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H+, 세비야의 흡혈귀> RH+, The Vampire of Seville
제12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상영작
기발한 상상력과 유머가 돋보이는 스페인산 애니메이션이다. 그런데 괴상망측한 캐릭터들의 모양새나 전체적인 색감이 어딘지 모르게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1957년생인 안토니오 수레라 감독은 이미 1979년부터 한나 바버라 스튜디오에 몸담아온 애니메이터다. <아스테릭스> 극장판 애니메이션 제작 등에 참여했으며 <핑크팬더> <소닉> <말괄량이 삐삐> 등의 작품에서도 기획, 디자인, 프리 프로덕션을 담당했다. 이후 2003년 시카프에서도 소개된 바 있는 <드래곤 힐>의 각본 및 프로듀서를 맡았으며, <RH+, 세비야의 흡혈귀>는 연출자로서 그의 장편 데뷔작이라 할 수 있다. 가느다란 선으로 ‘출몰’하는 형형색색의 캐릭터들은 그의 장기나 다름없다. 그의 첫 단편 연출작 역시 <자카리아 좀비>(2004)였다. 그러니까 그는 인간 캐릭터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폰 살히헨 백작 아래서 500년을 일한 돈 마누엘 말라상그레는 뱀파이어인 가족들을 데리고 스페인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음산한 날씨에 어딘가 묵시록적인 분위기, 당연히 가족들은 목적지와는 동떨어진 곳에 떨어지고 만다. 이처럼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자, 결국 그는 뉴욕에 정착해서 사악한 미국흡혈귀연맹으로부터 자유의 여신상을 지키려는 외계인들의 계획을 돕게 된다. 계획은 거창하지만 외계인들의 면면은 참으로 한심한 수준이다. 끼니 때우기도 벅찬 그들이 뉴욕의 마천루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악의 무리에 대항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눈이 넷 달린 외계인, 뾰족한 코가 얼굴만큼이나 큰 외계인 등 다채로운 외계인들은 외양과 달리 꽤 순수한 마음씨를 지녔다. 외모는 영락없이 괴물들이지만 다들 소심한 존재들인 것. 그리고 계획과 무관하게 부지런하지도 않다. 꼬박꼬박 대충 만든 샌드위치라도 식사는 해야 하고 볼 것도 즐길 것도 다 누려야 하는 그들이 느릿느릿 어떻게 자유의 여신상을 지켜내는지가 주요한 볼거리다. 전혀 신뢰가 가지 않게 묘사되고 있지만 어린이 관객에게는 열렬한 지지를 받을 만큼 좌충우돌하는 그들의 모습은 꽤 귀엽다. 물론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처럼 뉴욕 도심의 총격전이나 카체이스신도 있고 자유의 여신상 머리에서 펼쳐지는 난데없는 대결도 있다. 그들은 과연 자유의 여신상이 들고 있는 횃불 속으로 들어가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