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이야기의 원형을 찾아서] 동화 <신데렐라>
2007-06-21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재투성이 소녀의 성공 혹은 결혼

원형의 신데렐라

디즈니 애니메이션 <신데렐라>

재투성이 소녀라는 뜻의 신데렐라가 처음 등장한 건 독일의 16세기 문학에서이며, 그 뒤 프랑스의 문학가 샤를 페로의 <선녀 이야기>에 채록되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전설의 시대>를 쓴 안정효는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를 들려준다. “문헌에서 확인해보면 발도 아프고 불편한 신발을 신데렐라가 신게 되었던 까닭은 페로의 실수 때문이었다는 학설이다. 그가 <선녀 이야기>를 채집하면서 vair(은회색 다람쥐 또는 담비의 털)을 verre(유리)로 잘못 듣고 참으로 시적이라고 생각해서인지 그대로 적었으리라는 추측이다.” 정말 그렇다면 재미있는 실수담이다. 신데렐라와 유리구두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아닌가. 영화에서 그 형상이 처음 각인된 건 디즈니가 1950년 만들어낸 동명의 애니메이션 <신데렐라>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대개 거기에서 신데렐라를 눈으로 처음 보았으며 신데렐라에 관해서라면 모두 이 작품 속의 모습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세월이 지나도 빛은 바래지 않아 2005년에는 DVD 특별판으로 출시되기까지 했다. 미국의 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꼬마 때부터 이 영화를 봤다며 원작에는 없는 이 영화만의 추가 스토리를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신데렐라의 드레스를 입혀주는 새와 그녀를 돕는 쥐, 구출을 돕는 개, 또 루시퍼라 불리는 악의 고양이 등 이 한 무리의 동물들이 바로 영화가 창조해 덧붙인 캐릭터들이다.

베스트 신데렐라

신데렐라의 후일담에 관한 가장 공포스러운 상상_히치콕의 <레베카>

“<레베카>(1940)의 스토리는 <신데렐라>와 아주 비슷합니다.” 그렇게 트뤼포가 재차 히치콕에게 말했을 때 그는 재주넘듯 답했다. “여주인공을 신데렐라라고 한다면 댄버스 부인은 못된 언니들 중의 하나가 되겠죠. 이 영화는 오히려 피네로의 <평화로운 집>이라는 희곡에 더 가깝습니다. 그 희곡에서 나쁜 사람은 집 관리인이 아니라 집주인의 여동생입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신데렐라의 시누이인 셈입니다.” 트뤼포의 확신을 절반만 인정한 셈인데, 히치콕이 또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살인은 어두운 거리보다 대낮에 졸졸 흐르는 냇가에서 일어나는 것이 훨씬 재미있습니다. 내가 신데렐라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사륜마차에서 시체가 발견되도록 할 거예요. 그렇게 했는데도 관객에게 등골이 오싹한 기분을 주지 못한다면 내가 오히려 실망하겠죠”.

<레베카>

사륜마차에 함께 탄 시체 대신 시체 같은 인물과 한집에서 살아가는 것이 다를 뿐, <레베카>는 신데렐라 이야기의 완벽한 공포 버전이라 부를 만하다. 왕자님을 만나 궁전에서 살게 된 신데렐라는 정말 오래오래 행복했을까? 만약 왕자님에게 죽은 전처가 있고, 그녀가 전처의 자리를 대신해 선택된 것이라면 이야기는 이제 어떻게 전개될까? 그리고 전처를 모시던 괴기스런 여집사가 그 집에 버티고 있지는 않을까? 우연히 백만장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 뒤 신분상승한 <레베카>의 여주인공이 궁전 같은 집에 입성했을 때 그런 악몽 같은 상상이 벌어진다. <레베카>는 ‘신데렐라, 그 뒤’에 관하여 가장 공포스럽게 상상해낸 영화 중 한편이다.

워스트 신데렐라

원형의 도식성, 감독의 재능을 갉아먹다_웨인 왕의 <러브 인 맨하탄>

이미 오래전 골드 디거(황금을 쫓는 여인이라는 뜻으로)의 대모 마릴린 먼로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 등 당대의 영화들을 통해, 혹은 스스로의 신화 만들기(그녀는 원래 금발이 아니었다)를 통해 일찌감치 할리우드의 신데렐라로 등극한 바 있다. 이 작품들은 대단히 뛰어나지는 않아도 흥겹다. 근래 영화들치고는 <노팅힐>(신데렐라의 남자 버전)이나 더 거슬러 올라가 <귀여운 여인> 정도가 유쾌하다. 그런데 이 정도를 제하면 신데렐라 이야기는 범작이나 실패작이 많은 편이다. 신데렐라 이야기 자체가 워낙 직설적으로 성공과 해피엔딩을 향해 있고, 특히 할리우드의 장르영화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자주 애용되는 통에 그만큼 식상한 작품도 자주 나온다. 사실 이 분야의 최악을 꼽자면 끝이 없다.

<러브 인 맨하탄>

다만 여기서는 <러브 인 맨하탄>(2002)을 최악의 신데렐라 이야기(혹은 가장 실망한 신데렐라 이야기)로 꼽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유는 이 영화가 웨인왕의 것이기 때문이다. 웨인왕의 숨쉬는 듯한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은 이 영화에 부푼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특히 <스모크> <블루 인 더 페이스> 등에서 이야기와 캐릭터의 힘은 웨인왕 영화만의 매력이었다. 브루클린 거리의 다양한 인종과 하층적이지만 온화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구수한 입담이었다. 그런데 <러브 인 맨하탄>에서 호텔 청소부를 하던 여주인공이 우연히 상원의원 후보를 만나 사랑에 빠지자 웨인왕 특유의 따스한 입담은 사라지고 굴곡없고 지루한 신데렐라 이야기의 뻔뻔한 반복만이 남게 됐다. 아무런 해석도, 재치도, 재미도 주지 못한 작품이 만들어졌다. <러브 인 맨하탄>은 할리우드에서 이야기꾼으로 둘째가라면 서운해할 만한 웨인왕이 만든 최악의 이야기가 됐다. 원형 이야기의 도식성을 요리하지 못할 경우, 그 도식이 창작력을 어떻게 먹어치우는지 보여준 최악의 사례 중 하나다.

