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세계의 의상감독들] <에비에이터> <벨벳 골드마인>의 샌디 파웰
2007-04-05
글 : 박혜명
과감한 장식과 색의 파격

이안 소프틀리 감독이 <도브>(1997)를 작업하기 위해 샌디 파웰을 만났을 때, 파웰은 감독에게 원작 소설의 시대 배경을 10년 정도 늦추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헨리 제임스의 동명 소설은 1902년을 무대로 했다. 계급에 속박당한 두 연인의 사랑이 자유를 얻기 위해 감행하는 음모 아닌 음모의 멜로드라마 <도브>의 각본을 놓고 샌디 파웰은 “1910년의 의상이 훨씬 더 보헤미안적이며 자유롭다”고 주장했다. 그는 E. M. 포스터의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자 이스마일 머천트와 감독 제임스 아이보리가 만들어온 <전망좋은 방>(1985), <하워즈 엔드>(1992) 같은 순백의 정갈한 빅토리아 시대 후기 의상 스타일도 의식하고 있었다.

<벨벳 골드마인>
<파 프롬 헤븐>

샌디 파웰의 제안대로 소프틀리 감독은 <도브>의 시대 배경을 1910년으로 옮겼다. 샌디 파웰은 스토리에 부합하는 자유로움에 대한 의지와 낭만을 아르데코와 아르누보를 혼합한 의상에 넣었다. 드레스는 투박하지만 풍만한 자락으로 거침없는 능선을 만들고, 공작새 날개를 그대로 옮긴 화려한 무늬가 여성의 어깨로부터 허리 곡선을 따라 흐르며, 날아갈 듯 넓게 치솟은 모자 챙 위로는 수박만한 꽃송이와 깃털이 탐스럽게 흔들린다. 욕망을 표현하는 짙푸른색과 묘한 보라색, 순수함과 이국적 느낌을 담은 따뜻한 연녹색과 오렌지 계열 컬러가 남부 유럽의 풍광 속에 섞이고, 아시아식 터번을 두른 여성이 등장한다. <도브>의 의상은 단지 모던함과 자유로움을 넘어 20세기 초 유럽의 풍경에 초현실적인 신비로움을 새긴다.

코스튬 드라마가 엄격한 시대 고증보다는 영화 주제에 걸맞은 재해석을 중시하고 모든 디자이너가 파격과 새로움을 의도하며 작업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중에서도 샌디 파웰은 <도브>에서도 알 수 있듯 스토리를 컨셉화하기 위해 과감한 장식이나 색 도입을 즐기는 편이다. <파 프롬 헤븐>(2002)에서는 캐시(줄리언 무어)의 잠재된 애정 욕구를 표현하기 위해 1947년 크리스티앙 디오르 룩의 검소한 실루엣을 변형해 꽃다발처럼 풍성한 치마를 만드는 한편 붉은색 원피스에 녹색 재킷을 덜컥 보색 매치시켰고, <벨벳 골드마인>(1998)에서는 데이비드 보위와 마크 볼란의 스타일에 기초한 글램 룩에 깃털과 스팽글, 새틴 소재와 좌우 불균형 실루엣으로 더욱 극적이고 일탈적인 이미지를 강조했으며 이를 브라이언(조너선 리스 메이어스)의 일상복으로까지 확대했다. <올란도>(1992)에서는 올란도(틸다 스윈튼)가 실연한 뒤 문학에 빠졌을 때 엉뚱하리만큼 커다란 리본을 목에 달고 깃발같이 풍성한 소맷자락에 레이스가 늘어진 하얀 실크셔츠를 입고 서재에서 시집을 읽는다. 굳이 그 입술로 사랑을 노래하지 않아도, 자유를 갈망하는 낭만적인 영혼을 엿볼 수 있다.

