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이야기의 원형을 찾아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2007-06-21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
무엇도 막을 수 없는 불같은 사랑 그리고 비극

원형의 로미오와 줄리엣

프랭코 제피렐리의 <로미오와 줄리엣>

<로미오와 줄리엣>

프랭코 제피렐리의 1968년작 <로미오와 줄리엣>은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가장 충실하게 영화적으로 번안한 작품이며 뭇 남성들에게 올리비아 허시를 줄리엣의 원형으로 기억하도록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분명 당대의 대중적인 드라마였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에는 지식인들의 전유물처럼 느껴지곤 해서 흥행에서 신통치 않은 결과를 가져왔는데,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셰익스피어를 지향했던 제피렐리의 이 작품은 흥행에서 엄청난 성공을 기록하기도 했다. 원작의 주인공들과 거의 같은 나이였던 레오나르도 화이팅과 올리비아 허시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10대의 열정을 풋풋하게 그려냈고, 첫날밤에 대한 감독의 관능적인 해석이 신선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었다. 제피렐리는 시적이고 문어체적인 대사들이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갈 수 있도록 세팅을 세심하게 배치하고 두 가문의 갈등을 색감을 통해 대비시킴으로써 시대극을 감상하는 쾌미를 선사했다. 청춘의 아름다움과 덧없음을 동시에 들려주는 주제곡 <A Time for Us>의 애잔한 멜로디로 영화의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 해주었다.

베스트 로미오와 줄리엣

가장 미국적이고 현대적이며 정치적인 로미오와 줄리엣_스파이크 리의 <정글 피버>

<정글 피버>

스파이크 리의 1991년작 <정글 피버>는 집안의 갈등을 흑백간의 인종적 문제로 치환한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던 중견 흑인 건축가 플리퍼(웨슬리 스나입스)는 어느 날 이탈리아계 여비서 앤지(애너벨라 시오라)와 사랑에 빠진다. 불장난처럼 시작된 그들의 관계는 불륜이라는 사실을 차치하고도 인종과 계급 문제와 연관된, 극복할 수 없는 편견과 인종적 갈등 때문에 위기를 맞는다. 플리퍼의 부인을 주축으로 한 흑인 여성들은 플리퍼의 외도 자체가 아니라 그가 피부색이 하얀 여성에게 갔다는 것 때문에 분노하고, 앤지의 아버지는 그녀가 흑인과 놀아났다며 구타를 가하며, 그녀의 친구들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플리퍼와 앤지가 사랑을 나누는 것을 목격한 경찰이 그것을 한치의 주저함없이 강간으로 간주하여 제지하는 영화의 장면은 이들이 극복해야 하는 편견의 간극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지 한눈에 보여준다. 현대사회에서 성인의 결혼에 집안의 반대가 결혼의 결정적인 장애나 비극적인 결말로 곧장 연결되기에 무리가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작품이 설정한 인종과 계급이라는 ‘혼사장애’의 구조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가장 미국적이며 현대적이고, 정치적인 해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두 연인의 죽음으로 두 집안의 갈등이 해소되었지만 이 작품은 이 흑백의 연인이 결국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로맨스의 종말보다 로맨스로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이 더 잔혹하지 않은가.

워스트 로미오와 줄리엣

가장 타락하고 뻔뻔한 로미오와 줄리엣_‘트로마필름’의 <트로미오와 줄리엣>

<트로미오와 줄리엣>

로이드 카우프먼과 마이클 허츠가 설립한 ‘트로마필름’의 <트로미오와 줄리엣>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갖고 있는 낭만성과 비극성을 실컷 조롱하는 영화다. 로이드 카우프먼과 제임스 건이 감독한 이 영화는 트로마필름의 다른 영화들처럼 초저예산적 상상력과 엽기적인 코드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재해석하는데, 그 모든 금기를 다 걸고넘어지며 아무렇지도 않게 끌어들이는 그 뻔뻔함과 재기발랄함에 배꼽을 잡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작품이 워스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작품 자체에 대한 가치평가라기보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가장 타락한 버전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다. 뉴욕의 저예산 포르노 필름의 공동 설립자였던 몬티Q와 캐플릿은 여자 문제로 갈등이 생겨 원수지간이 된다. 빈민가에서 온갖 범죄에 노출되며 살아온 몬티Q의 아들 트로미오와 캐플릿의 성도착적인 보호 아래 커온 딸 줄리엣은 기괴한 코스튬 파티에서 만나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배우하고 별로 닮지 않은 고무인형들의 여기저기 잘려 피를 줄줄 흘리는 장면이 즐비한 스플래터무비인 이 영화는 동성애는 일상다반사로 여기며 근친상간은 ‘엿먹으라 그래’ 하면서 뛰어넘는다. 이 작품이 셰익스피어에게 바치는 최고의 경의는 그의 작품을 포르노로 패러디하고 정전에 바쳐진 숭고함을 박살내는 것이다.

