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부산에서 만난 아시아감독 [1] - 이와이 순지
2001-11-23
글 : 김의찬 (영화평론가)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이와이 순지

“이 영화가 유작이었으면 좋겠다”

“영화의 진짜 제목은 <소년들의 모든 것>이다. 그런 의미로 이해해주면 좋겠다.” 신작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하 <릴리>)을 들고 부산영화제를 방문한 이와이 순지는 이렇게 말했다. 최근 이와이 순지 감독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안노 히데야키와 절친한 관계가 된 탓일까.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이와이 순지과 안노 히데야키가 함께 공존하는, 기묘한 작업이다. 감각적으로 인물 동작을 ‘배분’하는 편집, 그리고 나이어린 소년의 이야기라는 점은 이와이 감독의 전작과 같다. 여기에 원조교제와 이지메, 그리고 아이의 살인극이라는 극단의 소재를 끌어들이면서 <릴리…>는 마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신지’의 이야기를 연상케한다. “모두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라는 뇌까림의 기억 말이다.

이와이 감독만큼 동시대 일본영화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인물은 드물다. 그는 개인적으로 영화를 공부했으며 조감독 생활을 지내지 않고 연출자가 되었다. 영화작업을 하지만 뮤직비디오, TV 드라마까지 연출한다. 오즈 야스지로는 거장이지만 그는 말년에 구태의연한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라는 그의 발언은 보수적인 일본영화계, 평단의 심기를 불편케 할만하다. 이를 충분히 의식하고 있음인지 이와이 감독은 스스로를 “어른이 아닌 존재”라고 단정해버린다. “나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어른들 세계는 객관적이고 중간적인 것들로 꽉 차 있다. 난 어른이 되는 게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라 본다”라고 말한다. 퇴행이라 보면 그리 보일 수 있겠지만 이와이 감독의 ‘소년’ 선언은 역설적으로, 1980년대 이후 제자리걸음을 반복한 일본영화계에 대한 냉소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와이 순지의 영화는 명료하다. <언두>와 <러브 레터> <스왈로우 테일>에 이르기까지 그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영화세계를 쌓아올렸다. 아무에게도 가르침을 받지 않고, 영향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와이 감독은 ‘나 홀로’ 방식으로 촬영과 조명 테크닉을 익혔고, 동시대 관객과 대화하는 법을 습득했으며 지극히 사적인 장르영화를 만들어냈다. 이와이 순지가 만든 영화는 모두 청춘영화와 코미디, SF 등 장르의 틀 안에서 움직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어느 장르에도 구속받지 않는다. 이와이 감독의 영화는 작가영화, 장르영화라는 거대 범주보다는 단지 ‘이와이 순지, 개인의 영화’라는 구체적인 카테고리 안에서만 살아숨쉰다. 놀라운 점은 이것이 이와이 순지 영화의 심장과도 같다는 점. 만약 다른 감독에게 같은 배우와 카메라, 그리고 이야기를 던져주고 동일한 조건하에 작업하라며 주문하더라도 아무도 이와이 감독 같은 영화를 만들 수는 없다. ‘이와이 월드’는 말 그대로 하나의 세계, 누군가 모방하고 흉내낼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난 <릴리>가 나의 유작이 되었으면 좋겠다. 반은 농담인데, 만약 재미없는 영화를 찍다가 죽는다면 그게 내 최후의 작품이 될 거 아닌가. <러브레터>가 내 대표작이긴 하지만 <릴리>는 유작이 되면 좋을, 그런 영화다.” <릴리>는 이와이 순지에게도 하나의 전환점이 필요했음을 암시한다. 영화에서 유이치와 호시노 등의 중학생은 인터넷을 통해 가수 릴리 슈슈를 숭배하고 찬양한다. 현실 속에서 그들은 왕따당하고 왕따시키며 서로에게 욕지거리를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가상세계에선 은밀한 내면의 속삭임을 타인에게 털어놓는다. 언젠가 상대 가슴에 칼날을 꽂는 날이 올지라도. 도발적이다. 이와이 순지는 영화 스타일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감독이다. 굳이 비교한다면 일본영화계의 기인이자 천재작가 겸 감독인 데라야마 슈지를 독창적 스타일에서 감독의 전범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영민하면서 어리숙하고, 동시에 새로운 것을 찾아 끊임없이 방황하는 영화감독의 미래가,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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