<에비에이터>

화려한 양식으로 시대 파격적인 의상을 디자인하는 샌디 파웰은 첫 영화의상 작업을 데릭 저먼과 했다. 파웰은 런던에서 태어나 그곳의 미술학교에서 연극미술을 전공하다 중퇴하고 곧장 무대로 갔다. 현대무용가 린지 켐프 극단에서 일하던 중 영국의 퀴어 액티비스트이자 급진적인 영화감독인 데릭 저먼의 <카라바지오>(1986)로 데뷔한 때가 스물여섯이다. 그 뒤로 저예산 자국영화나 소소한 합작영화, TV, 연극을 오가다가 <올란도>로 서른둘의 나이에 첫 오스카 후보에 올랐을 때 <LA타임스>는 그를 “변두리 연극 무대나 저예산 실험예술영화를 주로 했던 사람”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데릭 저먼과 <아리아>(1987), <대영제국의 몰락>(1988), <에드워드 2세>(1991), <비트겐슈타인>(1993) 등 다섯편의 영화(이중 <아리아>는 알트먼, 고다르 등이 참여한 10명 감독의 단편 옴니버스 프로젝트다)를 작업했고 샐리 포터와 닐 조던, 토드 헤인즈 등과 일했다. 규범과 제도를 거스르고 파괴하는 감독들의 이야기 속에서 파웰의 의상이 좀더 큰 자유를 얻었음은 분명하다. 그에게 오스카를 안겨준 <셰익스피어 인 러브>나 스코시즈와의 두 번째 작업 <에비에이터>(2002) 등은 비유하자면 명품 브랜드의 안목과 손재주로 대중의 기호를 세련되고 고급스럽게 박음질한 쪽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샌디 파웰은 <에비에이터>로 두 번째 오스카 의상상을 수상했다). 이들 의상이 매력적이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그 시대의 관점을 훌쩍 뛰어넘는 경험을 안겨다준 것은 아니라는 뜻이 맞을 것이다.

샌디 파웰은 오랜 시대극 전통이 존재하는 영국의 의상디자이너다. 스코시즈와의 작업들을 통해 미국의 역사 재현에서도 인정받기에 이르렀지만 그는 여전히 파격 또는 ‘cross-dresser’(이성의 옷을 입는 사람)의 디자이너로 불린다. 그의 대담하고 새로움을 안겨주었던 작업들이 앞으로도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그러면 14년 전 <올란도>를 보고 이 영화의 의상디자이너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칼 라거펠트가 다시 한번 충격을 받고 갈지도 모를 일이다.

파웰의 파트너, 데릭 저먼

실험과 파격으로 영감을 준 연출자

실험적인 영상문법과 급진적인 정치 메시지를 담아 영화를 만드는 데릭 저먼은 샌디 파웰과 다섯번을 함께 작업했다. 틸다 스윈튼하고의 관계도 그러했듯, 작업한 사람들하고만 재작업하는 감독의 성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화가 카라바조의 삶을 게이 예술가의 그것으로 재구성한 <카라바지오>, 대처리즘의 영국을 비판하고 탄식한 <대영제국의 몰락>, 에드워드 2세를 게이 왕으로 그린 <에드워드 2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을 다룬 <비트겐슈타인>까지 장편은 4편이며 10명의 감독이 참여한 단편 옴니버스 프로젝트 <아리아>를 합쳐 5편이다. 샌디 파웰은 비스콘티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1971)과 함께 자신에게 깊은 정서적 인장을 남긴 영화로 저먼의 <주빌리>(1977)와 <템페스트>(1979)를 꼽았다. “그 영화를 보고 너무 깊은 영감을 받아서 감독에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이다, 이 사람하고 일하자고 해야겠다.”

그런데 데릭 저먼과의 관계가 과연 ‘의상 스탭’ 샌디 파웰에게 얼마나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실험해볼 기회를 주었는지는 조금 궁금하다. 완벽한 미술적 구현에는 관심이 없던 데릭 저먼은 <카라바지오>를 찍을 때도 타자기와 자전거 같은, 시대에 걸맞지 않은 소품을 태연히 등장시켰다. <에드워드 2세>에서는 남자 총신에 대한 에드워드 왕의 동성애적 감정이 드러나면서 왕비 이사벨라가 왕을 폐위시키는데 이때 왕비는 파시스트 복장을 하고 있다. 평소에 그녀는 현대식 드레스를 입고, 왕의 연인은 막스 앤드 스펜서 파자마를 입고, 반란 귀족은 SAS 장교 유니폼을 입는다. 정치적 급진성과 형식의 파괴가 상식을 뛰어넘어 실험적이다. 이 진보적인 크리에이티브의 세계에 제3자들이 얼마나 관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파웰 본인은 “그와 작업하면서 내가 이후 해나갈 작업들의 영감의 바탕을 얻었다” 정도로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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