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이야기의 원형을 찾아서] 비극적 신화 <오이디푸스 왕>
2007-06-21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분노는 끝이 없어라

원형의 오이디푸스

찰스 비더의 <길다>

<길다>

필름 누아르만큼 (프로이트적인) 오이디푸스의 운명이 강하게 묻어나는 장르도 없을 것이다. 찰스 비더의 <길다>(1946)는 필름 누아르가 오이디푸스적인 갈등 관계를 차용하는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어느 허름한 도박장에서 크게 한건 올리고 나오던 조니는 괴한의 습격을 받는다. 이때 조니의 도박 솜씨를 눈여겨본 발린이 조니를 도와주고 자기 밑에서 일할 것을 제안한다. 큰 규모의 카지노를 운영하는 발린 밑에서 촌뜨기 조니는 꽤 세련된 도시인으로 변모하고, 상징적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발린의 충실한 심복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아버지의 여인 길다가 전면화하는 순간 삐걱거린다. 흔히 팜므 파탈로 불리는 여인들은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 갈등을 도입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여자를 탐해 아버지를 증오하는 오이디푸스적인 인물이 된다. 조니 역시 길다를 얻기 위해 아버지를 죽인다. 오이디푸스적 딜레마가 어머니를 향한 성적 욕망과 아버지를 향한 증오로 요약될 수 있다면, <길다>는 ‘사악한 아버지’라는 설정을 통해 조니의 선택, 즉 살부 행위에 면죄부를 부여한다. 마치 어머니를 향한 욕망의 소산인 오이디푸스의 살부 행위를 신의 장난이거나 무지의 결과로 포장했듯이.

베스트 오이디푸스

세상 모든 아버지들과의 투쟁_파졸리니의 <외디푸스 왕>,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

<복수는 나의 것>

어머니를 향한 이성애적 욕망과 아버지를 향한 적개심. 오이디푸스 신화의 호명은 흔히 이 두 관계 속에서 이뤄지곤 한다. 파졸리니의 <외디푸스 왕>(1967)과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1979)은 아버지를 향한 적개심으로 똘똘 뭉친 작품들이다. 파졸리니에게 아버지는 사회의 법, 제도, 이데올로기이자 파시즘의 이명이고, 심지어 “나의 모든 투쟁은 아버지와의 투쟁이다”라고까지 선언하기에 이른다. 파졸리니가 파시스트 장교 출신이었던 아버지에게 느꼈던 무의식적 살부 충동의 원형을 오이디푸스의 삶에서 발견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외디푸스 왕>에서 날것 그대로인 사막의 이미지가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 자체라면,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살은 오이디푸스가 짊어져야 하는 거센 운명처럼 보인다. 파졸리니가 보여주고자 하는 오이디푸스는 신의 장난으로 비극적 삶을 마감하는 오이디푸스가 아닌, 아버지에게 일방적으로 희생당해야만 하는 오이디푸스였다. 파졸리니는 원작과 달리 맹인이 된 오이디푸스를 미소년과 동행하여 현대 이탈리아를 떠돌게 함으로써, 여전한 아버지의 억압과 현재진행형인 오이디푸스적 투쟁을 강조한다.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적 저항의 백미는 <복수는 나의 것>의 엔딩 장면일 것이다. 암시적인 방식으로 아버지를 향한 적개심을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 아들은 아버지로 상징되는 사회가 금지하는 모든 것을 자행하다 숨을 거둔다. 아비가 산 정상에서 아들의 유해를 뿌리는 순간, 아들의 유해는 중력의 법칙마저 거부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선다. 마치, “난 결코 아버지 손에 의해 움직이지 않을 테야”라고 말하듯. 아들의 분노는 참으로 끝이 없어라.

워스트 오이디푸스

아버지에게 순종해버린 아들은 매력없다오_닐 조던의 <두 번째 이별>

<두번째 이별>

<두 번째 이별>(1991)은 닐 조던이 오이디푸스 신화를, 더 정확하게 말하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멜로드라마의 구조에 녹여낸 전형적인 가족 로망스다. 아일랜드의 어느 해변 마을에 선글라스를 낀 미모의 중년 여인 레니가 도착하고, 그 촌구석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자태에 10대 후반의 지미는 그만 흠뻑 빠져버린다. 과거 마을에 찾아온 적이 있었던 레니는 추억의 노래를 부르고, 지미는 그녀의 노래에 반주로 정성스레 화답한다. 하지만 지미가 이 곡을 아버지에게 배웠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레니는 그가 자신의 아들임을 직감적으로 깨닫는다. 아들의 거침없는 애정표현에 당황하는 레니, 그런 아들을 만류하는 아버지, 그리고 그러한 아버지를 질투하는 아들, 이 콩가루 가족의 애증 관계가 펼쳐질 무렵, 진실 앞에서 절규하던 아들은 이내 ‘아버지-문명에의 순종’이라는 ‘반(反)파졸리니적인 미덕’에 무릎을 꿇는다.

