는 말을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똑같은 연기자로 대접받고 싶다”며 “재연 프로그램을 이류라고 무시하고 배우로 취급 안 해주는 차별에 화나고 서러울 때가 정말 많다”고 이야기한다. 재연 프로그램을 통해 얼굴을 알린 배우들은, 정극에서는 단역 이상의 역할을 얻기 힘들다는 것이 방송가의 암묵적인 관례다. ‘캐스팅 하우스’의 임지환 실장은 “재연 프로그램에 많이 나오고 연기를 잘하는 A와 연기력은 떨어지지만 재연 배우 이미지가 없는 B가 있다면, 대부분의 PD는 B를 선택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한다. 영화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배우 Y씨는 “연기력과는 상관없이 감독들이 식상하다는 이유로 캐스팅을 꺼려한다”며 “계속 미끄러지는 일이 반복되다보니 이제는 아예 영화 오디션은 보러가지 않는다”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시청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경로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배우들의 의욕을 꺾는 주요한 요소다. <신비한TV 서프라이즈> <솔로몬의 선택>이 방영된 뒤 으레 시청자 게시판을 채우는 것은 “그 배우 누구예요?”라는 질문들이지만, 재연 프로그램에는 배우 크레딧이 존재하지 않는다. 프로그램 홈페이지에서도 연기자들에 대한 정보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탓에 시청자가 알음알음 정보를 공유하고 팬카페를 개설해 운영하는 실정이다. 7년째 재연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는 L씨는 “물론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갖고 일하지만, 아무리 여러 번 출연해도 전혀 이름이 나오지 않으니 씁쓸할 때가 있다”며 “단순히 형식상의 문제가 아니라, 한명의 연기자로서 인정받느냐 아니냐 하는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한다.

<신비한TV 서프라이즈>

누구에게나 무명 시절은 존재한다. 문근영은 <TV는 사랑을 싣고>에서 출연자의 어린 시절 첫사랑을, 김승수는 <이야기 속으로>의 탈영병을 거치며 스타로 성장했다. 김추석 팀장은 “드라마의 단역으로 대사 한마디 치는 것과 재연 프로그램에서 주연급의 역할을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배우에게 도움이 되겠냐”며 “편견을 걷어내고 본다면, 재연 프로그램은 연기자로서의 기량을 닦기에 정말 좋은 무대”라고 말한다. 굳이 드라마틱한 ‘성공’ 사례를 꼽지 않더라도, 재연 프로그램에서 활약 중인 연기자들이 이른바 ‘재연 전문’이 아닌 대등한 한명의 배우로서 존중받아야 함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재연 연기만을 하기 위해 그 길에 들어선 사람은 없다. 언젠가 정극 무대에서 자신의 열정을 마음껏 발산하고 싶어하는 이들은, 연기자라면 누구나 그렇듯 더 좋은 작품과 더 좋은 연기로 자신의 존재를 빛낼 순간을 열망하고 있다. 짤막한 인생극장에서 희로애락을 노래하는 친근한 얼굴들은 지금 편견의 벽을 넘어 더 큰 무대로 뻗어나가는 꿈을 꾸는 중이다. 꿈을 실현시키는 것은 몰라도 그것을 응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무렇지 않게 걸치고 있던 색안경을 내려놓는 것, ‘재연 배우’에게 ‘배우’라는 이름을 돌려주는 것이 그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