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의 오디세이
마리오 카메리니의 <율리시즈>
커크 더글러스와 실바나 망가노가 주연한 <율리시즈>(1953)는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Odyssey)에 충실한 고전 사극이다. 트로이 전쟁을 노래한 <일리아드>에 이어지는 <오디세이>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인 오디세우스(로마식 이름은 율리시스)가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 10년 동안의 모험담을 그리고 있다. 그는 ‘트로이의 목마’를 고안한 지혜로운 영웅의 대명사다. 이 영화는 지금의 터키에서 그리스, 이탈리아반도,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지중해의 수많은 섬을 표류한 오디세우스의 여정과 정절을 지키며 구혼자들을 물리치는 페넬로페 왕비 이야기, 마침내 돌아온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구혼자들에게 복수하는 내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네마 천국>에서 사랑의 열병을 앓는 토토가 “이 지겨운 여름은 언제 끝나지?”라고 탄식할 때, 야외상영되던 영화가 바로 <율리시즈>다.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가 화가 나서 커다란 바위를 던지고, 오디세우스가 도망가면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유명한 에피소드가 화면에 비친다. 이어서 토토의 눈앞에 마치 페넬로페처럼 엘레나가 나타난다.
베스트 오디세이
가장 독창적이고 철학적인 율리시즈_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율리시즈의 시선>
오디세이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영화들 중에는 코엔 형제의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2000), 안소니 밍겔라의 <콜드 마운틴>(2003)처럼 에피소드를 현대적 상황으로 변용한 것과 앙겔로풀로스의 <율리시즈의 시선>(1995)이나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가 그랬듯 여정(journey)이라는 틀과 자아 혹은 세상의 발견이라는 주제의식을 차용하는 편에 방점을 둔 부류가 있다. <율리시즈의 시선>은 잃어버린 그리스 최초의 영화 필름을 찾기 위해 발칸반도를 여행하는 영화감독 A(하비 키이틀)의 이야기를 다룬다. 발칸반도는 중세 이후 분쟁과 전쟁이 끊이지 않은 상처로 얼룩진 지역이다. A는 필름의 행방을 좇아 곳곳을 여행하면서 과거의 역사와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린다. 고전 오디세이의 모티브는 변용된 모습으로 곳곳에 숨어 있다. 가령, 철거된 거대한 레닌 동상을 실은 배가 국경수비대를 지날 때 “배에는 아무도(nobody) 타고 있지 않다”고 대답하는 장면은 폴리페모스에게서 도망칠 때 오디세우스가 짜낸 지략에 대응된다. 또 A가 여행길에 만나는 세명의 여자는 오디세우스가 만나는 마법사 키르케, 여신 칼립소, 나우시카 공주를 연상시킨다. 발칸반도를 떠도는 A는 현대판 오디세우스로, 이 영화는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즈>와 더불어 오디세이에 대한 가장 독창적인 해석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철학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워스트 오디세이
진짜 바다 위에서 방랑만 한 율리시즈_케빈 레이놀즈의 <워터 월드>
<워터 월드>(1995)의 신화적 상상력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세계가 혼합된 형태다. 돌연변이 ‘물고기 인간’(케빈 코스트너)은 오디세우스보다는 일리아드의 영웅 아킬레우스와 더 닮았다. 더없이 용맹하나 성정이 불같은 아킬레우스가 트로이전쟁의 불씨가 된 헬레나를 구하기 위해 전쟁을 했던 것처럼, 물고기 인간은 헬렌을 ‘드라이랜드’로 데려가기 위해 해적들과 싸운다. 퇴화한 아가미와 물갈퀴를 지닌 물고기 인간은 인간 영웅 오디세우스보다는 반신반인 아킬레우스적 인물이다. 하지만 드라이랜드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는 그의 행동은 오디세우스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해적 보스의 한 눈을 멀게 만드는 에피소드도 오디세이의 내용과 유비적으로 읽을 수 있다. 영화의 배경은 극지방이 녹아서 온 세상이 물에 잠긴 미래다. 해상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바다 위에 직접 세트를 짓고 초유의 제작비를 쏟아 부은 이 영화는 무참한 실패로 기록되고 말았다. 다수의 SF영화, 특히 우주를 유영하는 <에이리언> <스타워즈> 등은 ‘오디세이적 구조’를 차용하지만, <워터 월드>는 수사적 의미로 항해가 아니라 진짜 바다를 표류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체화하지 못한 신화적 상상력이 도달하는 황량한 종점을 보여주었다.
