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혼자 축구하다 통화하는 장면 좋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와 <해변의 여인> 두편을 함께하면서 같은 감독과 작업해도 또 다른 느낌이 나올 수 있다는 충분한 믿음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 작업이 힘들어도 마음은 편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갔다. 내 나름대로 생각하고 해석한 게 있지만, 그걸 감독님한테 설명하지 않았고 지금 이 자리에서도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내 해석대로 정의되어 보여지면 안되는 영화니까. 양 화백 정원에서 물 빠진 수로 위에 누울 때의 방향까지도,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누웠지만 그게 맞는지 틀리는지는 나도 모른다.
홍 감독님 영화는 찍으러 갈 땐 편하고 찍고 나면 세배는 더 피곤하다. 원신 원컷이 대부분인데, 누구든 무엇이든 상태가 안 좋으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또 감독님 특성이 그렇다. “매번 새롭게, 진짜처럼, 앞의 장면 잊어버려.”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또 대사가 없는 장면은 편할 거 같지만, 절대 아니다. (웃음) 공현희와 오정희가 감정싸움 벌이는 술자리 찍을 때도 난 대사가 없으니까 겉으로야 “야 오늘 노났다, 술먹고 놀다 가야지” 하지만 머릿속은 진짜 복잡해졌다. 카메라는 정면에 있고, 날 여자들 사이에 딱 앉혀두고 있으니, 여자들 사이의 말싸움에서 표정과 리액션을 해줘야 하는데 이게 또 장난이 아니다. 대사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문제다.
이번에 많은 배우들이 나온다. 엄지원씨와 고현정씨는 말할 것도 없고 공형진씨, 유준상씨, 정유미씨, 하정우씨 등등.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나오는 게 나밖에 없는데, 제천에서 2주일 찍고 제주도에서 보름간 찍으면서 합숙 분위기였다. 그리고 새로운 배우들이 며칠에 한번씩 등장한다. 난 거의 손님 접대하는 입장이었던 거다. (웃음) 한분 오시면 신입생 환영회처럼 술 마시고, 촬영하고, 끝나면 우리끼리 쫑파티 열고, 보내고 나면 또 다음 손님 오고. (웃음) 이런 사적인 분위기도 좋았고, 연기에서도 정말 좋았다. 사람들이 이분들을 ‘카메오’라고 하는데, 그거 절대 아니다. 다들 정확하게 치고 빠지면서 제 역할을 연기했다. 완성된 영화를 볼 땐 이분들이 너무 잘하니까 속았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뭐야 이 사람들, 난 거의 배경이잖아, 나 너무 안 보이네. (웃음)
개인적으로 맘에 드는 장면 중 하나는 경남이 제주도에서 혼자 축구하다가 고 국장과 통화하는 장면이다. 감독님이 이 장면은 삭제될 수도 있다고 얘기하고 촬영에 들어갔는데, 이미 서울에 가 있던 준상 형과 실제로 통화하면서 말싸움할 때의 그 느낌이 순간적으로 너무 좋았다. 속으로 ‘이 신은 살았으면 좋겠네’ 싶었는데, 완성본에 결국 살아 있는 걸 보니까 흐뭇했다. 그 신 괜찮지 않았나? (웃음) 이런 얘기 하기 쑥스럽지만.
엄지원 “완전 하이코미디예요. 하이코미디!”
내 역할이 제천영화제의 프로그래머라는 것까지만 아는 상황에서, 촬영 들어가기 두달 전 전주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게 됐다. 10일 동안 전주에서 수많은 프로그래머와 감독들을 만났다. 그때 거기서 보낸 시간들이 현희 캐릭터에 알게 모르게 많은 영감을 준 것 같다. 첫날 아침 첫 대본을 보는데, 전주에서의 경험들이 삭 들어오더라고. (웃음) 촬영 전에 감독님께 의상 컨펌받을 때에도 감독님이 처음에 주문한 건 편안한 베이식 아이템들이었는데, 일부러 프린트도 강하고 컬러풀한 옷도 함께 골라갔다. 어차피 내 옷장에서 내 옷을 꺼내가는 건데, 정확하게 현희가 이런 사람일 거야라는 계산보다는 전주에서의 경험과 더불어 <극장전>의 영실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으면 좋겠다는 어렴풋한 생각이 있었다. 스페인 여행 갔을 때 샀던 ‘금자씨’ 옷이 뽑히길 은근히 바랐는데, 감독님이 역시 그걸로 골라주시더라.
