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들도 보셨다. <과속스캔들>과 <워낭소리>의 흥행으로 나타난 현상 중 가장 눈에 띄는 지표는 중·장년층 관객의 증가량이다. 물론 이들의 잠재력은 이미 <색, 계>와 <미인도> <쌍화점>의 흥행을 통해 입증됐다. 전국 500만명이 넘는 대박영화들은 모두 1년에 영화를 1편 이상 볼까 말까 하는 이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이야기도 오래전에 나왔다. 하지만 <색, 계>에서 <쌍화점>으로 이어진 중·장년층의 극장 나들이가 ‘벗는’ 코드로 설명됐다면, 벗는 영화도 아닌데다 지금까지의 대박영화들처럼 블록버스터도 아닌 <과속스캔들>의 800만명 달성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또한 500만명을 넘으면 중·장년층도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게 이치라고 한다면, 이제 30만명을 넘어선 <워낭소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이 두편의 영화가 일으킨 중·장년층 관객의 관람 현상은 좀더 다른 시각으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워낭소리>의 관객 연령 분포도는 전문가에게도 기현상이다. CGV가 자체 멤버십 회원들을 대상으로 집계한 2008년 연령별 평균 관람률은 40대가 17%, 50대가 2.5%, 60대가 0.4%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1월26일부터 2월1일까지 <워낭소리>의 관객 연령을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40대의 관람률은 22.1%, 50대는 4.4%, 60대는 0.9%였다. 조사 시기가 개봉 2주차인 걸 감안해도 평균을 훨씬 웃도는 수치다. 비슷한 시기의 다른 흥행작과 비교해도 <워낭소리>의 연령 분포도는 유별나다. <과속스캔들>이 7??명을 동원했던 개봉 8주차 연령 분포도를 보면 40대가 21.6%, 50대가 3.4%, 60대가 0.4%다. <쌍화점>은 5주차에 40대 21.0%, 50대 4.8%, 60대 0.9%를 기록했다. <워낭소리>의 2주차 연령별 관람률은 <과속스캔들>의 8주차 관람률을 웃돌고, <쌍화점>의 5주차 관람률과 근사치를 이루는 것이다. <워낭소리>의 중·장년층 관객은 다른 흥행작보다도 빠른 속도로 극장을 찾았다는 점을 알 수 있는 지표다.
<워낭소리> _ 4050의 잠재된 소비 욕구 확인
이 현상의 원인은 크게 3가지로 분석된다. 먼저 주거지역으로 들어간 멀티플렉스들이 중·장년층 관객의 유입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정작 멀티플렉스 관계자들은 이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린다. CGV의 이상규 홍보팀장은 “멀티플렉스가 증가하긴 했지만, 여전히 극장은 젊은 세대의 공간으로 인식된다”고 말했으며, 롯데시네마의 임성규 과장은 “멀티플렉스가 관객 연령층을 확대시켰다는 건 이미 오래전 이야기다. <워낭소리>의 현상을 같은 이유로 분석하는 건 시기상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워낭소리>의 연령 분포도가 일반적인 독립예술영화의 연령 분포도라는 분석도 있다. 맥스무비의 김형호 실장은 “원래 독립영화들은 20대 관객의 비율이 상업영화에 비해 적고, 30대 이상 관객의 비율이 높다”고 말한다. 이 분석도 <워낭소리>의 관람률 증가속도를 설명하긴 어렵다. 사실상 가장 설득력있는 분석은 <워낭소리>가 중·장년층 관객의 취향에 딱 떨어지는 작품이라는 설명이다. 말하자면 그동안 기획 단계나 마케팅 단계에서 후순위로 밀렸던 중·장년층 관객도 자신들이 볼 만한 영화를 끊임없이 찾았다는 뜻이다.