한국형 신데렐라

성형의 드레스를 입은 신데렐라 혹은_<미녀는 괴로워> <신데렐라>

신데렐라 이야기를 변형 가공하여 만든 두편의 한국영화가 2006년에 나왔다. <미녀는 괴로워>와 <신데렐라>. 신데렐라 이야기를 차용하는 영화들에 엔터테인먼트나 프로페셔널리즘의 세계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신데렐라는 성공신화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공주였으며 잠시 악몽에 빠졌다가 다시 궁의 생활로 돌아가 제 신분을 차지하는 백설공주의 복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어떻게 삶의 밑바닥을 차 올라 위로 계급 상승 혹은 존재 상승할 것인가가 많은 부분 관건이다. 그게 <미녀는 괴로워>의 핵심이다. 반면 <신데렐라>는 원본의 인물 관계를 장르적으로 비틀 때 혹은 신데렐라를 주인공으로 놓지 않고 다른 배역을 주인공으로 놓을 때 어떤 괴담이 가능한지 시도한 것이다.

<미녀는 괴로워>의 주인공 한나/제니는 각각 변하기 전과 변한 뒤의 그들이다. 신데렐라에게 나쁜 계모와 언니들이 있다면 한나에게는 나쁜 살과 체지방이 있다. 그리고 한상준이라는 멋진 왕자님이 있다. 한나는 성형의 도움으로 나쁜 몸을 착한 몸으로 만들어 아름다운 여자로 다시 태어난다. 외양으로는 한나에서 제니가 되지만 한나가 가졌던 노래 실력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완벽한 성공신화의 주인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한나/제니는 그토록 가수가 되고 싶던 꿈을 드디어 이루게 된다. 그 모든 걸 가능하게 하는 게 마법 같은 성형이다. 그러므로 성형은 여기서 누설해서는 안 되는 금기다. 신데렐라가 성공을 꿈꿀 때 마술의 힘을 빌렸다면, 한나/제니는 의술의 힘을 빌려 성공담에 이른다.

<미녀는 괴로워>
<신데렐라>

성형에 대한 이야기가 또 한편 있었고 제목이 공교롭게도 <신데렐라>였다. 그러나 이 영화가 이런 제목을 달게 된 건 주인공의 성공담 때문이 아니다. 공포영화라는 장르에 적합하게 영화는 무서운 계모로 초점을 이동한다. 사실 이 영화는 신데렐라가 아니라 신데렐라의 계모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다. 그리고 나서 <푸른 수염>과 ‘여귀’와 신데렐라 이야기의 담합이라 부를 만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주워온 딸(신데렐라)의 얼굴을 벗겨 화상 입은 친딸의 얼굴에 옮기는 성형외과 의사이자 엄마. 굴뚝 먼지를 청소하는 대신 얼굴 가죽이 벗겨지는 고통을 겪어야 했던 공포 버전의 신데렐라가 원혼이 되어 사람들을 죽여나간 것이다.

이 두 영화가 변형의 모티브를 다루되, 변하는 건 몸 자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몸을 바꾸거나 몸을 강탈당하는 이야기, 요즘 한국형 신데렐라 이야기의 성향이다. <미녀는 괴로워>는 원작에 담긴 변형 욕망을 말초적으로 도입해 흥행했고, <신데렐라>는 그 변형의 욕망을 차용하되 관계의 사슬을 바꿔보려다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

ICON_착한 마녀

혹시나 이 분야의 ’공식 신데렐라’라도 지정해야 하는 일이 온다면 <귀여운 여인>의 여주인공 비비안이 왕관을 쓸 가능성이 높다. 비비안 역을 했던 줄리아 로버츠도 이 영화로 할리우드의 신데렐라가 됐다. 하지만 영화에서 비비안이 그녀 혼자 힘으로 모든 걸 해낸 건 아니다. 처음에 비비안은 궁전 같은 호텔이 낯설었고, 잠옷 바람으로 돌아다니는 실례를 범했으며, 식탁 위에 놓인 그 많은 포크 중 어느 것이 고기를 썰 때 필요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 모든 것을 가르쳐준 것이 호텔 지배인이다. 강직해 보이면서도 유쾌하고 또 너그럽기까지 한 그가 창녀 비비안을 완벽하게 상류사회에 어울릴 신데렐라로 바꿔놓는다. 재투성이 아가씨를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게 바꿔주는 착한 마녀. 이런 인물의 출현은 신데렐라 이야기의 아이콘과도 같다. 말하자면 <미녀는 괴로워>에서 한나가 제니로 살기 위해 정말 필요했던 사람은 성형외과 의사다. 그는 좀 허술해 보여도 완벽하게 전신성형을 해내는 놀라울 정도의 실력자다. 게다가 순진하거나 인간성도 좋아 보이고 유머까지 겸비하지 않았나. 신데렐라에게 착한 마녀가 있는 것처럼 영화 속 신데렐라들에게도 꼭 하나씩 그만한 ‘조력자’들이 있다. 사실 신데렐라의 성공기는 언제나 그들의 도움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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