한국형 오디세이
소외된 남자와 여자의 인간적 존엄성을 회복하는 여정_김인식의 <로드무비>, 송일곤의 <꽃섬>
오디세이의 핵심이 모험하는 여행 이야기라고 한다면, 한국의 전통에서 그에 비견할 만한 것은 ‘주몽 설화’와 ‘바리데기 설화’가 있다. 주몽은 건국할 땅을 찾아 길을 떠났고, 바리데기는 아버지의 약을 구하러 멀고 먼 서역으로 간다. 그러나 현대는 신화의 아우라가 벗겨져나간 시대다. 이 시대, 한국적 오디세우스의 후손은 더이상 건국의 주역 주몽이거나 여성 영웅 바리데기가 아니라 ‘무엇’을 찾아 ‘어디’로 떠나는 방랑객일 뿐이다. 따라서 그들의 여정을 담은 ‘로드무비’는 현대영화가 재현하는 ‘오디세이’이다. <로드무비>(2002)와 <꽃섬>(2001)은 한국형 오디세우스인 남자들과 여자들의 여정을 담은 영화다. 영웅적이고 신화적인 세계를 표상한 <일리아드>가 끝난 지점에서 오디세우스의 여행은 시작되고 여정이 마감될 때 그는 완전히 인간의 세계에 안착한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오디세우스는 신들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하강하는 인물이었다면, <로드무비>와 <꽃섬>의 주인공들은 가장 소외된 지점에서 길을 떠나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성을 회복하고 돌아오는 인물들이다.
두 남자와 한 여자가 동행하는 여행은 낯설지 않다. 70년대 <삼포가는 길>(이만희), 80년대 <고래사냥>(배창호), 90년대 <세상 밖으로>(여균동)에서 우리는 그런 풍경을 보았다. 21세기 <로드무비>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사랑에 울고 세파에 에인 가슴을 길 위에서 위로받는다. “길이 끝나는 저기에 아무것도 없다”며 절망하는 사람도 있지만, <로드무비>의 석원과 대식은 포기하지 않는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오디세우스의 항해처럼 이들도 길 위를 헤매지만 결국 종착역에 도착한다. <꽃섬>의 세 여자는 “모든 슬픔과 불행을 다 잊을 수 있는” 꽃섬에 가려고 하지만 길은 멀고 험난하다. 마치 포세이돈이 심술을 부려 오디세우스의 배를 목적지 반대방향으로 끌어가듯, 세 여자는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엉뚱하게 폭설로 뒤덮인 산속에 버려진다. 그런 불운도 있었지만 길에서 만난 트럭 운전수, 밴드 일행, 선주(船主) 박희진은 오디세우스를 돕는 여신과 여인들처럼 이들을 도와 꽃섬으로 인도한다. 이제 오디세우스가 돌아온 이타카는 지도 위에 존재하는 공간으로서 의미를 잃었다. 지금 우리가 찾아갈 이타카는 현실의 지리적 좌표가 아니라 심리적 부표를 찾아 떠나야 하는 곳이다. 로드무비가 잘 보이지 않는 최근의 경향이 이젠 마음 속 부표마저도 유실된 시대를 반영하는 것인지 질문을 던져본다.
아이콘_세이렌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새인 요괴. 머리가 6개 달린 뱀 스킬라와 배를 통째로 삼키는 카리브디스 등과 함께 오디세우스의 항해를 방해하는 바다 괴물이다. 세이렌은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뱃사람을 홀려 바닷물에 빠져 죽게 만든다.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섬을 지날 때 선원들로 하여금 밀랍으로 귀를 막게 하고 자신은 배의 기둥에 몸을 묶어 무사히 세이렌의 유혹을 이겨낸다. 세이렌은, 자신이 낸 수수께끼를 맞힌 오이디푸스가 나타나자 바닥에 머리를 찧고 죽는 스핑크스처럼, 오디세우스를 유혹하지 못하자 스스로 바다에 빠져 죽는다. 세이렌은 오디세이의 다른 괴물들과는 달리 거부하기 힘든 아름다움이 치명적인 위험이 되는 독특한 존재다. 이런 유혹을 극복하려 오디세우스가 돛대에 몸을 묶는 행위는 예술이나 영화를 향유하는 태도에 대한 은유로 해석되기도 한다. 오디세이를 현대적으로 변용한 영화 코엔의 영화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에서 세이렌은 노래로 탈옥수를 유혹하는 여자로 형상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