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바뀌어야 하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신선하고 색다른 어떤 것들을 원하고 있지만 전세계에는 너무나 많은 영화감독들이 있기 때문에 굳이 나도 그런 흐름에 합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차이밍량 감독은 올 부산영화제에서도 그의 세계에 매혹돼본 이라면 익숙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세계를 또다시 보여주었다. 영화 속 캐릭터들은 여전히 소통에 목말라했고 감독은 그들을 침묵과 여백의 세계 속에 가둬두었으며 결국 보는 사람은 어느 정도의 인내심이 있어야 그들을 지켜볼 수 있다. 전작 <구멍>에서 다소나마 변화의 기미가 엿보였기에 혹 그 다음 작품은 그만의 세계에서 많이 벗어난 영화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차이밍량은 여전히 자기 세계를 굳건히 고수한 것처럼 보였다. 영화세계에 변화를 줄 의향은 없는가, 하는 질문을 들은 그는 웃고 나서 딱 한마디로 질문자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왜 바꿔야 하는가?”
차이밍량의 신작 <거기는 지금 몇시니?>는 사람들 사이의 ‘거리’와 그것을 좁히려는 ‘접촉’에의 시도에 관한 영화다. 노점에서 시계를 파는 시아오강과 그가 집착하는 여인 시앙치이 사이에는 타이베이와 파리 사이의 공간적 거리가 놓여 있고, 시아오강의 어머니와 그녀의 작고한 남편 사이에는 삶과 죽음이 건너지 못할 거리로서 자리하고 있다. 그런 거리를 메워보겠다고 시아오강은 모든 시계를 파리의 시간으로 맞춰놓고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혼이 빨리 나타나기를 원한다.
<거기는 지금 몇시니?>가 차이밍량의 예전 작품들과 비교해 월등한 성취를 거둔 영화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조금씩 갈리는 상태다. 하지만 이것이 현대인의 상실과 고독을 그리는 시네아스트로서 차이밍량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음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드는 수작임에는 틀림없다. 이 영화로 다시 한번 국제적인 입지를 높인 그이건만 여전히 파이낸싱을 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음을 토로했다. 적은 금액의 제작비를 구하는 건 비교적 쉽지만 자신의 프로젝트를 제대로 완수하는 데 충분한 도움을 줄 만한 투자자를 찾는 건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 그러면서 그는 영화계의 모든 곳에 상업화만이 깊이 침투하는 요즘의 현실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늘어놨다. 그럴 때 차이밍량은 확실히 비관주의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는 그의 세계를 보건대 그 비관주의가 ‘창의적인’ 영화감독으로서 차이밍량의 입지를 훼손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그는 좋지 않은 영화적 환경이 오히려 자신의 창의성에 자극이 된다고 말한다. 최근 아시아에서 창의적인 영화가 만들어지는 이유에 대해서도 그는 “우리(아시아의 영화감독들)가 지금처럼 나쁜 시대와 나쁜 환경에서 고투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 나쁜 시대의 창의적인 아시아영화의 중심에 좋은 의미의 비관주의자 차이밍량은 꽤 오랫동안 서 있을 것 같다.
차이밍량은 현재 <흑안권>(黑眼圈)이라는 제목이 달린 시나리오를 수정중이라고 했다. 모든 게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내년 말쯤에나 촬영에 들어갈 것이라니 그의 영화를 기다리는 팬들은 인내심을 가져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