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과 편집을 이해하는 액션
이처럼 다양한 경험을 통해 정두홍이 정립한 액션론이 있다면 액션은 절대 드라마를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는 것. “영화를 된장찌개라 한다면, 액션은 절대 된장이 될 수 없고, 대신 고추나 양파의 역할을 해야 한다.” 화려한 액션을 슬로모션으로 보여준다면 분명 아름답긴 하겠지만, 영화는 액션만으로 끌고갈 수는 없다. 게다가 액션을 화려한 기술 위주로 생각하다보면 배우에게 부담을 주게 된다. “안 되는 액션을 억지로 시키다보면 연기가 잘 안 되니까 자꾸만 다시 촬영해야 하고, 결국 배우가 지쳐 가장 중요한 요소인 감정 표현까지 할 수 없게 된다. 대신 액션을 약하게 하더라도 감정을 표현하는 데 주력하게 되면 성과가 나온다.” 그의 액션에 대해 일부에서는 ‘잔인하다’는 지적을 한다. 그 역시 그 점을 의식하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독한 본인의 성격이 드러나는 것 아니겠냐며.
정두홍은 액션영화의 지평을 넓혔을 뿐 아니라, 무술감독이라는 스탭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입증해왔다. 불과 10년 전쯤만 해도 액션팀은 현장에서 ‘몽둥이’라고 불리며 무시당해야 했다. ‘검은 양복을 입고 우르르 나와 주인공에게 맞고 뒹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액션팀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하지만 정두홍은 이같은 풍조를 자신의 몸으로 바꿔놓았다. 대역을 하더라도 그는 철저한 프로페셔널 정신에 입각했다. 그가 후배 연기자에게 강조하는 이야기는 “대역은 등으로 연기한다. 네 등판에도 감정이 있다. 프로 대역은 미세한 전율 같은 것으로 등의 감정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에 관한 한 감정에 휘둘리지 않다보니 때론 후배에게 혹독한 선배로 비치기도 한다. 후배가 지치거나 다치더라도 그는 절대 쉬라고 하지 않는다. 스턴트 연기는 감독, 제작사와의 약속이기 때문에 휴식도 일을 끝낸 뒤 챙겨야 한다는 이야기다. 또 정두홍은 액션장면에 관한 한 콘티부터 촬영, 편집까지 책임지는 홍콩식 무술감독 시스템을 소화할 수 있는 충무로의 유일한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액션 동작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카메라로 찍히며 편집되는가에 관한 깊은 노하우를 갖고 있다는 얘기다. 때문에 일부 감독은 그에게 액션부분을 일임하거나, 아예 카메라를 쥐어주기도 한다. 고가의 스턴트 장비를 자비로 구입하는 것도 프로의식의 발로로 보인다. “할리우드의 액션이 뛰어난 것은 결국 첨단장비의 영향이 크다”는 것이 그의 판단. 때문에 그는 순간점프장비나 첨단 매트리스 등을 구입하는 데 수천만원씩 들이고 있다. 장비 사용법을 배우기 위한 수강료 또한 만만치 않지만, 정두홍 감독은 자가용 없이 사는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기꺼이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연극영화과 입시 재수생
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래도 아직도 스턴트 연기자들이 충분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정 감독의 생각이다. 98년부터 보라매공원 체육관에 서울액션스쿨을 운영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무술감독과 스턴트 연기자들을 양성하자는 취지에서 만든 이곳은 후배 4명으로 시작, 현재 25명의 정예 멤버를 꾸리고 있다. 