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세계의 의상감독들] <게이샤의 추억> <시카고>의 콜린 앳우드
2007-04-05
글 : 김현정 (객원기자)
현실과 판타지의 역전과 배합

푸른색과 회색이 섞인 소녀의 눈동자가 몸단장하는 게이샤에게 고정되어 움직일 줄을 모른다. 얇은 홑옷을 입고, 손으로 무늬를 그린 화려한 겉옷을 걸치고, 온몸을 휘감을 수도 있는 길고 긴 오비의 매듭을 묶는 시간. 그 은밀한 시간을 들여다보는 <게이샤의 추억>은 꽃잎처럼 교토 밤거리에 흩어져내렸던 게이샤들의 기모노를 추억처럼 비추어내는 영화다. 사계(四季)의 풍경화로 여인을 휘감는 이 기모노 컬렉션은 머나먼 1930년대에서 불려왔기에 아련하지만 이상하게 맑고 선명하기도 하다. 과거와 현재를 봉합한 듯한 신기한 솜씨, <게이샤의 추억>으로 <시카고>에 이어 두 번째 아카데미 의상상을 수상한 의상감독 콜린 앳우드의 것이다.

<게이샤의 추억>

앳우드는 “디자이너는 마음의 도서관을 짓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1920년대와 30년대 기모노를 찾아 일본 전역을 뒤지고 유럽으로 흘러들어온 기모노까지 검토했던 앳우드에게 도서관이라는 단어는 비유가 아닌, 사전적인 의미 그대로이다. “나는 <게이샤의 추억>을 하면서 당시 기모노가 유럽 패션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다른 영화를 위해서도 필요한 옷감 종류와 짜임새와 무늬를 새로 배웠다.” 앳우드는 <슬리피 할로우>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 <가위손>처럼 그저 자유로이 스케치만 하면 될 듯한 영화를 주로 하면서도 재료와 참고서를 차곡차곡 쌓아온 것이다. 그 때문에 그녀가 만드는 영화의상은 오히려 새롭다. 과거와 현재, 판타지와 현실이 만나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디자인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게이샤의 추억>의 기모노는 500년 된 교토의 기모노 공방과 함께 작업했지만 밋밋했던 기모노의 전통 라인과 다르게 여체의 곡선을 드러내도록 디자인됐다. 발끝까지 직선으로 떨어지는 기모노 소매 사이 세필(細筆)로 그린 듯한 곡선이 얼핏 비치며 2000년대 관객의 관능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앳우드는 <시카고>도 비슷한 방식으로 사고했다. 그녀는 뮤지컬을 보고 쓰레기더미나 다름없는 스튜디오 창고를 뒤져 1920년대에 사용됐던 비즈 달린 드레스를 찾아냈지만 “현대 관객이 보아도 글래머러스하게 보이도록” 수선을 했다. 그것이 르네 젤위거가 환상 속에서 스타가 되어 입은 은빛 찬란한 미니 드레스다.

앳우드는 시간여행자처럼 과거와 현재를 오갈 뿐만 아니라 현실과 환상 사이를 넘나드는 재주 또한 지니고 있다. 그녀에게는 <시카고>도 <슬리피 할로우>와 비슷한 점이 있는 동화였다. “<시카고>는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동화 같다. 우리는 현실과 상상의 세계, 즉 무대가 대비되도록 해야 했는데, 일종의 평행우주를 창조하는 것과 같았다.” 핀으로 고정해야 하는 조그만 모자를 쓰고 모피를 걸친 캐서린 제타 존스는 여자 사형수들이 탱고를 추는 <Cell Block Tango>에서 코르셋과 스타킹 차림이 된다. 그 의상은 1920년대에는 판타지였겠지만, 지금 소녀들은 퇴폐적이었던 1920년대 시카고를 상징하는 모자와 모피를 판타지로 볼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과 판타지는 서로 돕고 보완하며 재미있는 결과를 이끌어낸다.

