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코리안 아메리칸 감독들] 그들은 진실된 이야기를 전할 것이다
2008-04-15
글 : 고란 토팔로빅 (뉴욕 아시아영화제 집행위원장)
뉴욕아시아영화제 집행위원장 고란 토팔로픽이 말하는 코리안 아메리칸 시네마

전통적으로 중국계 미국인 그리고 일본계 미국인 감독들이 주를 이루던 아시안 아메리칸 시네마라는 포괄적인 범주를 넘어 코리안 아메리칸 시네마가 최근 하나의 독립적인 범주로 떠오르고 있다. 코리안 아메리칸 시네마는 이제 미국과 한국 양쪽의 영화산업으로부터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놀라운 성취다. 그러나 우리가 코리안 아메리칸 시네마를 말할 때 그것은 정확히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누구를 한국계 미국인 감독이라고 간주해야 할까. 우리는 코리안 아메리칸 문화를 하나의 특정한 문화로, 그리고 코리안 아메리칸 시네마를 그 문화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숨쉬는 공기>
<플래닛 비보이>

관객에서부터 얘기해보자. 미국에는 특별히 코리안 아메리칸 시네마를 지지해줄 만한 상업적인 시장은 없다. 물론 이 영화들은 코리안 아메리칸과 아시안 아메리칸 영화제들에서 각광받겠지만 극장과 홈비디오 시장에 이르면 차라리 아시안 아메리칸 시네마 아니면 미국 독립영화로 포장하여 파는 편이 훨씬 성공 확률이 높을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나 <태풍> 같은 한국영화들이 미국 극장에서 개봉했을 때도 주된 마케팅 전략은 한국 관객의 민족적 자부심에 호소하여 그들을 극장으로 불러내는 것이었다. 결국 극장에는 한국 관객밖에 없었고 박스오피스 성적에서 참패를 면치 못했다. 물론, 한국계 미국인 감독이 만든 영화를 마케팅하면서 한국인과 한국계 미국인 관객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관객은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이기 때문에 그들만으로는 미국에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둘 수는 없다.

비록 그 같은 관객층을 고려해 코리안 아메리칸 시네마라고 굳이 부르지 않더라도 어쨌든 이 영화들은 한국계 미국인들 또는 한국 입양아들의 공유된 경험의 어떤 일면을 다루고 있는 게 아닐까? 실제로 어떤 감독들은 미국에서 다른 존재(아시안)로 자라나면서 겪은 정체성에 관련된 이슈들과 그것이 초래하는 모든 문제들에 주된 관심을 기울인다.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과 미국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인종적 문제들을 지적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영화들은 굉장히 좁은 범위 관객에게만 말을 걸기 때문에 주어진 공동체의 한계를 넘어서기 어렵다. 만약 그것만이 유일한 주제라면 이민자로서의 성장 경험을 공유하지 못하는 관객의 관심을 끌 수 없다.

국제영화제, 영화산업과 더 일반적인 관객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한국계 미국인 감독들은, 빠른 경제·문화적 세계화와 한곳에 정박하지 않는 노마드(유목민)적 삶의 양식이 점증하는 가운데 정체성과 인종이란 더이상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빠르게 변화하는 외적이고 내적인 조건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새롭게 정의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방황의 날들>의 감독 김소영은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런던, 도쿄, 뉴욕 그리고 심지어는 아이슬란드의 수도인 레이캬비크에서 살았다. 이런 경험이 한 사람의 정체성 형성에는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삶에 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면서 삶을 더 큰 그림 속에서 볼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예술가나 이야기꾼의 성장에 필수적인 자질이다. <웨스트 32번가>의 배우 김준은 홍콩, 한국, 미국에서 살았으며 4개 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코리아암 저널>(KoreaAm Journal)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나는 그 어느 곳도 내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디에 있든 그 장소와 일정 정도의 분리감을 느낀다”라고 말한 것은 이런 경험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다. 이 말은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닌 노마드적으로 유동하는 삶의 문제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코리안 아메리칸 영화인들을 정의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그들의 정체성을 관심사,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욕망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행동들을 통해서다. 우리는 사회가 우리를 위해 만들어 준 젠더, 인종, 연령, 성적 취향에 대한 정의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능동적으로 누군가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는 물론 어려움이 따른다.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강력한 생각들, 정의들과 고정관념들은 쉽게 사라지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외부적 한계에 대해 도전하고 극복하려 노력하는 과정은 인간의 경험에서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야말로 젊은 한국계 미국 감독들이 가장 잘하는 부분이다. 보편적인 노력과 개인(한국계 미국인이자 한국계 노마드로서)의 관점을 통해 다양한 주제를 건드릴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더 이상 ‘한국계 미국인’이란 꼬리표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여전히 이것을 코리안 아메리칸 시네마라고 할 수 있을까? 1995년 <시네아스트>에 실린 글에서 피터 팡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아시안 아메리칸 감독이 아시아계 미국인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영화를 만들면 그것을 당신은 아시안 아메리칸 시네마라는 범주에 포함시키겠는가?” 마찬가지로 물어보자. “만약 한국계 미국인 감독이 한국계 미국인들의 이슈를 다루지 않는 영화를 만들면 우리는 그것을 코리안 아메리칸 시네마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까?”

