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영화광의 근심, 21세기 영화의 그 우울한 스펙터클
선도 교사들의 눈을 피해, 모자를 눌러쓰고 극장 한켠에서 숨죽인 채 은막에 투사되는 빛의 향연에 넋을 잃었던 두 고등학생이 있었다. 두 사람은 어느 극장에서 스치듯 비켜가기도 했고, 독일문화원에서 얼굴을 마주보기도 했다. 그의 한 사람은 구회영이란 필명의 영화평론가 그리고 본명의 감독이 됐고, 영상원 교수, 부천영화제 집행위원장, 영화진흥위원이란 감투를 한꺼번에 쓰게 됐다. 다른 한 사람은 <키노> 편집장과 전주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거쳐 며칠 전 백수, 그러니까 순수 평론가가 됐다.
김홍준과 정성일.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건, 한국에 영화의 시대가 막 도래했을 때, 그리고 그후로도 오랫동안, 그들이 관객의 곁에서 영화의 아찔한 매혹을, 영화의 아득한 깊이를, 이전엔 들어보지 못한 섬세하고 세련된 언어로 들려준, 관객의 친구, 영화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많은 감투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그들은 영화광이다. 그리고 오늘, 영화를 근심하고 있다. 우리에겐 아직 너무 많은 영화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더욱더 크고 많은 영화가 약속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왜 ‘영화’는 점점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위대한 영화의 시대는 이제 역사 속에 묻힌 게 아닐까.
여기 영화광의 네가지 근심이 있다. 이건 결론이 아니라 논의의 출발점이다. 그들에게 무언가 들으려 하는 건, 그들이 정답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영화의 오랜 친구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의 현장을 달리다가, 문득 뒤돌아서 영화의 오늘과 내일을 바라보며 두 영화광이 다섯 시간에 걸쳐 나눈 이야기.
프롤로그
김홍준(이하 김) | 자의건 타의건 20년 남짓, 영화와 인연을 맺고 살다보니 때론 중심에서 때론 변방에서 때론 중심인지 변방인지 모를 곳에서 머물러 왔는데, 그런 개인적인 술회를 할 것 같다. 편견과 주관에 가득한 넋두리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난 영화감독 지망생도 아니었고, 영화를 직업으로 갖겠다는 생각도 늦게 했다. 영화를 좋아하긴 했지만 사치스럽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영화가 사치스럽다고 생각한 건, 동시대 주변 친구들 사이에서 그것이 하나의 독특한 교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비슷한 취향을 가진 친구들을 만났다. 얄랴셩도 그랬고, 정성일, 전양준씨를 만난 것도 그랬고. 20대 초반에 우리는 술자리에서 종종, 한국은 국제영화제 안 하나, 단편영화 지원 안 해주나, 국립영화학교 안 생기나, 영화전문지 안 생기나, 그런 얘기했다. 그로부터 약 25년이 지났다. 재밌다. 산다는 게. 그때 그런 얘기하면서 우리 살아생전에 이뤄질 줄은 몰랐다. 그것도 운명의 장난인지, 말이 씨가 된 건지, 그 실행자의 입장, 실무자들이 다 우리가 돼 있더라. 영화제, 영화잡지, 영화정책 관련자. 그때 영화광과 지금의 영화광 사이엔 미세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그때는 없는 것을 생각했고, 지금은 있는 것, 주어진 것을 생각하고 누린다는 점이다. 외국영화제를 다녀보면서 느낀 건데, 문화가 싹틀 수 있는 토양은, 르네상스든 문화혁명이든 꾸준히 있어온 것이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문화를 누릴 권리, 그걸 지원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토양에, 음악이든 미술이든 영화의 씨를 뿌리면, 토양의 상태, 씨앗의 DNA에 따라 다양한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 우린 씨앗을 만들어 뿌리려는 사람은 있는데, 그 토양이 흙이 아니라 모래다. 그럼 고사하게 마련이다. 씨앗의 성분도 중요하지만, 먼저 모래를 흙으로 만들어놔야 한다. 그래도 갈 길이 멀다. 문화가 기능하고 만개하려면,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그런 역사성, 대중의 욕망과 욕구가 토양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외국은 그런 토양이 있다.
김홍준
1956년생
서울학 인류학과 졸업(영화동아리 얄라셩)
미국 템플대 영상인류학 석사과정 수료
동대학 문화인류학 박사과정 수료
<개벽> <장군의 아들2> <장군의 아들3> 연출부
<서편제> 조연출
<장미빛 인생> <정글 스토리> 연출
제1∼3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
현재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
영상진흥위원회 진흥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교수
정성일(이하 정) | 요즘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읽고 있는데, 거기 “애매해져버린 당신”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 모두 영화를 한다는 지점에서, 우리 아버지와 형, 지금 시작하는 동생들과의 사이에서 ‘애매해져버린 당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홍준이 형을 처음 본 순간을 잊지 못한다. 76년, 고2 때 독일문화원에서 <도시의 앨리스>를 봤는데, 그 감독(빔 벤더스)이 왔다고 하더라. 그 자리에서 감독에게 질문하던 대학생이 누구인지, 소년은 궁금했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다시 만났을 때, 지금은 사라진 재개봉관에서 우리는 <중경삼림>처럼 여러 번 스쳐지나갔다는 걸 알았다. 파고다극장에서 <프렌치 커넥션>을 볼 때 2층에서 콜라병이 떨어졌던 걸 같이 기억하고 있었던 거다. 그때 우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전함 포템킨>을 살아생전 볼 수 있을까, 오즈의 영화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그 순간은 성큼 다가왔다. 어찌됐건 다른 지점에서 그 소망을 이뤄냈다. 내 연배들이 하고 있는 일, 전양준 선배나 임재철씨가 하고 있는 일, 홍준이 형이 영진위에서 하고 있는 일, 다 그 토양을 대지로 만들어가는 노력들이다. 그런데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영토 싸움으로 인식되고 있다. 역사성의 좋고 나쁨, 욕망의 좋고 나쁨, 그 네 가지가 모순된 관계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것, 그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소망했던 것들을 하고 있는데도 소모전을 벌여야 하고 희생자들을 만들어내는, 그런 애매한 지점에 서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세대에게는 영화를 하면서 아버지가 없었던 것 같다. 있다 해도 너무 허약해 쓰러뜨리기조차 힘든, 그런 아버지였다. 그런데 우리는 뒤쫓아오는 영화광들한테 너무 힘든 형들이 돼버린 건 아닐까. 이 형들 사이에서는 이상한 <첩혈쌍웅>의 분위기가 형성돼 있기 때문에, 이 형들과 동생들, 그러니까 이 가족들이 미묘한 관계의 자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성일
1959년생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고려대 언론대학 석사과정
계간 <열린 영화>에 등단
<애란> 각본
월간 <로드쇼> 창간 편집장
월간 <키노> 창간 편집장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2001년 1월31일, 프로그래머 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