또 6개월마다 희망자를 모집해 무료로 무술연기를 가르치고 있다. <싸이렌>의 김민수, <이것이 법이다>의 양길영, 권승구, <정글쥬스>의 이홍표, 심재원, <수호천사>의 유상섭 등 후배들이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무술감독으로 데뷔했다. 정두홍이 느끼는 또다른 불만은 아직도 일부 현장에서 볼 수 있는 무술감독을 스턴트맨의 대장 정도로 파악하는 시선이다. 그가 바쁜 일과 속에서도 디지털카메라와 편집기를 구입해 연출 훈련을 하는 것이나 연출법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은 다른 현장 스탭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사실 정규적인 영화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점은 그에겐 일종의 콤플렉스로 남아 있다. 게다가 자신의 영화에 관한 지식이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그는 대학 영화학과에 진학하고픈 마음을 품고 있다. “1999년 대학입시 때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응모했는데, 밤새 <반칙왕>을 찍다가 퀵서비스 오토바이를 타고 가 시험을 보고, 돌아와 다시 촬영하기도 했다. 근데 떨어졌다. 지난해엔 <무사> 때문에 응시조차 못했다. 하지만 계속 도전할 거다.” 그는 직접 영화의 전편을 연출할 계획도 갖고 있다. 무술감독으로 뛰어난 역량을 보이면서도 자기 작품을 만드는 홍콩의 정소동이나 원화평처럼. 그는 “내가 감독을 해보고 싶은 것은 단지 드라마 연출에도 능숙해야 액션도 좀더 잘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한국적 와이어 액션'을 꿈꾸며
할 일도 많고 기대하는 사람도 많은데, 정두홍은 요즘 들어 부쩍 ‘약한 모습’을 많이 내비친다. 스스로도 <무사>의 영향이 컸던 탓일 거라고 진단한다. <무사>의 액션장면이 성공적이었다면, 그의 다음 발걸음은 할리우드를 향했을 것이다. 개인적 욕심도 욕심이지만, 그것이 그를 믿고 따라준 후배들에게 책임을 지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분이 그래선지 갑자기 그동안 몸을 혹사했다는 점에 대한 반성도 하고 있다. 쇄골에 12개의 볼트가 박혀 있어 공항검색대를 통과할 때 곤욕을 치르고, 큰 발차기를 하면 허리에 충격이 오는 등 “그야말로 골병이 뭘 의미하는지 알겠다”고 말할 정도다. 그렇다고 그가 한숨만 내쉬고 있을 위인도 아니다. 충무로에서 두 번째 맞는 슬럼프에서 탈출하기 위해 그는 그동안 마음속에 품고만 있던 계획을 서서히 풀어내고 있다. <와호장룡> 이후 할리우드에서 환호를 받고 있는 와이어액션이 그것이다. “홍콩식도, 할리우드식도 아닌 한국적인 와이어액션”이 그의 당면한 숙제다. 이를 통해 자신을 ‘전설로 남기’게 된다면, 해외진출을 위해 진력할 생각이다. “어차피 나는 빈손으로 시작했고, 한때 빈손이 된 적도 있었다. 나는 정말이지 빈손이 되는 것은 두렵지 않다. 가장 두려운 것은 스턴트를 배신하는 것이다”라는 지금의 자세를 계속 간직하는 한, 정두홍이 이번 슬럼프도 빠른 시간 안에 극복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환갑잔치 때 격파시범을 하고 공중돌기를 보여주려는” 필생의 소원도 이룰 수 있을지 모른다.
정두홍이 무술감독한 영화들
1992
*<시라소니>(이일목)
1994
*<게임의 법칙>(장현수)
1995
*<테러리스트>(김영빈)
<리허설>(강정수)
<런 어웨이>(김성수)
1996
<나에게 오라>(김영빈)
<본투킬>(장현수)
1997
<불새>(김영빈)
<할렐루야>(신승수)
<비트>(김성수)
1998
<토요일 오후 2시>(민병진)
<세븐틴>(정병각)
<남자의 향기>(장현수)
1999
<태양은 없다>(김성수)
<쉬리>(강제규)
<유령>(민병천)
2000
<반칙왕>(김지운)
<단적비연수>(박제현)
<리베라 메>(양윤호)
2001
<무사>(김성수)
<흑수선>(배창호·개봉예정)
<피도 눈물도 없이>(류승완·제작중)
<공공의 적>(강우석·제작중)
연도는 개봉 기준. *는 무술지도한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