마지막 장면은 두고두고 아쉽다. 처음엔 오픈카를 타고 제천 호반도로를 달리면서 경남한테 소리소리지르는 장면이었는데 촬영 당일 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차 뚜껑을 닫고 촬영에 들어갔다. 일단 뚜껑을 열어야 현희 성격이 정확하게 드러나는데, 거기서부터 속이 상했다. 바람을 맞으면서 머리칼이 막 흩날릴 때 그 난리를 치는 게 상상만 해도 좋았던 거야. (웃음) 하지만 뚜껑을 닫으니 각도가 안 나와 결국 오픈카를 포기하고 호텔 옆 산책길로 장소를 바꿨다. 근데 또 근처 공원에서 무슨 여름 축제 리허설한다고 음악을 틀어놨다. 그거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겨우 리허설 들어가는데 해는 질락말락하고, 테이크를 딱 두번 갔는데 거기서 촬영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너무 중요한 장면인데,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연기 패턴이 여러 개인데 두개밖에 못 보여주고 그걸로 선택되어버리니까 속이 많이 상했다.
그래도 촬영 마치고 서울 올라오니까 제주도 장면이 궁금해서 미치겠더라. (웃음) 매일매일 태우 오빠한테 한 시간씩 전화 걸어서 오늘 뭐 찍었는지 꼬치꼬치 물었다. 배우들 마음이 다 똑같다. 혹시 다른 배역들한테 더 좋은 거 시키는 거 아냐 하면서 혼자 괜히 의심하고. (웃음) 이번 영화는 특히나 우디 앨런 영화 같다. 나 혼자서 “감독님 완전 하이코미디예요. 하이코미디!” 하고 호들갑 떨었다니까. (웃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극장전> 때는 감독님이 배우를 참 많이 사랑하는구나 하는 걸 느끼면서 촬영했다면 이번엔 이미 그 점은 잘 알고 있으니까 훨씬 더 자유스럽고 편한 느낌으로 찍었던 것 같다. 행복한 경험이었다.
공형진 “감독님은 머리 좋은 무서운 한량”
부상용이 왜 구경남에게 화가 났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유신이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보면서 경남이 자위를 했거나, 유신이 과대망상으로 상용에게 거짓말을 한 건 아닐까. 홍상수 감독과 이런 우스갯소리는 많이 했지만, 그 양반이 선을 그어주는 사람은 아니지 않나. (웃음) 상용이 손에 붕대를 감는 장면도 그렇다. 정말 느닷없지만 그만큼 열어놓는 거라고 봤다.
구경남의 꿈장면에서 죽어 있는 연기를 할 때는 정말 어색해 죽겠더라. (웃음) 다들 정말 골때리는 코미디라고 했다. 죽어 있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이걸 어째야 하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묘한 흥분이 느껴졌다. 전날 밤에 술을 마실 때만 해도 아무런 이야기도 안 해주다가 아침에 대본을 주는 것도 그랬다. 내가 지금까지 20년 연기 생활을 했지만 내가 가진 순발력을 시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 제일 쉬웠던 한편, 제일 어려운 영화였다고 해야 할까. 감독님이 나를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으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문자로 애정표현을 해주시더라. “‘너무 고맙고 당신의 열정에 반했고 당신은 연기 잘하는 배우’라고. (웃음)” 이런 표현을 해도 되는지 모르지만, 홍상수 감독은 대단히 머리가 좋으면서 무서운 한량이다. 사람들이 불평하는 부분을 다 받아주면서도 결국 자신의 생각은 다 결정되어 있더라. 그의 다음 작품에서는 출연료 받고 주인공을 하고 싶다. (웃음)
김연수 “원하는 상황이 나올 때까지 찍더라”
강간범? 내가 강간범인가? 지금 처음 들었다. 그런 줄 몰랐다. 촬영 전 스탭들은 제일 찌질한 역할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흥행 감독이라고 해서 그 정도만 알고 갔다. 홍상수 감독이 좀 신선한 얼굴을 찾으려고 하던 중 소설가 사진들을 보다가 그중 제일 낫다고 해서 선택했다고 하더라. (웃음) 평소 좋아하는 감독이라 나는 얼굴이나 한번 볼까 해서 갔던 거였다. 일종의 오디션을 했는데, 당연히 떨어질 줄 알았더니 같이 하자고 그러더라.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까, 지독한 사람이었다. (웃음) 나는 홍상수의 영화가 배우에게 상황을 인지시킨 뒤 그냥 던져놓고 찍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자신이 원하는 상황이 나올 때까지 계속 찍더라. 호텔방에서 술 마시는 장면을 밤새 찍었다. 나도 소설을 쓸 때는 그렇게 쓴다. 마음에 드는 게 나올 때까지 쓴다. 그런데 내가 괴롭히는 건 나 하나지만, 홍상수 감독은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많은 사람들을 괴롭힐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영화라는 게 마음이 단호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튼 이제는 마음이 편하다. 다른 소설가들은 내 장면이 당연히 편집될 거라고 했고, 친구 김중혁은 “넌 분명 파렴치한 남자로 나와서 아마 작가 인생이 끝날 거야”라고 겁을 줬다. 그런데 강간범이라고… 음… 빨리 다른 영화를 한편 더 출연해서 이미지를 바꿔야겠다. (웃음)
유준상 “질투 하나만 이야기해줬다”
<해변의 여인> 때 홍상수 감독이 같이 작업을 해보자고 했었다. 어떤 역할을 맡기려 했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낮술을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던 기억만 난다. 평소 그의 영화가 사소한 부분에서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언젠가는 꼭 같이 하고 싶었다.