<워낭소리>가 일으킨 기현상은 어쩌면 프로듀서나 마케터들에게 패러다임 전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사례일지도 모른다. 물론 아예 처음부터 중·장년층 관객을 타깃으로 한 영화를 제작해 그들에게 마케팅을 한 작품도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결론은 과장스럽다. 일단 관객 규모 면에서 기존의 상업영화와 비교할 수 없다는 점도 성급한 결론을 주저하게 만드는 이유다. 그럼에도 <워낭소리> 현상은 한 편의 영화가 사회적 신드롬이 되어 일으켰다기 보다는 작품이 가진 자체적인 매력 때문이라는 점에서 신기하다. 이상규 CGV 팀장은 “지금 40대 이상의 관객은 과거 종로 극장가에서 줄을 서서 영화를 보던 세대”라고 말했다. “극장 환경이 바뀌면서 잊고 있었을 뿐이지, 영화에 대한 애정과 경제적·시간적 여유는 오히려 20대보다 더 많다. 또한 20대보다 커뮤니티의 결속력이 강한 세대다. 그들이 원하는 콘텐츠가 공급된다면 나름의 파괴력이 있을 것이다.” 성급한 결론은 우려되지만, <워낭소리>가 중·장년층 관객의 소비 욕구를 달리 파악하게 만든 작품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과속스캔들> _ 관객은 블록버스터만을 원하진 않아
<워낭소리>의 중·장년층 관람률이 그들의 잠재력을 다시 보게 했다면, <과속스캔들>의 중·장년층 관람률은 대박영화의 성격이 어떻게 확장됐는가를 보여준다. 맥스무비에 따르면 현재 <과속스캔들>의 연령별 예매율은 10대가 3%, 20대 45%, 30대 35%, 40대 이상 17%로 나타나고 있다. 맥스무비의 김형호 실장은 “이 비율이 흔히 500만명 이상 대박영화들이 가진 황금비율”이라고 말한다. 가족영화로 규정되지만, 사실상 가족영화로 인식되는 게 아니란 이야기다. <과속스캔들>은 대규모의 제작비를 투입한 블록버스터이거나,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처럼 분단현실을 상기시키거나, <괴물>처럼 아예 새로운 시도를 한 영화가 아닌데도 대박영화의 흐름을 보인다는 점에서 특이한 사례다.
그렇다면 이제는 <과속스캔들>처럼 작은 크기의 가족영화도 잘 만든다면 다양한 연령층의 호응을 얻으며 대박을 칠 수 있는 시대일까? 충무로 관계자들은 이같은 결론도 성급하다고 말한다. 마케팅업체인 영화인의 서경은 팀장은 “여전히 가족영화는 지루하다는 선입견이 있다”며 “처음부터 가족영화를 내세우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아예 아동관객을 타깃으로 하는 영화가 아닌 이상, 어떤 영화든 20대 초반의 핵심관객을 공략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롯데엔터테인먼트의 이진훈 한국영화팀장도 “가족영화 시장은 분명히 있지만, 대박까지 의도하고 만들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서영관 아시아문화기술투자 대표의 말은 이후의 가능성에 대해 좀더 비관적이다. “<과속스캔들>은 사실 예외적인 경우다. 작은 영화들은 80~90% 손실이 나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투자자로서는 여전히 보수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과속스캔들>의 사례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이들도 있다. 심재명 MK픽쳐스 대표는 “이 세상에서 안되는 영화는 없다는 걸 느꼈다”며 “가족영화도 상업적인 매력이 다른 장르 못지않다는 점을 보여줬다”고 말한다. 물론 뻔한 감동영화가 아닌 가족 구성원간의 이야기를 제대로 짚고 새로운 코드를 가미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그런가 하면 <식객>을 제작하고 현재 <식객2>를 준비 중인 이성훈 프로듀서는 “<과속스캔들>이 가족영화 시장의 폭을 더욱 확장시켰다”며 “<식객>도 그랬지만 <식객2> 역시 60, 70대도 볼 수 있는 영화로 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인감독과 신인배우, 적은 예산의 영화도 철저한 기획이 뒷받침된다면 상업적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것 또한 <과속스캔들>의 흥행이 환영받는 이유다. 맥스무비의 김형호 실장은 “블록버스터가 아닌 영화들이라도 손익분기점을 적절히 조절한다면 좀더 여유롭게 살펴볼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과속스캔들>과 <워낭소리>의 흥행 사례가 이후 한국영화시장에 가져올 변화가 마냥 기대되는 것만은 아니다. 가장 큰 우려는 아류작들의 양산이다. <쉬리>가 터지자 한국형 블록버스터영화들이 대거 등장했고, <친구> 이후로는 조폭영화들이 줄을 서지 않았던가. 서영관 아시아문화기술투자 대표는 “요즘 <과속스캔들>도 잘되지 않았냐며 적은 예산과 신인배우로 기획한 영화에 투자를 요청하는 일이 많아졌다”고 말한다.
만약 이들이 제2의 <과속스캔들>, 제2의 <워낭소리>를 카피로 내세워 그저 답습에 그치는 영화라면 어떻게 될까. 가족영화와 중·장년층 관객의 잠재력을 단순히 ‘블루오션’으로 평가하기가 주저되는 이유다. 두 영화의 희한한 흥행이 기존 패러다임의 전환은 아니더라도 일정 부분의 수정을 가능하게 만든 점은 유의미하다. 중·장년층 관객도 영화에 대한 욕구만큼은 20대 못지않다는 것, 그리고 중·장년층을 포함한 모든 관객이 오로지 규모가 크거나 새로운 시도의 영화만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과속스캔들>과 <워낭소리>는 이미 알고 있던 이 사실을 눈으로 확인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