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소식]
끝나지 않은 고통의 궤적
2008-05-07
글 : 이영진
김동원 감독의 신작 <끝나지 않은 전쟁> 제작기
김동원 감독

<송환>(2004) 이후 김동원 감독의 신작은 <상계동 올림픽, 그 후>였다.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 스스로도 “상계동 주민의 가난하지만 강했던 생명력이 지금도 여전한지 안부를 묻고 싶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계획은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해 그는 상계동 빈민들의 20년을 따라잡는 대신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씨름했다. “처음엔 자신없어서 못한다고 했지.” 지난해 4월 재미언론인이자 한국유엔인권센터 소속의 활동가인 한우성 씨가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다큐 제작 제안을 했을 때 그는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며 손사래를 쳤다. “변영주 감독한테 부탁해보라고 했다. 이쪽에 내가 전문가도 아니고. <상계동 올림픽, 그 후> 촬영을 막 시작하기도 했고.” 적임자가 아니라고 뒤로 한발 물러섰지만, 한달 후 마음이 싹 바뀌었다. 일본 우익들이 워싱턴포스트에 ‘열받는’ 전면광고를 게재했기 때문이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위안부들이 강제 징용이 아니라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졌다고 하질 않나. 일본군 장교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하질 않나. 가만있으면 안 되겠다 싶었다.”

김동원 감독의 <끝나지 않은 전쟁>은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놓고 오리발을 내미는 일본 정부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다큐멘터리다. 한국, 필리핀, 중국, 호주에서 거주하는 다섯 분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군인들의 성욕 해결을 위해 여성들을 병참품으로 지급했던 일제의 만행을 눈물로 증언한다.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의 사과를 촉구하는 미 하원의 결의안 채택이라는 뚜렷한 목적에 동의해 카메라를 들었지만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라는 거 뻔히 알면서 물어봐야 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상태에서도 성노예로 혹사당하고 성병 검진을 한다던 군의관에게까지 성폭행을 당하는 등 참혹한 기억들은 여전히 씻기지 않는 상처였고, 공포였다. “다큐에 등장하시는 중국의 웨이 할머니는 지금도 가족들에게 수모를 당하면서 살고 계신다.” 아시아 국가들의 여성만이 희생을 강요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라는 점은 더욱 충격이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인도네시아에서 거주하던 열다섯 살 얀은 구역질나는 모포 위에서 치욕을 감내해야 했고, “수녀가 되고 싶었던” 소녀의 꿈은 “거기서 끝이 났다.” “나 또한 피해 여성들이 그렇게 광범위한 줄은 전혀 몰랐다.”

8개월 동안의 촬영 끝에 서둘러 <끝나지 않은 전쟁>을 완성했으나, 김동원 감독은 마음 한 구석이 여전히 찜찜하다. “60여년 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을 위한 친절한 다큐멘터리”라는 제작 의도 때문에 전쟁이라는 폭력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대로 던지고 싶었던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지 못해서는 아니다. “이번 다큐를 찍으면서 내 원칙을 위배했다. 학생들한테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무례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왔다. 작업을 위해 사람을 만나지 말고, 사람을 만나면서 작업을 하라고 했는데, 그걸 내가 지키지 못했다. 필리핀 할머니의 경우, 섭외의 어려움 때문이긴 하지만 1시간 만나서 인터뷰하고 그걸 썼다. 얌체 짓을 한 거지. 할머니들이 동의를 해주셨고 시간적, 경제적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그에게 <끝나지 않은 전쟁>은 끝나지 않은 숙제일지도 모르겠다. “중국의 웨이 할머니에게 기회가 되면 다시 오겠다고 했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법적 대응을 준비하고 계시기도 하고. 취재를 하면서 일본의 학자들이 김학순 할머니 때문에 연구를 시작했다고 하더라. 위안부의 존재를 맨 먼저 세상에 알렸던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에 대해서 새삼 다시 곱씹게 되면서 다큐멘터리로 만들어보고 싶더라. 진실을 위한 김학순 할머니의 그런 용기야말로 다큐멘터리의 정신과도 통하는 것이고.” 이제 <상계동 올림픽, 그 후> 촬영을 슬슬 시작할 것이라는 김동원 감독. 어쩌면 <상계동 올림픽, 그 후> 그의 다음 작품은 <끝나지 못한 전쟁>에 다 담지 못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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