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김홍준·정성일의 종횡4담 [5] - 영화광·에필로그
2001-02-22
정리 : 박은영

영화광, 영화사와 결별하다

오즈와 존 포드와 고다르와 대결하지 않는 영화광, 영화사에 대한 콤플렉스를 깨끗이 지운 영화광, 대신 카메라를 들고 학교와 거리를 누비는 영화광의 시대가 왔다. 백과사전식 영화 교양에 몰두한 전 시대의 영화광은 이제 몰락의 운명을 걸을 것인가. 새로운 영화광들이 만들 영화세상은 어떤 것인가.

김 | 우리 세대엔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절망과 환상이 있었다. 지금은 환상을 용납하지 않는다. 취향과 기호만이 있을 뿐이다. 그땐 취향과 기호를 떠난 공감대가 있었다. 다르면 적대시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개인 취향이 다르고 좋아하는 영화가 달라도, 별 문제는 아니었다. 계급적 차이도 없었고. 토론이 벌어져도 싸움은 없었다. 끼리끼리 모여야 한다는 생각도 안 했다. 고다르든, 안토니오니든, 파스빈더든, 그들을 좋아하는 순간, 우린 한울타리 안에 있었다.

정 | 트뤼포는 ‘내가 내일 종신형을 받는다 할지라도 누군가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공격한다면 항소장 쓰는 걸 중지하고 그 영화를 옹호할 것이다’라고 했다. 요즘은 모여서 바로 영화를 만든다. 우린 그러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예전엔 영화를 공유했지만 지금은 영화를 창작한다. 그들이 모두 감독을 꿈꾸는 건 아니다. 만들고 틀고 자기들끼리 좋아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좋아하는 영화제목을 열거하고 애정을 고백했는데, 그러던 것이 고색창연하게 느껴질 만큼 영화광 세대 차가 벌어져 있다. 예전엔 못 본 영화제목을 기억했다가 기어이 달려가 보곤 했다. 요즘 영화광들은 못 본 영화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다. 우리 때는 단과 급이 있었다. 누가 고다르 운운하면 또다른 이가 장 마리스트라우프를 언급하고, 그런 식의 진검승부를 했다. 구로사와를 얘기하면 7급, 오즈를 얘기하면 3급, 스즈키 세이준을 얘기하면 1급이었다. (웃음) 그런데 영화광으로의 깊이보다는 취향의 차이가 중요해지는 식으로, 지형도가 바뀌고 있다. 그건 바람직하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천국이라고 말하기엔, DVD의 고전 마켓이 형성돼 있지 않아 제한적인 얘기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김 | 우리 세대의 영화광들은 스노비즘에 치기도 결합돼 조금 복잡했던 것 같다. 남보다 먼저 알고 싶어했고, 진검승부를 하고 싶어했고. 남은 게 하나 있긴 하다. 옛날 한국영화다. 보는 이가 없고 본 이가 없어 낯선, 미지의 영토다. 그것마저 <한국영화걸작선>으로 그 통로가 열린다. 유행이라면, 90년대 초에는 외국 예술영화를 알고 있는 게 중요했고, 90년대 이후에는 SF나 호러 같은 장르영화를 얼마나 구석구석 찾아내느냐가 중요해졌다. 마지막 남은 것이 옛날 한국영화다. 영퀴방에 ‘57년작, 황정순 주연의 영화’가 문제로 올라가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정 | 10대에는 영화관에서의 단속을 무릅쓰면서까지 볼 만큼, 한국영화가 매혹적이지 못했다. 한국영화보다 걸리면 외화보다 처벌이 셌다. (웃음) 한 친구가 박노식 주연의 <자크를 채워라>를 보다가 걸렸는데 선생님이 무슨 영화 보다 그랬냐고 하니까, 반말하기 뭣 했는지, ‘자크를 채웁시다’라고 해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와 가장 큰 차이점, 지금은 정보와 지식이 넘쳐난다는 거다. 당시 우린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그걸 하나씩 보물섬 찾듯이 찾아갔다. 느리긴 했지만 지식과 정보에 대해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다. 지금은 지식보다 정보로 쌓이는 추세고 영화정보지를 읽는 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다. 지금의 영화광에겐 ‘광’이라고 할 만큼 억압과 저항, 그 사이의 변증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저항할 것이 있는가. 영화의 힘은 불순한 거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교육 특집기사를 보니, 프랑스가 세계 최초로 영화를 정규교육 과정에 넣으려 하고 있다는데, 그 반대 의견이 흥미로웠다. 영화는 보지 말라고 하니까 더 매혹적이고, 힘을 얻는 것이다, 문학도 학교에서 가르치니까 찾는 사람이 없는데, 왜 영화를 벌써 박물관으로 보내려 하느냐, 그런 얘기였다. 지금 영화는 공식문화가 돼버려, 매력적인 대상이 되기엔 힘이 부족한 것 같다.

김 | 매혹과 열정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옛날 한국영화를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봐라. 모르는 거니까, 흥분할 수 있다. 둘째. 제도교육으로 배우려 하지 말아라. 나는 8mm 카메라의 작동법만 알고 영화라는 걸 찍었다. 편집이나 쇼트 개념은, 나중에 차례로 배웠고, 1년 뒤에 드라마를 찍었다. 그게 최고의 교육이다. 영화의 역사를 몸으로 느껴야 한다. 조명에서 편집까지, 뤼미에르부터 타란티노까지, 몸으로 느낄 기회를 처음부터 박탈해선 안 된다. 이미 알고 있는 건 못 잊을 망정 만들 때 순박한 영화부터 복잡한 영화까지 밟아보는 게 어떨까. 그럼 영화가 재밌을 수 있지 않을까.

정 | 책을 버리고 카메라를 들어라? 그리고 거리로 나와라?

김 | 배우려 하지 말라는 거다.

에필로그

김 | 오랜만에 정성일을 만나니,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초조함이 든다. 내 영화를 만들고 싶은 것은, 태어나서 가장 즐겁게 한 일이기 때문이다. 정체성 이전에 작업의 즐거움의 문제다. 즐거움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하는 것들 때문에 도망다닌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최저 수준으로는 영화를 벗어나 엉뚱한 감투를 쓰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최고 수준으로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나 자신도 내 영화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끊어야 할 것들, 내려놓아야 할 책임들이 많다. 돈 벌어야 한다는 제작자와 예술해야 한다는 감독이 만들어내는 긴장의 영화가, 나를 건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정 | 7년 동안 해왔던 <키노> 편집장을 그만두고, 전주영화제를 그만두고,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됐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내 좌표를 다시 설정해야 할 것 같다. 내 나이에, 허우샤오시엔은 <비정성시>를 찍었더라. 반성하고 있다. 그런 작품을 지금 당장 만든다는 건 언감생심이지만, 나는 그 고민에 비슷하게 닿기라도 했는가. 며칠 전, 다시 한번 <비정성시>를 봤다. 사임이 결정되던 그 다음날.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건, 다시 영화였다. 독자들도 그런 영화가 한편씩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나이를 생각해 보고, 어떤 감독이든 그가 그 나이에 만든 영화를 찾아보고, 그 사람들과 같이 세상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길 바란다.

김 |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좌절하겠다.

정 | 같은 근심을 하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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