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부산에서 만난 아시아감독 [3] - 프루트 챈
2001-11-23
글 : 박은영
<할리우드 홍콩>의 프루트 챈

“홍콩, 내 사랑, 어둠만이 가득한”

1997년 7월1일. 유니언 잭이 하강하고 오성홍기가 게양되던 날, 홍콩의 운명은 바뀌었다. 누구는 할리우드로 건너가고, 누구는 중국 본토를 껴안았지만, 프루트 챈은 ‘그날’을 가슴에 묻은 채 ‘홍콩 지킴이’로 남았다. 반환 직전의 불길한 공기를 호흡하는 거리 아이들을 포착한 출세작 <메이드 인 홍콩>이 파문을 일으킨 이유는, 그것이 8만달러짜리 영화라거나 리얼한 상황과 기묘하게 어우러진 MTV적 영상이 돋보여서만은 아니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더욱 두드러지는 ‘홍콩의 그늘’을 주시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진짜 홍콩의 모습’이라고 외칠 수 있었던 용기와 재기 때문이다. 프루트 챈은 <그해 불꽃놀이는 유난히 화려했다> <리틀 청>으로 이어지는 반환 3부작을 마친 뒤에는 “중국사회에서 일종의 금기사항”인 섹스를 전면에 내세운 창녀 시리즈로 돌입해 <두리안 두리안> <할리우드 홍콩>을 완성해냈다.

“홍콩도 변했고, 내 시점도 변했다.” 프루트 챈은 창녀 시리즈의 1부인 <두리안 두리안>을 만들 무렵만 해도, 중국 본토를 홍콩과는 다른 별개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본토에서 홍콩으로 흘러들어온 주인공 창녀는 홍콩이라는 공간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유하다가 고향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할리우드 홍콩>에 등장하는 상하이 출신 창녀 홍홍은 더이상 ‘외부인’이 아니다. 그녀는 홍콩에서 살아남을 뿐 아니라, 홍콩 ‘토박이’들에게 잠시 달콤한 판타지를 선사한 대가로 그들의 삶을 파탄지경으로 몰고 간다. 매춘업을 하는 날건달과 바비큐집 삼부자를 차례로 유혹한 뒤, 자신을 ‘미성년자’로 속여 곤경에 빠뜨리는 것. 프루트 챈이 여기서 주목하는 건 이런 대담무쌍한 대륙 여인의 행각이 아니라, 그녀에게 휘둘리고 망가져가는 무기력하고 대책없는 홍콩인들이다. “홍콩경제나 홍콩인의 의식에서 중국 본토가 행사하는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홍콩인들이 이런 변화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경제적인 위기가 닥치면서 홍콩사회 내부의 모순이 부각되고 있고, 사람들의 동요도 커졌다. 노력도 하지 않고 한탄만 하면 무슨 소용 있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홍콩사회의 그늘을 포착하고 아이러니를 부각하는 솜씨는 여전하지만, <할리우드 홍콩>에는 전작들을 관통하던 다큐멘터리적 요소들이 걷히고 판타지적인 상황과 분위기가 자주 출몰한다. 이는 가혹한 현실을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한다. 홍홍의 존재가 가져다준 희망과 활력의 판타지는, 피비린내 진동하는 후반부의 깡패 활극과 맞부딪혀 더욱 강한 대비를 이루며 충격을 안긴다. 프루트 챈은 “블랙코미디적인 요소가 있고 그것들을 과장되게 표현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예전 스타일 그대로”라고 소개한다. 실제로 블랙 유머의 명도는 한층 낮아져 섬뜩한 기운까지 감돈다. 홍홍과 한패인 조직 폭력배의 칼부림에 동명이인의 두 남자가 손을 잃는다. 우여곡절 끝에 손목을 찾아 봉합 수술을 했으나, 그들의 손은 뒤바뀌었다. 용 문신을 한 팔에 뱀 꼬리 문신이 새겨진 손이 이어붙여진 것. 용두사미. 프루트 챈은 그것이 바로 ‘홍콩의 오늘’이라고 말한다. 시작은 창대했으나 갈수록 미미해지는. <할리우드 홍콩>에 감도는 묵직한 비감의 정체는, 단 하나의 ‘사랑’인 홍콩을 향한, 프루트 챈의 근심어린 얼굴이다.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