<두 번째 이별>은 오이디푸스적 내러티브를 뒷받침하는 서브플롯의 재미가 쏠쏠하기도 한데, 지미의 여자친구인 로즈가 야만적인 청년을 유순하게 길들이는 과정이나, 우리에서 도망친 동물들(자연적 욕망)이 제멋대로 거리를 뛰어다니는 엔딩 장면 등은 꽤 짜릿하기도 하고, 언뜻 욕망의 해방을 예찬하는 장면 같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다시 우리 안으로 감금될 동물들처럼, 결국 영화 속 욕망은 문명의 감옥에 갇힌 수인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어떤 평자에게서는 베스트의 영광이 가능했을 수도 있겠으나,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분노가 끝이 없기를 바라는 내 영화적 취향 덕택에 ‘워스트’의 오명을 쓰고 말았으니 다소 억울할 수도 있겠다.

한국형 오이디푸스

재앙의 원인은 네 안에 있다_박찬욱의 <올드보이>

‘오이디푸스’와 ‘오대수’, 어쩐지 어감이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억지로 그렇게 읽다보면 꽤 유사하게 느껴지는 두 이름이다(아님 말구). 주인공 이름이야 어쨌든 간에, <올드보이>가 원작에 오이디푸스 신화를 덧붙임으로써 원작을 넘어선 영화로 완성될 수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오이디푸스 신화를 비극으로 완성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원형적인 몰락의 드라마를 통해 자아 탐구의 과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스핑크스를 물리침으로써 공동체의 명예를 대표하던 위치에서 공동체의 수치로 전락하는 몰락의 드라마. 하지만 그 몰락은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내적 진실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누가 내 공동체에 이러한 재난을 몰고 왔는가, 하는 질문 속에 진실을 추구하는 오이디푸스. 어미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도, 맹인 예언자인 테이레시아스도 그런 오이디푸스를 적극적으로 만류하지만, 진실을 추구하려는 오이디푸스의 의지는 좀처럼 꺾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끝내 발견한 진실은 바로 자기 자신의 죄였다. 스핑크스의 질문은 당신은 인간에 대해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오이디푸스는 인간에 대해 알았기에 인간의 왕이 될 수 있었지만, 모든 인간을 다 안다고 자신했던 그가 정작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몰락의 대가로 돌려받은 것은 바로 자신의 ‘죄-진실’이었다.

<올드보이>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원하는 것 역시 단지 범인이 누구인가 하는 사실이 아니라 나를 감금한 이유(진실)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었다. 오대수는 타자에게서 진실을 찾았지만, 그 진실은 바로 자신에게 있었다. 근친상간적 설정이 오이디푸스 신화와 <올드보이>의 표면적 유사성이긴 하지만, 재앙의 원인이 타자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 있음을 발견하는 내러티브적 궤적은 이 두 이야기가 만나는 가장 중요한 접점일 것이다. 특히 자신의 삶을 몰락시킬 진실 앞에서 이 두 사람이 스스로에게 내리는 처벌은 너무도 닮아 있다. 오이디푸스가 모든 것을 안다(see)는 오만함에 빠져들도록 했던 눈을 찌름으로써 자신의 ‘죄-진실’에 책임을 졌던 것처럼, 오대수 역시 밝혀진 죄의 원인인 혀를 절단함으로써 스스로 단죄한다. 이러한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신탁에 의해서 이뤄진 것처럼, 오대수가 사라진 공중전화 부스 앞을 포착하는 극부감의 카메라 역시 비 내리는 거리 위에 새겨진 진입금지 표지를 ‘신의 시선으로’ 내려다본다. 들어서면 안 되는 길에 들어선 자들에게 부여된 가혹한 운명, 그것이 바로 오대수의 삶인 것이다.

아이콘_눈

시각적 아이콘은 아니지만,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설정은 무엇보다 ‘실명’과 관련한 장면일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실명은 단지 눈을 멀게 하는 행위가 아닌 일종의 상징적 자살로서 설명되곤 한다. 그는 모든 것을 ‘본다-안다’(see)고 자만하게 만들었던 자신의 눈을 찌름으로써 자신의 지적 오만함을 처벌하는 상징적 죽음을 맞이한다. 이러한 면에서 오이디푸스의 실명 행위는 참으로 적절한 행위이다. 세상 모든 것들을 안다고 자신했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던 오이디푸스의 결점은 우리 눈의 한계와 너무도 닮았다. 눈 역시 세상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은 볼 수 없지 않은가. 영화에서 실명장면은 무척 강렬한 이미지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은데, 아들이 아버지의 눈을 찔러 살해하는 장면이 압권인 <블레이드 러너>가 대표적이다. 안드로이드 기계인간인 아들은 타이렐사의 사장이자 자신을 창조한 아버지를 찾아와 생명을 연장시켜줄 것을 요구한다. 아들에게 죽음의 운명을 부여했던 아버지는 그 요구를 거부하고, 아들은 그에게 입맞춘 뒤 그의 눈을 찌른다. 아들은 아버지 인간이 지적 오만함을 처벌하고 아버지에게서 비롯한 오이디푸스적 운명을 거부하는 것이다. 오~ 아들의 분노는 끝이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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