한국형 로미오와 줄리엣

남남북녀의 건널 수 없는 다리_강제규의 <쉬리>

한국 사회에서 결혼은 여전히 집안의 결합이라는 의미가 강하기는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것이 결정적인 장애가 되기에는 시효가 조금 지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런 요소가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이 죽음을 통한 사랑의 완성이라는 비극적이고 극단적인 결말로 이끌지는 않지만 최초의 갈등을 유발하는 효과적인 소재로 활용된다.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했던 TV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는 대조적인 두 집안의 가풍과 어머니 사이의 미묘한 갈등이 두 연인의 결합을 방해한다는 것이 기본 설정이었다. 그런 식의 갈등은 홈드라마에서 꾸준히 반복, 변주되었는데 결국은 사랑이 모든 것을 극복하게 된다는 식의 결말에 이른다. 최근 김성욱 감독의 영화 <못말리는 결혼>도 전통을 고수하는 집안과 강남 큰손이라는 대조적인 가풍 탓에 남녀의 결합이 위기를 맞지만 역시 코믹한 해법을 제시한다.

<쉬리>
<쉬리>

원작의 비장미와 결코 극복할 수 없는 대립을 기반으로 연인의 사랑이 형상화된 작품은 아마도 <쉬리>일 것이다. 여기서 ‘가문’은 남과 북이라는, 타협하기 어려운 조국으로 변주된다.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감추고 캐플릿가의 가면무도회에 참석한 로미오처럼 이방희는 자신의 신분과 조국을 감추고 국가 일급 비밀정보기관의 특수비밀요원 유중원에게 접근해 결혼한다. 거짓으로 시작된 사랑에 진심으로 빠져들면서 둘의 관계는 죽음을 내포한 비극적 결말로 달려가게 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살상무기인 액체폭탄 CTX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위한 극약에 비견될 만하다. 줄리엣이 마신 극약이 처음에는 둘의 사랑을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오해 속에서 둘을 죽음으로 이끈 것처럼 CTX는 이방희가 유중원에게 접근하도록 만드는 전략적 장치의 핵심에 있는 동시에 죽음으로 둘을 갈라놓을 수밖에 없는 원인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문의 대립이 그 안에 속한 개인의 사랑과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지를 보여주는 것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이었다면 <쉬리>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개인의 사랑을 얼마나 비극적인 파국으로 이끌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이 비교적 가문에서 자유로워진 이 시대에 셰익스피어의 문제의식이 유효하지 않은 것처럼 <쉬리>가 제기한 이데올로기로 인한 개인의 비극이라는 문제도 시대착오적 해석으로 전락할 날이 빨리 오기를 고대할 뿐이다.

아이콘_가면무도회

<로미오와 줄리엣>

서로 원한관계에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만날 수 있는 것은 ‘가면무도회’때문이다. 캐플릿과 몬테규라는 줄리엣과 로미오의 성은 그들의 결합을 방해하는 외부적 조건들을 상징적으로 통합한다. 줄리엣이 로미오에게 ‘장미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해도 달콤한 향기엔 변화가 없을 것을. 로미오도 이름이 로미오가 아니더라도 이름과는 상관없이 사랑스런 완벽함을 간직할거야. 로미오, 그대의 이름을 버려요.’ 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름’이 그들이 극복해야하는 모든 외형적 조건이라면 ‘장미’는 사랑 혹은 존재의 본질일 것이다. ‘가면’은 보통 진정한 자아를 가리는 도구로 사용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외부적 장애물을 초월하여 두 연인이 서로의 눈동자를 맞추며 손과 입술의 ‘기도’(실제로는 입맞춤)를 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한다. 제피렐리의 작품에서 우아하게 재현된 무도회장면은 바즈 루어만의 작품에서는 MTV 스타일로 구현되었다. 로이드 카우프만과 제임스 건은 젖소분장을 한 트로미오와 소프트 포르노적인 분위기로 우스꽝스럽게 변주한다. 이처럼 무수한 로미오와 줄리엣들은 ‘가면무도회’의 카니발적 분위기 속에서 사회적 관계로부터 일탈하여 순수한 사랑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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