감독님이 고 국장에 대해 이야기한 건 ‘질투’ 하나였다. 나도 그것 말고 이 남자에 대해 다른 걸 고민해볼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신기한 건 아침에 대본을 보고 바로 연기를 하는데도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고 국장의 캐릭터가 잡혀 있는 거다. 이걸 정말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는 대본도 단순히 암기해서는 안되더라. 일단 몰입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렇게 몰입하고 연기를 한 뒤에는 또 금세 다 잊어먹는다. 술에 취해서 연기를 해도 정신이 맑아질 정도이니 뭐…. 촬영할 때 함께 술을 마시면서 일상적인 것부터 철학적인 것까지 많은 질문을 받았는데, 그것도 지금은 다 잊어버렸다. 내가 보기에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가진 정말 큰 장점이다. (웃음) 그래서일까. 아직은 홍상수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그의 영화에 대해서 뭐라 콕 찍어서 이야기하지도 못하겠다. 다만 그가 친절하게 하지 않아도, 일부러 뭔가 주려하지 않아도 눈빛에서 느껴지는 배려는 기억한다.
하정우 “마지막에 우는 장면 정말 웃기지 않나”
진짜 미루면 안되겠다 싶었다. 스케줄이 맞지 않아 계속 작업을 못하다가 이번에 내가 먼저 고현정 누나한테 전화를 걸었다. 영화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조그만 역할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지 알아봐달라고 했다. 어떻게든 홍상수 감독과 연을 맺고 싶었다.
감독님을 만났다. 내가 연기할 인물이 조각가라고 하셨다. 화백 양천수의 동네 친한 제자이면서, 친한 동생이자 후배. 전에 홍상수 감독과 선배 배우들과의 술자리에서 후배로서 깍듯했던 내 모습을 보셨나보더라. 그런 부분에서 영감을 얻으신 것 같다. 영화 속 조씨를 보면 안다. 대사를 받았을 때, 어떤 느낌으로 내 캐릭터를 만들었고 주셨는지 느낌이 왔다. 외모적인 느낌에 대해서도 얘기를 해주셨는데, 마침 또 내가 두달 동안 일본 시골에서 영화 <보트>를 촬영하고 있었다. 이미 스킨 톤 자체가 컨트리 필이어서 그대로 영화 찍으면 되겠다 싶었다. 더더욱 꾸밈없이 촬영에 임했다. 현장에서는 감독님이 디렉션해주고 방향 잡아주는 걸 100% 소화하려고 했다. 작업 방식이 불편하거나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철저히 캐릭터를 분석하고 준비해서 촬영장에 가야 할 때도 있지만, 감독님 작품 스타일에선 철저하게 비워놓고 가서 그 안을 채워나가야 하는 것 같다. 유연성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다. 근데 마지막에 우는 장면 정말 웃기지 않나? (웃음)
정유미 “감독님에게서 우주의 기운이 돌더라”
홍상수 감독님을 만나서 대화를 나눴는데 ‘우주의 기운’이 느껴졌다. 처음엔 감독님의 영화에 너무 빨리 출연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고민의 시간을 한번 가졌다. 언젠가는 만나 뵙고 싶은 분이었지만 기회가 빨리 온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얘기를 나누면서 왠지 안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바로 우주의 기운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제목을 듣고 나서는 모든 걱정과 불안이 사라졌다.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었고 제목만으로도 확실히 이 작품을 해야겠구나 싶었다. 사실 전에 홍 감독님의 영화를 몇편 봤지만 잘 모르겠더라. 감독님 영화를 보면 불편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 불편한 게 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떤 편견을 가지고 판단하니까. 그게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진짜~’ 하는 마음으로 출연했다. 확실히 감독님과 같이 작업하고 나서 쓸데없는 생각들이 많이 없어졌고, 닫혀 있던 것들이 많이 열렸다. 작업 스타일도 너무 재밌었다. 처음에는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도 됐다. “준비 어떻게 하면 돼요, 감독님?” 하고 물어보면 “그냥 시간 맞춰서 와” 이러신다. 그럼 시간 맞춰서 간다. 촬영날 아침 주어진 시나리오를 받아들고 캐릭터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냥 찍는다. 꿈장면 같은, 앞뒤 연결이 되지 않는 엉뚱한 상황이 주어져도 처음엔 “뭐야 이게” 하지만 결국 “에라 모르겠다” 하고 연기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