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세계의 의상감독들] <중천> <영웅> <란>의 와다 에미
2007-04-05
글 : 박혜명
장인 정신으로 완성시킨 시각적 쾌락

샛노란 잎들이 눈처럼 쌓인 은행나무 숲에서 붉은 옷자락을 휘날리는 두 여인의 결투를 보는 동안, 장이모의 <영웅>은 관객에게 사물을 볼 수 있는 멀쩡한 눈이 있음을 감사하게 한다. 적색, 황색, 녹색, 청색, 백색, 흑색 등 강렬한 원색들이 화면을 온통 물들인 채 파도처럼 출렁인다. <영웅>에서 와다 에미의 의상은 인물을 설명하고 이야기를 풍요롭게 하는 본연의 기능에도 충실하지만 ‘본다는 것’의 쾌락을 만끽하게끔 만든다. 이 작업이 성공적으로 평가받은 다음 장이모의 다음 작품 <연인>에서는 색목인의 문화를 흡수했던 당(唐)대의 분위기를 반영해 <영웅>보다 화려하고 섬세한 디테일을 자랑한다. 그리고 여전히 아름다운 것은 유려하게 흩날리는 동양적인 곡선의 옷자락이다. 여기서는 자칫 충돌을 일으킬 수도 있는 푸른색과 녹색이 주색으로 사용돼 신선한 조화도 보여준다.

<영웅>
<중천>

와다 에미는 온유한 실루엣을 가진 동양 의상의 동적인 미와 아시아적인 원색 체계를 의상에 적극 반영해왔다. 특히 색채 사용에 있어 흥미로운 대비들을 많이 만들어낸다. 지난해 작업한 일본 TV사극물을 보면 차가운 기하학 무늬의 원단을 써서 검은색-노란색, 파란색-주황색 등의 조화까지도 시도하고 있다. 일본 교토 출신인 그는 어릴 때부터 <라이프>와 같은 외국 출판물을 접하고 살았다. “레브론(화장품 브랜드) 광고를 보고 있으면 붉은 색만 20가지 종류가 넘었다. 나는 늘 색채 변화에 유난히 집착을 보여왔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꿈>(1990)에서는 푸른 풀밭 층계들 위로 색색 기모노들이 일본 고유의 색 조화를 이루며 늘어선 모습이 때론 음악을 듣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란>(1985)에서는 지방군주와 그 아래서 분열을 일으킨 세 아들이 각각 황색, 적색, 청색의 대표색을 띤다. 대립하는 세 아들의 색깔은, 합치면 검은색이 되는, 색의 삼원색 요소다. 이들 각각이 거느리는 군대와 깃발도 같은 색을 띤다. <란>의 전쟁신은 원색들의 거대한 충돌이다. 이 생명력 넘치는 비주얼에 반해, 할리우드는 그에게 오스카 의상상 트로피를 안겼다.

와다 에미는 고집스러운 장인 정신과 열정을 발휘하기로도 유명하다. 올해 68살을 맞은 그는 지금도 샘플 작업을 염색에서부터 재단과 재봉까지 손수하고, 염색도 기계염색이 아닌 수작업을 고집한다. 배우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여서, 일례로 피터 그리너웨이와 <프로스페로의 서재>를 작업할 당시 11kg이나 되는 금속 장식의 망토를 86살 먹은 주연배우 존 길구드에게 입히고 오프닝 시퀀스를 촬영토록 했다. <란> 때는 투자에 어려움이 생겨 도중에 예산이 바닥났을 때 자비를 들여 1천벌의 의상을 제작하고야 말았다. “제작자들이 돈을 마저 구했다더라”라는 감독의 말을 전해듣고는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완벽주의를 고집하는 것으로는 구로사와도 고단수라 두 사람은 무려 6개월 동안 <란>의 의상 스케치 작업을 했고 그렇게 쌓인 종이 높이가 20cm나 되었다고 와다 에미는 회고한다. 그러고도 감독은 “음, 이번 것도 좋긴 한데 좀더 좋은 건 없을까요?”라고 되물었다.

