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란티노의 새로운 놀이동산에 참여할 준비가 되었는가. 200km의 속도에 몸을 싣고 뻑적지근하게 한판 놀아보자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제의 <데쓰 프루프>는 언제보다도 단순하고 직접적인 상업영화다. 하지만 현대영화의 악동이라는 고정화된 이름 뒤에서 타란티노는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결코 버리지 않으며, 화끈한 오락영화 <데쓰 프루프> 역시 그 점을 기가 막힌 영화적 인용과 오마주로 입증한다. B급영화와 익스플로이테이션영화, 그라인드 하우스 영화를 아우르는 <데쓰 프루프>를 통해 타란티노의 현재를 조명해본다.
대체 B급영화란 무엇인가. 딱딱하게 정의하자면 B급영화는 30~40년대 미국에서 생산된 저예산 장르영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B급영화가 70년대 후반부터 메이저 장르영화의 영역으로 스며든 지 3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사전적인 의미는 별 쓸모가 없어 보인다. 좀더 체감적으로 풀어보는 건 어떨까.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의 재기 넘치는 표현에 따르면 당신이 “감옥이나 철장에 갇힌 여자가 나오거나, 이탈리아인들의 식인행위나 흑인 뱀파이어가 나오거나, 혹은 <사탄의 사디스트>처럼 제목이 아주 선정적이고, 게다가 제목이 영화의 플롯보다 더 기억에 남는 장르영화”를 보고 있다면 그건 바로 B급영화란다.
과연 요즘 시대에 진정한 B급영화가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쿠엔틴 타란티노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동시개봉관에서 B급영화를 보던 흥분을 21세기의 멀티플렉스에서 되살리겠노라고 자신한다. “관객과 대화하는 인터랙티브한 영화가 될 것”이라며 그가 3년 만에 내놓은 성찬의 제목은 <데쓰 프루프>. 타란티노는 어린 시절 그라인드 하우스와 드라이브인 시어터에서 동시상영하던 B급 익스플로이테이션영화들(78쪽 참조)의 주형에 자신만의 주물을 부어서 <데쓰 프루프>를 만들었다. 찬바라 익스플로이테이션(사무라이영화)와 쿵후영화를 새롭게 해석해서 <킬 빌>을 만든 지 4년 만에 저급한 싸구려 B급영화의 관습과 외양을 그대로 복제해 기이한 영화적 경험을 창조해낸 것이다. 이런 모험이 가능했던 이유는 오직 한 가지다. 이 남자의 이름이 ‘쿠엔틴 타란티노’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타란티노의 거실에서 시작됐다
<데쓰 프루프>는 정확하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텍사스 오스틴의 유명한 라디오 DJ 정글 줄리아(시드니 타미아 포이티어)는 친구 알린(바네사 펄리토), 셰나(조던 라드)와 함께 오랜만의 즐거운 주말 저녁을 보낼 참이다. 그러나 여자들을 노리는 살인마 ‘스턴트맨 마이크’가 그녀들에게 다가온다. 그의 무기는 텍사스 슈퍼마켓에서 구입한 전기톱이 아니라 자동차다. “이 차에 타면 절대 안 죽어. 특별 제작됐거든. 영화 보면 완전 박살난 차에서 사람이 멀쩡히 살아나오지? 요즘엔 물론 CG가 대세지만, <배니싱 포인트>나 <매리와 래리>를 제작하던 시절에는 진짜 사람이 모는 진짜 차들이 부딪쳤어. 그래서 스턴트팀은 차에 탄 사람이 어떤 충격에도 죽지 않도록 ‘데스 프루프’(防殺: 사망방지) 차량을 특수 제작하게 됐지.” 문제는 이 차량이 오직 운전석만 100% 데스 프루프라는 사실이다.
스턴트맨 마이크의 1차 행각이 끝나고 나면 영화는 14개월 뒤의 테네시주로 넘어가면서 첫 번째 챕터와는 화면 색감과 촬영 기법마저 다른 완벽하게 새로운 작품으로 돌변한다. 스턴트맨 마이크의 다음 타깃은 네명의 또 다른 여자들이다. 두명의 스턴트우먼인 킴(트레이시 톰스)과 조이 벨(조이 벨 자신), 의상담당 애버나시(로자리오 도슨)와 여배우 리(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테드)는 촬영이 잠시 쉬는 틈을 타서 휴가를 낸다. 하지만 이 언니들은 보통 여자들이 아니다. 70년대 카체이스 영화에 열광하는 조이 벨은 <배니싱 포인트>로 유명해진 1970년형 440엔진 닷지 챌린저를 테스트 주행해보기로 결심하고, 스턴트맨 마이크는 여자들의 자동차를 뒤따르며 참혹한 추돌사고를 일으키려 한다.
<데쓰 프루프>는 ‘타란티노의 거실’에서부터 시작된 영화다. 타란티노의 할리우드 저택에는 폴 토머스 앤더슨, 일라이 로스, 케빈 스미스 등의 감독들이 타란티노가 새롭게 발견한 B급영화들을 보며 수다를 떨기 위해 매 주말 모여들었다. 지난 1992년 토론토영화제에 <엘 마리아치>를 홍보하러 갔다가 타란티노와 인연을 맺은 로드리게즈도 그 화려하고도 음습한 초대 멤버 중 한명이었다. 맥주와 대마초와 B급영화, 아시아영화의 밤이 지속되던 2003년의 어느 날, 로드리게즈는 타란티노 방에서 1957년 동시상영영화인 <드래곤스트립 걸>(Dragstrip Girl)과 <록 올 나이트>(Rock All Night)의 포스터를 발견하곤 타란티노에게 물었다. “나는 항상 동시상영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어. 헤이, 우리가 한번 해보는 건 어떨까. 제목은 ‘그라인드 하우스’라고 붙이는 거야!”
우주에서 온 시체들의 밤
<그라인드 하우스>의 또 다른 반쪽,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플래닛 테러>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플래닛 테러>는 존 카펜터의 <뉴욕탈출>과 조지 로메로의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을 뒤섞은 뒤 루치오 풀치 영화의 엉성한 기괴함을 마구 버무려놓은 듯한 좀비영화다. (<데쓰 프루프>의 배경이기도 한) 텍사스 오스틴 교외의 군부대에서 유출된 화학가스를 맡은 사람들이 피부가 짓무른 좀비가 되어 정상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이제 완전히 패닉 상태로 빠져든 도시에서 <엘 마리아치>와 <데스페라도>의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엘 레이(프레디 로드리게즈)와 스트리퍼 체리 달링(로즈 맥고윈)은 사람들을 취합해서 대규모 탈출을 시도한다. 여러 해외 리뷰들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플래닛 테러>는 타란티노의 <데쓰 프루프>처럼 그라인드 하우스 영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기보다는 오래된 장르의 관습을 거리낌없이 도입해서 마구잡이로 구사하는 순도 100% 오락영화다. 특히 영화적인 이미지에서 <플래닛 테러>는 압도적이다. 그간 <그라인드 하우스>의 간판 이미지로 사용되어온 체리 달링은 좀비들에게 빼앗긴 오른쪽 다리에 기관총을 달고는 화끈하게 좀비들을 격퇴하는 여전사로, <킬 빌>의 고고 유바리 이후 가장 키치적으로 근사한 장르영화의 아이콘이다. <플래닛 테러>는 11월 중 국내 개봉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