동화책 삽화나 인형옷으로 손색이 없는 화려한 의상을 디자인하면서도 앳우드가 홀로 튀어 보이지 않는 것은 그녀가 애초 영화학도였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잠깐 영화를 공부했던 앳우드는 영화 <랙타임> 현장에서 잡일을 거들었는데, 그 뒤 의상디자이너로 방향을 바꾸게 됐다. “영화 일이란 그런 것이다. 하나를 하면 다른 하나가 연달아 이어진다.” 그 연쇄사슬 중에서도 앳우드에게 가장 중요한 인연이 된 것은 <가위손>으로 시작된 팀 버튼과의 인연이었고, 그것은 다시 <가타카>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 <작은 아씨들> 같은 SF와 동화의 세계로 이어졌다. <가위손>은 플라스틱 블록으로 지은 것 같은 마을에 총천연색 의상을 전시했지만, 위노나 라이더가 눈처럼 흩날리는 얼음 조각 사이에서 춤추는 유명한 장면에 이르면, 그저 순백 드레스뿐이다. 의상과 이야기와 정조가 맞물리는 것이다.

<시카고>
<슬리피 할로우>

영화를 공부했던 앳우드는 의상이 빛나기 위해서는 영화가 빛나야 하며, 무엇보다 조명이 빛나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가타카>에서 따뜻하게 보여야 하는 부분은 난색을 썼지만 조명도 부드러워야 했다. 그 영화는 의상과 조명이 어울리는 멋진 결과였다.” 그녀는 <게이샤의 추억>에서도 목조 가옥의 창살 사이로 새어드는 햇빛과 만지면 미끄러질 듯한 속옷의 촉감을 하나로 매만져 보여주곤 했다. 필름에서 오려내고 싶은 아름다운 의상을 만드는 디자이너. 그러나 옷이 아니라 영화를 생각하는 앳우드는 이런 칭찬을 들으면 서운해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만든 세트는 콜린 앳우드가 디자인한 아름다운 의상들의 배경에 불과하다.” <슬리피 할로우>의 아트디렉터 릭 헨릭스가 보낸 찬사다.

앳우드의 파트너, 팀 버튼

예술로서의 영화작업에 공감하는 사이

<가위손>으로 팀 버튼과 처음 작업했던 콜린 앳우드는 <에드 우드> <슬리피 할로우> <빅피쉬>를 비롯해 여섯편의 영화를 버튼과 함께 만들었다. 버튼은 “영화를 비즈니스로 보기보다 예술로 보는 사람과 일한다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앳우드에게 순수한 감사를 표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마 앳우드도 비슷한 마음이 아닐까 싶다. 동화도 아니고 현실도 아니며, 천진난만하기보다 어둡고 서늘한 버튼의 영화들은, 앳우드에게 비어 있는 캔버스와도 같은 자유를 주었기 때문이다. 고스족처럼 검은 가죽과 쇠붙이를 휘감았지만 유리인형처럼 연약해 보이는 인조인간을 디자인한 <가위손>, 삽화가 아서 래컴의 책장 속으로 들어간 듯 후드 달린 망토와 드레스 옷자락이 그늘지게 흘러내리는 <슬리피 할로우>, 보송보송한 앙고라 스웨터로 미묘한 명암과 슬픔을 건드리는 <에드 우드>는 버튼과 앳우드가 한마음으로 빚어낸 조형의 세계들이었다. 그런 이해와 신뢰가 바탕이 되었기에 앳우드는 다소 성격이 다른 <혹성탈출>도 공을 들여 작업할 수 있었다. 앳우드는 <혹성탈출>을 만들며 유인원들의 계급뿐만 아니라 종족과 그룹까지 염두에 두었고 2천벌이 넘는 보디슈트와 헬멧과 장갑 일체를 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석기시대로 전락했지만 첨단문명의 노예이기도 한 인간의 이중적인 처지를 드러내기 위해 그녀는 5세기 이후 페루와 터키, 아프리카, 일본 의상을 낱낱이 참고했다. 앳우드가 말한 대로 버튼이 “놀라운 안목을 가진 예술가이고, 진심으로 디자인을 이해하고 격려”하기에 가능한 수고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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