<연인>

와다 에미는 의상이나 미술에 관한 한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다. 1939년생으로 전후 가난을 겪어야 했던 그는 열살 때부터, 가진 옷을 수리해 입는 법을 배웠다. “옷을 만든다는 건 내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이미 내가 경험해본 것이었다.” 스무살 때 소규모 공연들의 무대의상과 미술 스탭을 하다가 이쪽 길로 들어서게 된 그는 영화뿐 아니라 연극과 오페라에서도 굵직한 활동을 쉼없이 해왔다. 대표적으로 피터 그리너웨이, 줄리 테이머, 프랑코 제피렐리, 장이모 등이 그와 오페라 작업을 했던 감독들이다. 2005년 12월, 와다 에미는 도쿄에서 크지 않은 개인 전시회를 가졌다. <와다 에미: 교토 그리고 그것을 넘어 1985-2005>라고 타이틀이 붙은 이 전시회는 그가 20년 동안 작업했던 영화, 연극, 오페라의 의상 아이템들을 공개하는 자리였다.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일본에 대한 것과, 내 디자인을 의상으로 구현시키는 사람들에 대해 알고 갔으면 좋겠다. 요즘 사람들은 옷을 구매해야 하는 상품으로만 알고 있다. 그 옷을 만들기 위해 어떤 실을 쓸 것이고, 어떤 색으로 염색을 할 것이고, 어떻게 옷감을 재단하고 어떤 무늬와 장식을 수놓을 것인가 결정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해 <중천>을 계기로 한국을 포함해 중국과 일본의 동아시아 3개국에서뿐 아니라 그리너웨이와 같은 유럽 작가감독과 작업하면서 와다 에미는 동양적인 미가 고유성을 훼손하지 않고 모던한 변화를 거치게끔 노력해온 장인이다. 그 같은 사람에게 러브콜을 던진 할리우드 프로젝트가 유일하게 <게이샤의 추억>(스필버그가 감독으로 내정돼 있던 초기)이라는 사실은 조금 놀랍지만, “내가 더이상 새로워질 수 없다고 생각되는 그때가 은퇴할 때”라며 아직도 불태우고 있는 그의 창작열을 생각하면 크게 아쉽지는 않다.

와다 에미의 오페라 작업들

무대에서도 변함없는 열성과 완벽주의

셰익스피어와 장 콕토의 작품을 좋아하는 와다 에미는 연극 및 오페라 분야의 활동에서도 영화만큼 열성이다. 특히 지난해에는 미국에서 큰 오페라 공연을 두개나 동시 작업했는데, <LA타임스> 표현에 따르면 “두명의 황제를 세우는 일”이기도 했다.

그중 한편은 장이모가 연출하는 <진시황제>. 전체적인 비주얼 컨셉은 <영웅>에서보다 과장되고 복잡하다. 탄둔의 음악이 전하는 대로 “오페라 안에 많은 움직임이 있”고 인물들의 의상이 악기로도 쓰이는 기발한 장면들이 연출된다. 여기서도 와다 에미의 성격을 보여준 일화가 있는데, 준비 기간 중 공연 관계자가 와서 비용 절감 차원으로 “<영웅>하고 시간적 배경이 같으니 병사들 무기라도 대여하면 어떨지” 의견을 물었다 한다. 와다 에미는 “중국인들이 키가 작았기 때문에 소품 크기가 안 맞을 것”이라며 단칼에 거부했다고.

또 하나의 작품은 바로크 시대 음악가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걸작 오페라 <포페아의 대관식>이다. 네로의 연인 포페아가 황제의 정부 역할을 넘어서서 왕관을 노리고 음모를 꾸민다는 것이 줄거리. 감독의 요구대로 “시대를 초월한” 의상을 만드는 동시에 그 시대 풍습을 반영해 모든 출연진에게 맨발로 무대에 오르도록 주문한 것이 포인트. 이 공연의 의상 제작을 위해, 와다 에미는 암스테르담까지 가서 특별 재봉틀을 갖고 왔다. 그 재봉틀은 1994년 <포페아의 대관식>이 암스테르담 공연을 할 때 와다 본인이 설치해주고 왔던 기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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