<문유랑가보>의 리 아이작 정 감독이 르완다 인종학살 뒤 두 친구에 대한 영화를 쓰고, 제작하고, 감독하고, 편집하고, 영화로 만들었을 때, 우리는 이것을 코리안 아메리칸 시네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데니스 리와 이지호 감독이 할리우드영화 <정원의 반딧불들>과 <내가 숨쉬는 공기>를 각각 만들었을 때,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한국계 미국 감독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들은 이제 미국 감독인 것일까? <플래닛 비보이>의 벤슨 리 감독이 10년을 쏟아부어 브레이크 댄스의 국제적인 발전을 연대기적으로 기록하는 영화를 만들었을 때, 이 영화를 코리안 아메리칸 시네마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또 한편으로는 한국계 미국인 감독들이 ‘지금 한국영화산업이 지원하고 협력하려 하는 대상’이라고 하는 외부적인 요소가 코리안 아메리칸 감독을 정의내리는 데 또 다른 한축을 형성한다. 이 같은 현상은 아주 최근 일이다. 한국영화의 국내시장이 포화점에 다다르고 가장 큰 시장이었던 일본으로의 수출이 감소하면서 한국영화계는 대안을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비옥해 보이는 미국시장을 대안으로 발견하는 순간 한국영화산업이 재미동포와 동포 1.5세대를 기억해낸 것이다. 미국시장에 들어가기 위한 방편으로 CJ엔터테인먼트와 IHQ는 한국계 미국인 감독들, 예를 들면 마이클 강의 <웨스트 32번가>와 그레이스 리의 <아메리칸 좀비> 같은 장편 영어영화에 돈을 대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역시 필름메이커 개발 랩(Filmmakers Development Lab) 프로젝트를 통해 해외의 한국 감독들을 발견하고 이들을 지원하고 있다.

여기서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한국계 미국인 감독들이 한국 감독들보다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데 훨씬 수월하다는 것이다. 현재 할리우드 에이전시와 스튜디오들은 리메이크 권리의 구매부터 한국 스타들을 캐스팅하는 데까지 한국 것이라면 무엇이든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의외로 아직 한국 감독들 중 누구도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든 사람은 없다. 물론 미국 관객도 좋아할 만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세계적인 수준의 한국 감독들은 넘쳐난다. 그러나 몇몇 요인들이 그들의 진전을 막고 있다. 우선 한국에서 영화를 만드는 방식은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드는 방식과 많이 다르다. 한국 감독들로서는 스튜디오에서 일방적으로 준 프로젝트를 할리우드의 규칙을 따르며 만들어야 한다는 타협안을 수용하기가 어렵다. 충무로에서 창의적 자율권과 성공,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한국 감독들일지라도 미국에서는 맨 밑바닥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그들은 창의적인 자율권과 “최종 편집”권을 스튜디오에 넘겨주어야 하며 더 짧은 시간 안에 촬영을 끝내는 데도 익숙해져야 한다. 할리우드에서라면 어떤 시나리오를 받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자신의 시나리오로 작업을 하더라도 스튜디오의 요구에 따라 많은 것을 수정해야만 한다. 한국에서 누렸던 수준의 창의적인 자율권을 누리려면 먼저 스튜디오에 돈을 벌어줄 만한 능력이 있다는 걸 증명해야만 할 것이다. 이미 어느 정도의 명성을 누리고 있는 한국 감독들에게 이런 상황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물론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고 대개의 경우 간과되긴 하지만 한국의 톱 감독들에게는 언어 장벽도 충분히 문제가 된다.

할리우드 에이전시들이 보기에, 한국계 미국인 감독들은 미국 감독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계 미국인 배우들은 스테레오 타입이나 제한된 기회 때문에 골치를 앓지는 않는다. 감독들은 능력만을 바탕으로 평가된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 배우들에게 좋은 연기를 뽑아내는 능력, 스케줄에 맞추어 일하는 능력, 그리고 가장 기본적으로 할리우드의 규칙에 따라서 일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한국계 미국인 감독들은 한국 감독들보다 이런 역할을 해내는 데 훨씬 적합한 사람들이다. 게다가 그들은 대부분 젊고 경력을 쌓을 기회를 찾고 있기 때문에 좀더 유연하고 열린 자세를 갖고 있다. 결국 할리우드에서 한국계 미국인 감독들의 성패에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꼬리표는 중요하지 않다.

코리안 아메리칸 감독들을 특정하게 제한된 방식으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은 오히려 성장과 성숙, 진보의 징표일 수 있다. 공통된 미학과 주제라는 제한된 측면으로 재단하려 들면 코리안 아메리칸 영화운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한국이라는 인종적 뿌리를 공유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영화는 존재한다. 또 다양한 주제에 대한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의 관점을 제시하고자 하는 코리안 아메리칸 감독들의 공동체도 존재한다.

마이클 강 감독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리 아이작 정, 벤슨 리, 마이클 강, 데니스 리, 이지호, 김진아 등의 감독들은, 듣고자 하는 관객만 있다면 그 관객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생각, 스타일 그리고 그들 자신의 목소리를 전하려 한다. 당신이 그들을 어떤 식으로 정의하건 간에 그들이 계속해서 좋은 영화를 만들 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번역 이서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